호텔 ‘블루 온.’
이곳은 주혁이 운영하는 그의 직장이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눈으로는 서류들을 보고 있지만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소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주혁은 눈을 감고는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생각하지 마. 그런다고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주혁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생각만 해도 머리만 아프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똑똑.’
“들어와요.”
그의 말에 문이 열렸다. 주혁의 비서인 호재였다.
호재는 주혁을 향해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히고는 주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오후에 미팅이 있으십니다. 서둘러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래, 알겠어. 오늘 스케줄도 빼곡히 잡아 놔.”
“네,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고 친구분께서 연락을 해 오신 걸 잡아놨습니다.”
호재는 주혁에게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호재가 내민 태블릿 PC안에는 찬호가 보낸 동영상이 담겨 있었다. 주혁은재생 버튼을 눌렀다.
⌜오늘 수호 생일인 거 알지? 생파(생일파티) 있으니까 꼭 참석하도록. 애들도 너 많이 보고 싶어 하니까 혼자 또 처량하게 집에 박혀 있지 말고 꼭 와. 술이나 마시면서 제대로 놀아보자. 장소하고 시간은 호재한테 가르쳐줬어. 너 안 오면 나하고 애들이 쳐들어간다. 그럼 안뇽~⌟
찬우가 깜찍하게 손 인사를 하는 것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뭐 이런 거지같은.
하지만 자신이 안 온다면 이 친구들은 진짜로 자신의 집에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집이 난장판이 되느니, 차라리 자신이 생일파티에 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주혁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장 비서.”
“네. 사장님.”
“신경 써준 건 고마운데, 앞으로 이런 스케줄은 안 잡아 와도 돼.”
이렇게까지 애쓸 필욘 없어.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호재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주혁의 말에 대답했다. 정말인지 충직한 비서가 아닐 수 없다.
클럽 안에는 잘 나가는 아이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중독성 있는 노래에 춤을 추며 리듬을 탔다.
쿵, 쿵, 쿵, 쿵.
심장박동처럼 거대한 스피커가 큰 울림을 내었다.
윤지를 제외한 세 여자는 신기한 눈으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기로 보나, 저기로 보나, 온통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들뿐이다.
세 여자는 자신의 옷차림을 보았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옷차림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온몸으로 체감되는 빈부격차에 왠지 위축되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빨리 와.”
윤지는 세팅된 테이블 앞에 서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친구들을 부르며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세 여자는 꾸물거리며 윤지가 있는 곳으로 왔다. 윤지는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고, 세 여자는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았다.
“여기 진짜 좋다. 다른 클럽은 여기의 새 발의 피도 안 돼.”
“나 아까 출입하는데 심장 떨리는 줄 알았어. 혹시 출입금지 시킬까 봐.”
다행히 윤지에 의해 쉽게 통과할 수 있었지만, 소라는 그 순간 심장이 쫄깃해졌다.
“오늘 여기서 피 터지게 마시고 놀아보자. 나은이 너는 여기서 좋은 남자 만나고 말이야.”
윤지는 나은에게 어깨동무를 걸치며 말했다.
“에이, 내 주제에 무슨. 여긴 너무 급이 높아.”
“그래도 모르지. 그 점술사가 조만간 인연을 만나게 될 거라 그랬잖아. 그러니까 오늘이 아니면 뭐겠어?”
두나의 말에 수긍하는 듯 윤지와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좋은 남자 만나서 그 자식들한테 복수해 줘야지.”
“야, 넌.”
윤지는 조용히 하라는 듯 두나의 팔을 툭 쳤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두나도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걸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나은아...”
“아니야, 난 괜찮아. 까짓것 여기서 진짜 좋은 남자 만나면 되지.”
나은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활기차게 말했다.
“그런데... 진짜 걔네가 오긴 올까?”
“당연히 오겠지. 그 년놈들 낯짝 두꺼운 건 똑같은데.”
소라의 말에 윤지는 흥분을 하며 역정을 냈다.
“오기만 해봐라. 아주 뼈째 씹어먹어 주겠어.”
윤지는 이를 아드득 거리며 이를 갈았다.
“야,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왜들 그러냐? 너희 자꾸 그러면... 내가 여기 있는 술 다 마셔버린다?”
나은은 테이블 위에 세팅된 소주 한 병을 끌어안고는 친구들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아서라 아서. 너 또 술 취해서 기억 못 할라 그러지?”
술에 조금만 취해도 기억을 잃는 나은이다. 아마 나은이 이 술을 다 마신다면 나은은 여기 온 것도 기억 못 할 것이었다.
“하긴, 우리가 놀려고 왔지 걔네들 까러 온 건 아니잖아? 잔 채우고, 신나게 마셔 보는 거야.”
윤지는 병뚜껑을 따고는 친구들의 술에 잔을 채웠다.
“첫 잔은 무조건 원샷. 알지?”
“알지. 두 번째 잔도 세 번째 잔도 원샷. 끊어 마시는 사람은 벌칙 잔 마시기.”
나은은 그리 말하며 윤지의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가져다 대었다.
“야, 팔 빠지겠다. 너희들 아직도 그럴 거야?”
윤지는 아직도 고개를 숙인 채 주눅이 들어있는 두나와 소라를 보며 말했다.
“나은아, 안 되겠다. 일단 우리끼리라도 마시자.”
“잠깐, 스톱!”
윤지의 말에 두나가 손가락을 피며 말했다.
“알았어. 가자. 우리끼리에 나도 포함.”
“나도, 나도. 나도 포함.”
이윽고 두나와 소라도 자신의 술잔을 친구들이 있는 술잔에 가져다 대었다.
“자, 그럼. 오늘 온몸 불사 질러 놀아 보시고, 건배!”
챙하고 부딪친 술잔을 위로 뻗었다. 가득 채워진 잔처럼 마음도 후끈 달아올랐다.
*
소싯적 가요제를 평정한 노래가 클럽 안에 활기를 더했다.
음주를 즐기고 나서 스탠바이에 선 네 여자는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부어라 마셔라 한 탓에 다들 볼때기가 태양을 직방으로 맞은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얘들아, 나 어때? 섹시하지.”
윤지는 위로 쭉 뻗은 카디건을 빙빙 돌리며 자신도 카디건처럼 한 바퀴 돌았다.
세 여자도 흥에 취해 윤지를 따라 돌았다. 무아지경으로 흔들어 대는 춤사위가 상당히 신나 보인다.
“그런데 우리 몇 시간 동안 놀았지?”
“몰라. 여기서 한 세 시간 반 정도 됐을 걸?”
뭐? 세 시간 반?
윤지의 말에 두나는 기겁을 했다.
시계도 없고, 가뜩이나 어두운 내부인지라 그렇게 오래 놀았는지 몰랐다.
“야, 나 먼저 가봐야겠다. 나 아침에 엄마한테 내려가 봐야 돼.”
“나도 같이 가자. 나 우리 반 애들한테 줄 거 준비해 놔야 돼.”
“야, 우리 먼저 간다. 재밌게 놀아.”
두나와 소라는 일정 때문에 자리를 떠났다.
“나은아, 우린 더 놀까?”
“좋지!”
윤지와 나은은 여전히 스탠바이 위에서 광란의 댄스를 추었다.
잠시 후, 시간이 지나고 윤지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은아, 나도 이제 가봐야 하는데, 넌?”
“난 더 놀다 갈게. 먼저 가.”
“그럼 나 먼저 간다. 다음에 보자.”
윤지와 인사를 하고, 이제 나은 혼자만 남겨졌다. 나은은 음악을 따라 몸을 움직여 댔다.
* * *
주혁은 클럽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고막을 찌르는 소리에 주혁은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시끄러워.’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활동을 좋아하는 그에겐 이곳은 도저히 적응 불가한 곳이다.
지금이라도 여길 나와 집에 가고 싶지만, 안 오면 집으로 쳐들어간다는 찬호의 말이 생각나 주혁은 어쩔 수 없이 2층으로 향했다.
“마시자. 건배!”
2층으로 올라가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주가무를 즐기는 익숙한 실루엣들이 보였다.
몇 병이나 마신 건지, 주혁은 테이블 위로 살짝 보이는 술병들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부러 늦게 왔건만, 친구들은 이제 막 병을 딴 듯 쌩쌩하다.
주혁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주혁이 왔다.”
“오ㅡ 강주혁이ㅡ. 안 올 줄 알았는데 왔구나?”
주혁이 오자 생일 주인공인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뻗으며 주혁을 반겼다.
“누가 안 오면 우리 집으로 쳐들어온대서. 그 꼴 보기 싫어 왔지.”
주혁은 그 말을 하며 찬호를 찌릿, 째려보았다. 뜨끔한 찬호는 친구들에게로 몸을 숨기며 눈을 피했다.
“그래도 기쁘네. 나는 네가 안 올 줄 알고 미리 상처받고 있었는데...”
수호는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시끄러운 곳을 딱 질색하는 친구가 이곳에 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버하지 마. 어차피 조금만 있다 갈 거야.”
“왜. 같이 놀아야지.”
주혁의 말에 수호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나 내일 또 출근해야 해. 그리고 좀... 피곤해.”
사실 내일은 별다른 스케줄은 없었다. 그래도 피곤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좀 쉬엄쉬엄해. 그러다 몸 상한다, 너. 아님 우리 병원이라도 와. 약이라도 달여줄 테니까.”
월화수목금토일 하루도 빼지 않고 꼬박꼬박 출근하는 그가 수호는 걱정이 되었다.
못 본 새에 수척해진 얼굴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수호는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었다.
“됐어. 필요 없어.”
주혁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술을 단번에 마시고는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마셨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 생일 선물은 네 집으로 부쳤어.”
생일 축하한다. 주혁은 수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는 뒤로 돌았다.
“주혁이 쟤, 요즘 따라 피곤해하는 것 같지 않냐?”
“그러게. 예전엔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호텔이 크니까 하는 일도 많아서 그렇겠지.”
주혁이 가고, 친구들은 주혁에 대해 쑥덕거렸다. 찬호는 말없이 눈치를 볼 뿐이었다.
“자, 자. 간 사람들 얘긴 그만하시고. 우린 우리끼리 즐겨야지.”
수호는 손뼉을 쳐 주의를 집중시키고는 자리에 앉았다.
“찬호야.”
“어?”
“주혁이 아직도 그 꿈 때문에 그러는 거지.”
주혁이 왜 그러는지 익히 알고 있는 수호의 말에 찬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술을 홀짝였다.
“뭐... 그렇지.”
“쟤 진짜 어쩌냐. 아님 일이라도 좀 적당히 하던가.”
몸도 안 좋으면서 일에 미친 사람처럼 일하는 친구가 속상했다.
“하긴.. 네가 제일 고생이 많다.”
수호는 찬호를 보며 피식 웃고는 찬호에게 위로의 주를 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와 제일 가까운 찬호가 걱정이 많을 것이었다.
찬호는 수호가 따른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씁쓸한 위스키 향이 입안에서 퍼졌다.
*
“아아. 쓰읍ㅡ. 너무 오래 놀았나.”
스탠바이에서 빠져나온 나은은 이마를 움켜쥐었다. 술을 들이붓고 실컷 춤을 추었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 술이다.”
아까의 고통스러워하던 표정은 어디가고 술을 보자마자 나은은 금세 헤헤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술을 거부할 위인은 못 된다. 나은은 술이 진열된 bar를 비틀거리며 향했다.
“헤ㅡ 이게 다 뭐야?”
나은은 술들의 행렬에 입을 벌렸다.
손님들이 마시기 쉽게 작은 잔에 따라진 술들이 2단으로 길게 배열돼 있었다.
나은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노란빛이 도는 술이 향을 풍기며 날 어서 마시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나은은 술잔을 집었다. 비싼 술이라 그런지 목구멍으로 콸콸 넘어갔다.
‘이 맛이야.’
나은은 손등으로 입술을 쓸었다. 역시, 이래서 술을 놓지 못한다.
나은은 또 하나의 술을 집었다.
“크ㅡ으.”
짜릿짜릿한 느낌이 목구멍에서 아래로 퍼져나갔다. 조오타!
“저기, 이봐요.”
나은이 술에 빠진 그때 누군가 나은을 불렀다. 나은을 부른 이는 약간 화가 난 것인지 까칠한 목소리였다.
나은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짙은 눈썹, 묘하게 섹시한 눈매. 날카로운 인상. 주혁이 나연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