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만나야 할 사람
워크숍 가는 날 아침, 민과 윤은 바쁘게 준비했다. 비행기 몇 대를 전세 냈지만 날씨가 그리 맑지 않아 심기가 불편하던 찰나였다. 윤은 테라스에 서서 잔뜩 구름 낀 하늘을 보며 이래서 비행기가 뜨겠냐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우선은 비행기 시간에 맞춰야 하니 준비는 했지만, 불안하던 그때 민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예, 김비서님.”
[오늘 비행기가 뜨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공항으로 모일 텐데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날짜를 다시 잡을까에 대해 임원진과 회의했는데 각 부서마다 각 프로젝트 스케줄이 있어 올해 안에 워크숍 스케줄을 다시 잡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럼 이번에 움직여야 된다는 건데… 회사 계열 호텔 측에 연락해 봤습니까?”
[네, 강원도 백제호텔 측에는 연락해 놓았습니다. 그쪽으로 이동해야할 것 같습니다.]
“공항에 직원들 모이는 대로 버스로 이동하세요. 얼른 버스회사 연락해서 대절하시고요.”
[네, 연락은 취해 놓았습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윤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아니다 싶었다. 강원도 백제호텔? 거기도 괜찮지. 아버지가 이번에 공들여서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곳이잖아. 저번에 갔을 때 참 좋았던 걸로 기억해. 바다도 쫙 내려다보이고, 야외에서 직원들이랑 행사하기도 좋고. 거기야 말로 파라다이스지. 차라리 잘 됐어.”
“너 휴가 가냐?”
민은 윤을 툭 치고 지나갔다.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윤이 녀석, 준비도 안 하고 계속 소파에 누워 휴대폰만 보고 있다.
“강윤, 시간 얼마 없어. 얼른 준비해. 나 머리 말리고 나오는 동안, 너 준비 끝내고 있어.”
“오케이, 걱정 마.”
윤은 휴대폰을 또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서계장이 메일로 보낸 파일을 열어보았다. 승아에 대한 자료였다. [1985년 이름계명. 위 사람은 이름 ‘아승이’를 ‘이승아’로 계명한다.] 이름을 계명했다? 그럼 이제 어느 정도 조각이 맞춰진다. 승아의 이름은 원래, 성은 ‘아’, 이름은 ‘승이’였고, 동생 이름은 ‘아민정’ 그럼 말이 된다. 그런데 왜 성까지 바꿔야 했을까. 그렇게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준비 다 됐어?”
“아! 깜짝이야!”
윤은 민이 다가와 얼른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너 짐은?”
“짐? 여기.”
윤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커다란 캐리어를 잠그고 있었다.
“이게 뭐야?”
“짐 쌌냐며. 다 쌌는데?”
“너 해외여행 가냐? 2박 3일 강원도야. 뭔 짐이 그렇게나 많아?”
“마이 비즈니스야.”
민과 윤은 차에 올랐다. 가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민은 운전하기를 좋아하는 윤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조수석에 앉아 정민아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그래요. 틀렸어요. 전 민이 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어요. 제가 한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미국에 오래 있긴 했지만, 양부모님 같은 건 없어요. 그저 떠돌이 생활을 했을 뿐. 전 고아예요. 강릉에서 버려졌어요. 민이 씨한테는 강릉이라는 곳이 참 좋은 곳인지 모르겠지만 저한텐 아픈 곳이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거기까지가 딱 저예요. 더 이상 만나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박 씨 보살의 딸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미국에 갔다. 절에 있을 때는 박 씨 보살 개인의 이야기에 대해 들은 적이 전혀 없다. 아니, 어린 시절 박 씨 보살이 미국으로 아이를 보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어린 아이를 그것도 혼자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혼자 미국으로 보낼 때, 누군가와 함께 보냈을 것이고, 아마도 같이 갔던 그 사람이 민아의 미국 생활을 도왔을 것이다.
“무슨 생각해?”
“어? 어! 뭐.”
윤은 운전하며 민을 슬쩍 본다.
“승아는 사연이 참 많은 아이였던 것 같다.”
“…”
민은 누군가 승아 얘기를 꺼내면 우선 말문이 막혔다. 한 사람을 마음에 담아둔다는 의미는 만지고 느낄 수 없을 뿐 항상 곁에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승아의 말과 행동, 목소리와 말투, 민에게 닿았던 승아의 손길과 승아를 만졌던 자신의 손길이 그저 멈춰져 시간만 흐를 뿐 마음에는 더더욱 깊게 남는 게 아닐까.
“갑자기 승아는 왜?”
“너나 나나 승아의 굴레에서는 벗어나기 어렵구나. 승아 생각하면 가슴 한켠에 서늘하고 답답하고 그러네. 좋은 사람 얼른 만나야지, 안 되겠네.”
“선미 있잖아, 너.”
“그게 지금 니가 나한테 할 소리냐? 강민, 너 때문에 선미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 줄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난 진심이야. 난 선미한테 줄 마음이 없다. 너도 알잖아. 내 마음에 누가 있는지.”
“너 갖기는 싫고, 아예 남 주기는 아깝고. 그래서 선택한 게 나냐?”
“너도 마음이 없진 않잖아.”
윤은 부인하지 않았다. 선미가 가끔 윤을 찾아가 푸념을 한다는 것을 민은 알고 있었다. 윤도 그런 선미를 잘 감싸주었다. 언젠가 윤과 선미가 함께 있는 잔상을 본 적이 있다. 윤에게도 선미에게도 좋은 일이다. 선미라면 윤을 맡겨도 안심이다. 민이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다를 보고 있다보니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워크숍 장소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바다가 있으면 바다를 보고, 산이 있으면 산을 보며 쉬고 왔기에 도착 시간이 다소 늦었다. 차에서 내리자, 미리 도착한 임직원들이 호텔로 걸어 들어오는 민과 윤에게 인사를 했다. 민과 윤은 고개를 숙여 답했다. 아버지를 모시는 김비서님과 윤과 민을 돕는 김비서 그리고 이사들을 뺀 나머지 직원들은 다시 원래 대형으로 모여 행사를 준비했다. 민은 고개를 돌려 민아를 찾았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민아를 찾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지만.
“회장님은 저녁 파티 전 잠깐 들르셔서 인사말만 하시고 일본으로 가십니다. 지금 직원들은 각 팀별로 모여서 저녁에 있을 행사 준비 중 입니다. 행사 끝나고 밤 11시부터 아침 10시까지는 자유 시간 입니다.”
“알겠습니다. 저희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회장님 인사말 끝나고 직원들 파티가 진행되면, 회장님과 강닥터님, 윤검사님은 회사 경영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의논하시게 됩니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린 대로 화재 위험이 있는 행사는 진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회장님께 보고 받았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민과 윤은 스위트룸을 배정받았다. 윤은 캐리어에 잔뜩 싸온 짐을 정리하겠다고 아래층에 내려갔다. 민은 호텔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정민아를 찾았다. 팔짱을 끼고 편안 자세로 앉았지만, 눈은 누구보다 조급했다. [엄마? 나한테 엄마가 어딨어? 보살 엄마는 찾아서 뭐해! 그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 한국 들어올 때 일말의 기대를 했어. 한국에 있는 친엄마가 정말 좋은 엄마였으면 좋겠다. 내 비참하고 외로웠던 서른 인생, 엄마라도 좋은 분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꿈같은 생각을 했지. 아니, 미국이나 한국이나 세상은 다르지 않았어. 만나고 싶지 않아, 그런 엄마 따위!] 정민아는 엄마를 먼저 찾으라는 자신의 말에 서글프게 대답했다. 그녀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정민아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그토록 숨기고 싶은 것일까? 그녀가 잔디밭에 앉아 있는 게 보인다. 경력사원 면접 때 한 조였던 장미희와 이민준도 보인다. 정민아를 경력사원으로 뽑아놓고 기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나. 신입사원 때부터 이 회사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외부에서 영입된 사람들에게 텃새를 부리면 어쩌나 걱정 했는데 다행히 적응을 잘해가는 모양이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아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 보기 좋다.
“강민, 어디 있니?”
스위트룸은 1,2층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규모가 작지 않아 서로 인터폰을 하지 않으면 찾기 어려웠다. 저녁 7시부터 시작 되는 파티장으로 가기 위해 윤은 민을 찾았다. 저녁 파티는 아버지 인사말로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CV그룹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해 주신 귀빈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오늘이 CV그룹이 태어난 지 정확히 60주년 되는 날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이순(耳順)에 접어든 나이 입니다. 나이 육십이 되면 모든 걸 세상 순리대로 이해하게 된다고 논어에서 말한다지요? 회사를 이끌면서 때론 잘못된 길로 가는 건 아닌지… 주객전도가 된 장사치가 되는 건 아닌지… 매번 고민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거슬리지 않는 올바른 기업이 되도록 노력했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임직원분들의 노고에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올바른 기업을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임직원 분들께서도 올바른 마음으로 회사를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에 모인 임직원분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민과 윤도 간단한 인사를 했다. 강당에 모인 1,000여 명의 직원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직원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아버지도 대단해 보인다. 언젠가 아버지 자리에 누군가 앉아야 한다면, 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윤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된다. 하지만 윤은 저 자리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거도 안다. 윤은 검사로 빛나게 될 사람이다. 워크숍 행사는 이어졌다. 초대 가수의 노래에 온 직원이 환호성을 질렀다. 함께 게임도 하며, 언제 이렇게 많이 웃었을까 싶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행사가 모두 마무리 되고, 자유시간이 이어졌다. 직원들은 3355 모여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바다를 걷기도 했다.
* * *
그 시간 윤과 민은 임원진과 마라톤 회의를 하고 있었다. 1년 동안 매출 분석과 계열사, 지주회사의 주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 일은 윤이 빠삭하게 알고, 사람을 보는 것도 잘 하기 때문에 윤에게 나머지 회의를 맡기고 민은 회의실을 빠져 나와 차에 올랐다. 민은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도로의 적막함이 좋았다. 차가 드문 밤, 도로 위에서는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헤드라잇을 켜고 호텔 정문을 빠져나가는데 누군가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시간에 차 없이 이곳을 나가기도 어렵지만, 돌아올 방법도 없었다. 버스정류장 가까이로 가니 헤드라잇 끝에 정민아가 보였다. 민은 정민아를 지나쳤다. 아직 민에게도 그녀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정민아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민은 버스 정류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정민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정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갈 지 정하고 앉아 있는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다. 민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후진해 버스정류장 앞에 차를 댔다. 한참 후에야 정민아가 고개를 들었다. 민은 자신을 보는 민아를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었다.
“어디 가는지 모르지만 타.”
“아닙니다.”
“워크숍에서 직원이 이탈하는 경우에 임원은 그 직원을 감시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나갔다 무슨 일 생기면 회사 책임이 아닐 수 없으니까. 관리차원에서 동행이 필요한 거니 타든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든가 하세요. 그리고 정민아 씨가 하나 놓친 게 있는데 여긴 이 시간에 버스 없습니다.”
정민아는 버스가 없다는 말에 얼른 정류장에 붙은 시간표를 보았다. 서울만 생각했다. 서울에는 심야버스도 많고 밤 11시에 버스가 끊길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버스가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호텔로 들어가겠습니다.”
민아는 천천히 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갈 수 있을까. 지금이 아니면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아는 다시 돌아서서 민의 차를 찾았다. 민의 차 헤드라잇이 버스정류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민아는 민의 차가 보이는 곳까지 뛰었다. 민은 차에서 사이드미러로 민아를 보고 있었다. 민은 차로 뛰어오는 민아를 보고 차에서 내렸다.
“저…저 좀 데려다 주세요.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민은 민아를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어디로 갈건데?”
“엄마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