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
꿈을 꾼다. 꿈속의 여자는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앳된 소녀이다.
“오라버니! 얼른 오십시오!”
소녀는 오라비를 부르며 팔을 높이 뻗어 흔들었다. 소녀의 입가에는 예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댕기 머리를 한 고운 한복을 입은 여자아이. 주혁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 * *
삐삐삐ㅡ 삐삐삐ㅡ
아침을 깨우는 알람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주혁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드르륵ㅡ
이번엔 블라인드 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한다. 걷힌 블라인드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그의 눈을 쬐었다.
“일어나.”
익숙한 목소리. 그제야 닫혀있던 눈이 조금씩 열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막 잠에서 일어나서 주혁의 목소리는 푹 잠겨 있었다.
“뭐긴 뭐야. 네 친구 윤찬호지.”
주혁을 깨운 이는 다름 아닌 찬호였다. 찬호는 그제야 빛이 들어오는 내부에 뿌듯한 얼굴을 지었다.
“언제 왔어?”
“좀 전에. 빨리 일어나기나 해. 사장되는 사람이, 네 회사 직원들보다 굼뜨면 안 되잖아? 브런치 해 놓고 있을 테니까 씻고 와. 오늘 외부 사람들이랑 미팅 있다면서.”
엄마처럼 잔소리하고는 찬호는 방을 나섰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주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쌍꺼풀이 없는 다소 서늘한 눈매와 날렵하면서도 뚜렷한 콧날. 살짝 각진 턱선까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때문에 주혁은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옆을 가렸다.
아마 찬호가 아니었다면 그는 계속 잠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주혁은 옷깃을 잡곤 펄럭였다. 아직 날이 쌀쌀하지만 주혁의 몸은 후끈했다.
*
방 안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주혁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왔다.
주방에서는 찬호가 빵과 우유, 접시를 내려놓으며 브런치를 준비 중이다.
“씻었어? 씻었으면 여기 앉아.”
찬호의 말에 주혁은 자리에 앉아 식빵을 베어 물었다.
“어때?”
“맛있네.”
갓 구운 거라 그런지 바삭하고 씹히는 식감이 좋았다. 우물우물 잘도 먹는 주혁을 보며 찬호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다 됐고. 나도 이제 먹어볼까?”
찬호는 주혁의 맞은편 자리에 앉곤 식빵을 하나 집고는 그 위에 잼을 듬뿍 발랐다.
“음. 야~ 역시. 내가 구웠지만 기똥차다. 맛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자신이 구운 빵에 자화자찬하는 찬호를 보며 주혁은 피식 웃었다.
“알았으니까 이거나 먹어.”
주혁은 정성스럽게 잼을 바른 빵을 찬호의 그릇에 놓아주며 말했다.
“너는. 더 안 먹고?”
“난 이거면 충분해. 많이 먹으면 속만 더부룩해.”
“또 그 꿈 때문에 그래?”
찬호의 말에 주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 애가 또 뭐래. 오라버니, 오라버니하고 불러?”
“....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구먼.”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주혁의 얼굴이 너무 티가 났다.
“너 진짜 병원 가보라니까? 약 먹고, 푹 좀 자.”
주혁이 그 꿈을 꾸기 시작한 뒤로 주혁은 좀처럼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제대로 된 잠을 잔다 싶으면 아침이 되고,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니 주혁은 항상 피곤해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건강까지도 위협했다.
찬호는 이러다 제 친구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가 매일같이 운동하긴 한다만 그래도 잠을 잘자는 것 또한 건강해지는 방법 중 하나인데, 요즘 부쩍 얼굴이 상해진 주혁을 보며 찬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중에 내가 팩이라도 줄 테니까 그거라도 해. 피부 푸석해지면 보기 안 좋아.”
“됐어. 필요 없어.”
찬호의 말을 거절한 주혁은 식빵 대신 우유를 마셨다.
“다 먹었으면 너도 네 회사 갈 준비해. 나는 운동 좀 하다가 내 회사 갈 테니까.”
주혁은 접시와 컵을 치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싱크대로 향하는 주혁의 뒷모습을 보며 찬호는 몰래 중얼거렸다.
“하여튼, 저 고집쟁이.”
러닝머신에 오른 주혁은 시작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위잉 소리가 나더니 러닝머신의 발판 부분이 돌아갔다.
주혁은 속도를 높이곤 그 위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꽤 빠른 속도지만 이렇게 해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몇 달 전부터 시작된 꿈, 반복되는 장면.
들판에서 소녀는 오라비를 불렀고, 오라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소녀의 뒤는 아침이었으며 청량한 하늘이 보였다.
항상 똑같은 부분만 반복해서 꾸기에 주혁은 이 소녀가 누군지, 또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주혁은 멈춤 버튼을 눌렀다.
속도를 높게 해서 뛰었기 때문에 금세 땀방울이 나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주혁은 손잡이를 잡고는 숨을 골랐다.
그 소녀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 * *
봄이 오는 계절, 3월. 하지만 꽃샘추위 탓에 봄옷 보다는 조금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얘들아~!”
“오오~ 서나은이~”
친구들은 사뿐사뿐 뛰며 한쪽 팔을 위로 뻗어 좌우로 흔들면서 자신들에게로 오는 나은을 보며 격한 환영 인사를 해 주었다.
“우리 나은이, 오늘 좀 예쁜데?”
“오랜만에 동창 친구들 보는 건데 당연하지. 내가, 제일 예쁜 의상들로 코디해봤어.”
나은은 매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손끝으로 위에서 아래로 스캔하듯 내렸다.
친구들 만난다고 시장에서 제일 예쁜 옷을 찾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찾는다고, 덕분에 나은은 싸게 주고 예쁜 옷들을 득템할 수 있었다. 물론이건 나은만 아는사실이지만 말이다.
“우리 목표는 알지? 실컷 놀다가, 마지막에 클럽 가는 거.”
“근데 진짜 괜찮아? 거기 완전 부자들만 있을 텐데, 우리가 가면 괜히 민폐 아니야?”
“어허, 민폐는 무슨. 나도 한 부자 하잖니. 만약 그 사람들이 너희들한테 해코지라도 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소라의 걱정에 윤지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양 손을 허리에 올리고 콧김을 내뿜었다. 아마 진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윤지는 그 사람과 싸워서라도 사과를 받아낼 것이었다.
“역시 윤지 쩔어. 칭찬해.”
“윤지야, 너밖에 없다.”
두나는 윤지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윤지를 칭찬했고, 네 명 중 제일 키가 작은 소라는 윤지에게 팔짱을 끼며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나은아, 너도 갈 거지?”
“당연하지. 나도 신바람 한번 제대로 나보자~!”
윤지의 물음에 콜을 외친 나은은 세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웃음이 넘치는, 어느 화창한 아침이다.
* * *
“막상 나오긴 했는데, 우리 어디 가?”
“뭐 우리가 할 게 더 있나. 그냥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옷보이면 거기 들리고, 먹고 싶은 음식 있으면 거기 가서 먹고.”
소라에 말에 두나가 말했다.
한 손에는 카페에서 산 음료를 든 채 네 여자는 시내를 걸었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날지는 제대로 정했지만 무엇을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저 모이며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했기에 딱히 계획은 없었다.
“아, 우리 타로 볼래? 나 아는데 있는데.”
그러다 걸음을 멈춘 윤지가 친구들을 보며 물었다.
“거기가 되게 유명해서 연예인들도 종종 온대. 어떤 독특한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수리수리 마수리~”
윤지는 옆에 있던 소라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겁을 주었다.
“뭐야. 그래도 재밌겠다.”
“그럼 타로 보고, 밥 먹고, 옷 보다, 클럽. 콜?”
“콜!”
*
딸랑, 딸랑ㅡ
문을 열자 울리는 종소리가 손님들을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꽤 유명한 곳인지 타로 가게 안에는 계산을 돕는 카운터가 있었고, 기다리는 곳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 좀 무서운데?”
“무섭긴 뭐가 무서워. 사람들도 많구먼.”
붉은 기가 도는 내부 때문에 살짝 겁을 먹은 두나는 윤지에게 팔짱을 꼈다. 뒤 따라 오는 나은과 소라도 같은 반응이었다.
“몇 명이십니까?”
“네 명이요.”
“손님이 좀 많아서 시간이 걸리는데,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직원의 말에 윤지는 친구들을 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난 상관없어.”
“나도.”
“나도.”
“네, 상관없어요.”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직원의 말이 끝나고는 네 여자는 소파에 앉았다.
“와, 진짜 신기하다. 나는 평생 이런 곳 처음 와봐.”
처음에 겁을 먹던 두나는 이제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내부를 살폈다.
“윤지야, 너는 이런데 어떻게 알았어?”
“나야 뭐 여기저기 주워듣는 데가 있으니까. 주변에서 그러는데, 여기 아주머니가 하는 말은 백의 백발은 맞는대.”
윤지는 소라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나은아, 어때? 괜찮아?”
“응? 어, 괜찮아.”
두나와 같이 주변을 기웃거리다, 윤지의 말에 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뭐 볼 거야?”
“난 미래의 내 모습. 두나 너는?”
“난 재물 운. 나은이 너는?”
“난... 일단 들어가 보고.”
나은은 두나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어휴, 이게 뭐라고 심장이 이래 떨리냐. 혹시 잘못 나오면 어쩌지?”
손님이 많다는 건 유명하다는 거고, 유명하다는 건 그만큼 잘 들어맞는다는 의미기에 두나는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하지만 이리 말하는 윤지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해보지 않았기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
긴 기다림 끝에 네 여자는 방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검정 원피를 입은,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네 여자를 반겼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여인은 제 옆에 배치된 소파에 네 여자가 앉기를 권유했다. 쭈뼛거리며 눈치만 보던 네 여자는 이내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누구 먼저 보시겠어요?”
“저요.”
여인의 말에 먼저 손을 든 건 두나였다.
“여기로 오세요.”
두나는 여인의 맞은편 의자에 착석했다. 꿀꺽, 침이 넘겨졌다.
“어떤 운세를 보시겠어요?”
“재물 운이요.”
두나의 말이 끝나자 여인은 한 곳에 쌓아둔 카드를 테이블 위 포물선 모양으로 한 번에 펼쳤다.
“한 장의 카드를 고르시겠어요?”
“네....”
두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 장의 카드를 가리켰다. 여인은 두나가 고른 카드를 빼내고는 앞면을 펼쳤다.
“평범한 카드네요.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대신 덕이 많으신 분이니 언젠가 그 덕에 의해 복이 쌓일 거예요.”
실제로 두나는 남을 베풀기를 좋아했다. 여인의 말에 두나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다음은 누가 하시겠어요?”
“제가 할래요.”
다음 차례는 소라였다. 소라는 아까 말했듯 미래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소라는 카드를 뽑았다.
“지금 하시는 일이 상당히 즐거우신가 보네요. 그쪽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당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있어요.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세요?”
“유치원 교사요.”
소라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여인의 말처럼 소라는 자신의 직업이 적성에 맞았고, 아이들도 그런 소라를 많이 따랐다.
“나중에는 더 멋진 유치원 교사가 되어있을 거예요. 당신이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놓지 않는다면요.”
“네, 감사합니다.”
소라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다음은 윤지 차례였다.
“평소 자기 관리가 철저하시네요. 굳이 더 보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원래 한 철저 하거든요.”
윤지는 새침하게 답했다. 역시 자신이 예상한 대로다.
“마지막은...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여인은 아직 점을 보지 않은 나은을 보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안 봐주셔도 돼요.”
어차피 다 안 좋을 게 뻔한데, 굳이 안 좋은 소리를 직접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한번 보세요. 특별히 서비스로 해드릴게요.”
“그래, 나은아. 한번 봐.”
“괜찮을 거야. 그냥 카드만 뽑으면 돼.”
“맞아. 나은아.”
친구들의 성화가 계속되자, 결국 나은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장 뽑으세요.”
포물선으로 펼쳐진 카드를 보며 나은은 한 번 훑어보고는 이내 마음에 드는 카드를 골랐다.
“이거요.”
여인은 나은이 고른 카드를 뽑고는 뒤로 돌렸다.
“오, 꽤 신비한 카드네요. 석 장 더 뽑아보시겠어요?”
여인의 말에 나은은 카드를 석 장 더 골랐다.
“이렇게 나오기는 보기 드문데... 조만간 인연을 만나겠어요.”
“인연...이요?”
“네. 주위를 한번 잘 찾아보세요. 아주 특별한 곳에서, 특별하게 만나게 될 사람입니다.”
여인은 나은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인연이라...
나은은 자신이 뽑은 카드를 바라보았다.
한가운데 크게 떠 있는 태양. 그리고 인연을 의미하는 카드들. 진짜 내 인연을 만날 수 있긴 한 건지, 나은은 의문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