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단서
민은 윤이 채운 술잔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마음 쓰이는 게 뭔데?”
“너한테 안 좋은 일 생기는 거 난 싫다. 넌 좋은 집안에, 좋은 성격에, 좋은 인상에, 좋은 직장에 티 없이 밝고 예쁜 여자한테 장가가야 한다. 그게 내 소원이다.”
민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알아.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안다.”
“알아? 그럼 그 여자랑은 안 돼.”
민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셨다.
“민아, 잘 들어. 사실 널 평생 봐온 나도 너에 대해 궁금할 때가 있었어. 진짜 네가 신기가 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초능력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고. 근데 말야, 민아. 이거 하나만 알아둬. 내가 널 가장 잘 알아. 내가 널 가장 잘 봐. 네 옆에서 너를 가장 오래 봐 온 사람이야. 느낌이 좋지 않다, 민아.”
민은 윤이 채워 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윤은 민의 빈 잔을 채웠다. 윤이 걱정하는 게 뭔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불에 타들어 가는 승아와 똑같은 잔상.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민의 잔상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운명은 승아와 함께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민도 두렵다. 지금 이러는 윤의 말에 일일이 확답을 할 수도 없다. 윤은 검사다. 그것도 꽤 유능한 검사다. 민이 사람의 눈을 통해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과 운명을 읽는다면, 윤은 사람의 말투, 손동작, 눈동자 움직임 등으로 사람을 파악한다. 윤의 눈에 그녀는 분명 불안해 보였을 것이다.
“미안한데 윤아, 나… 멈출 수 없다.”
윤은 글라스에 든 술을 들이켰다. 민이 멈출 수 없다면 이미 멈출 수 없는 것이 된 것이다. 멈출 수 없는 민에게 멈추라 할 수는 없다. 간다면 가는대로 내버려두고 대신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이 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민은 윤의 잔을 채웠다. 윤은 술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생이, 마시면 비워지고 담으면 채워지는 술잔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왕 멈출 수 없다면, 기가 막히게 행복해라. 기가 막히게 행복해야 된다, 강민.”
“노력할게.”
행복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민도 잘 안다. 그래도 노력 해보고 싶었다. 불행이 오면 막고, 구불구불한 길 피해 곧은길로 걷고 싶어졌다. 단 한 번도 곧은길로 걷게 해달라고 빌어본 적은 없다. 그저 어렵고 고달픈 길, 장애물만 잘 넘어가며 버티듯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윤은 민에게 차를 맡기고 택시를 탔다. 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평생 윤은 민의 곁에서 즐거움도 슬픔도 함께 했다. 민이 괴로우면 윤도 힘들어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민도 윤이 힘들고 괴로울 땐 같이 힘들고 괴로웠다.
“김 비서님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차 가지고 가.”
“김 비서님한테 왜 이 밤중에 연락했어?”
“그 사람 일이야. 그 사람 일 중에 너와 나를 잘 보필하는 것도 포함돼 있어. 계약상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고. 그래서 공무원인 나보다 더 높은 연봉 받는 거 아니야?”
“강윤, 너 취했어. 같이 가.”
“그래, 나 취했다. 덕분에 거하게 취했지. 꼴 보기 싫으니까 가라. 오늘은 나 그냥 내버려둬. 앞으로 너 가는 길 축복해야 되는데 내가 오늘 이 정도로 끝낼 수가 있나. 가라. 간다.”
윤은 이내 지나가는 택시를 잡더니 타고 간다. 민은 윤을 싣고 유유히 떠나는 택시를 바라보며 새벽 한산한 도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만다. 미친 놈.
“한 번 호되게 당했으면 정신 차려야지. 또 똑같이… 윤이 말이 틀린 게 도대체 뭐야.”
민은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쓸어내린다.
“강 닥터님.”
김 비서다.
“일어나세요.”
김 비서는 인도 난간에 앉아 있는 민을 일으켜 세웠다.
“댁으로 가실 거죠?”
김 비서는 민을 뒷좌석에 앉히고 운전석에 앉았다. 김 비서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있는 민에게 물었다.
“네.”
민이 대답하자 차가 출발했다. 차가 출발하고 한참 뒤, 민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강을 뒤덮은 네온사인 불빛은 매력적이었지만 울림이 없었다. 절에 있을 때 잠이 안 와 몰래 방을 빠져나온 적이 있다. 갈 곳이 없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돌담에 앉아 고깃배를 한없이 바라본 기억이 있다. 집어등 불빛이 바다를 환하게 비췄다. 어린 기억으로 그 불빛은 눈부시게 밝았다. 그 불빛은 투박했지만 울림이 있었다.
“정민아 씨 집 쪽으로 가시죠.”
민아 생각이 났다. 윤은 반대했지만, 이미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가 있는 그녀. 윤은 느낌이 좋지 않다고 했지만, 그 불확실한 마음마저 용서하게 되는 여자. 그녀가 보고 싶다. 민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그녀의 집 근처에 차를 대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자요?”
[아니요, 아직요.]
졸음이 섞여 있는 그녀의 목소리다. 낮고, 고요하고, 잔잔하다. 민아는 이 남자가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좋아하는 목소리. 이 시간에 전화한 남자의 심리. 잘 이용해야 했다.
[집이세요?]
“아니요, 밖이요.”
[늦으셨네요. 피곤하시겠어요.]
“술 한 잔 했어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약간. 민아 씨, 내가 그날 왜 민아 씨를 뽑았는 줄 알아요?”
[글쎄요…]
“강릉에 살았었다 그래서.”
[강릉이요?]
“응, 나도 강릉에 살았었죠. 9살까지. 절에서 살았어요.”
[절에서요?]
민아는 더 알고 싶었다. 이 남자의 유년 시절을 알아야만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 수가 있었다. 민은 김 비서를 차에 있게 하고 민아 집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초록색 녹이 슨 대문 앞. 민은 대문 앞에 있는 전봇대에 기대 초록색 대문을 바라보았다.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잠깐 나올래요?”
[어디계세요?]
“당신 집 앞.”
잠시 후. 초록색 녹이 슨 대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나왔다. 민은 그녀가 나오자마자 다가가 키스했다. 힘들었다. 그래서 더 그리웠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도. 그녀의 가녀린 손목도.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도. 갑작스런 키스에 민아는 당황스러웠다. 민은 버둥대는 그녀의 입술을 더 강하게 당겼다. 어느 순간 민아는 민의 입술을 천천히 받아 들였다. 민은 조금 더 부드럽게 민아의 입술을 감쌌다. 촉촉한 민의 입술이 부드러운 민아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민은 천천히 민아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에서 풀었다. 그리고 말없이 민아의 어깨에 기댔다.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조금 힘든 일.”
민과 민아는 차가 있는 공원까지 내려왔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각에도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과 그 자동차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절에서 살 때 밤새 집어등을 본 적이 있어요.”
“바다에서 물고기를 모으는 등이요?”
“네, 잘 알고 있네요.”
“잘은 모르지만, 강릉에 있을 때 바다 근처에서 살았대요. 그래서 알아요.”
민은 민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아는 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바다 근처 어디요?”
“잘은 모르겠어요. 그냥 바다라는 것 밖에.”
“그래요.”
민이 고개를 앞쪽으로 돌리자 이번엔 민아가 민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민이 씬 왜 어린 시절을 절에서 보냈어요?”
민이 민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아의 눈이 민의 눈에 닿았다.
[박씨 보살님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민아. 민아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박씨 보살. 박씨 보살은 민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며 말없이 쓸어내린다. 바라보는 민아.]
“나도… 민아 씨처럼 아팠어요. 시간이 필요했죠.”
“지금은 완쾌 됐어요?”
민은 그저 미소만 짓고 만다.
“민아 씨.”
“네.”
“혹시…”
아니다. 두 사람은 알만한 연결고리가 없다. 연결시킬만한 것이 없다. 몇 십년간 절에서만 지낸 박 씨 보살과 미국에서만 20년 이상을 보낸 정민아. 그럼 잔상은? 잔상대로라면 두 사람은 분명 서로를 알고 있다.
“왜 그래요? 뭔데요?”
“정확한 성함을 모르는데 혹시… 박씨 보살님이라고 알아요?”
“박씨 보살님이요? 제가 아는 보살님 중에 박정심이라는 분이 계시긴 해요. 혹시 그 분이 그 분인가요?
엄마에 대한 정보를 흘릴 때가 되었다. 이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야 한다.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민이 씬, 그 분을 어떻게 아세요?”
“어린 시절, 절에 있을 때 도움을 받았어요. 민아 씨는 한국에 연고도 없는데 그 분을 어떻게 알아요?”
“저는…그 분 소식을 듣고 귀국하게 됐어요.”
“그 분 소식이라면…”
“제 어머니실지도… 모른다고… 들었어요.”
민은 갑자기 누군가 세게 머리를 한 대 친 것처럼 멍해졌다. 민은 다시 한 번 민아를 쳐다보았다. 아직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박 씨 보살을 만나야 한다. 박 씨 보살의 눈에서 승아를 본 적이 있다. 그 눈에서 본 승아는 죽은 사람이었다.
"민이 씨…"
그녀가 민을 불렀지만 민은 듣지 못했다. 민은 민아의 입사서류를 떠올려보았다. 1985년생. 민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녀의 나이는 올해 서른. 자신보다 네 살이 어렸다.
"민이 씨…"
민은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그 무엇도 지금은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무슨… 생각해요?"
"그냥…"
민아는 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은 민아의 눈을 보지 않았다.
“민이 씨 눈은 맑고 밝아요. 그래서 참 좋았어요.”
민은 민아의 그 말에 마음이 이상했다. 누군가 한 번도 자신의 눈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민 자신마저 거울로라도 눈은 절대 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그의 눈이 좋았다고 말했다. 민은 민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도 참 맑다. 이 맑은 눈에서 승아의 잔상을 읽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 * *
점심 먹고 나서도 멍한 상태로 책상에 앉아 있는 윤을 보고 수사계장이 말을 건넨다.
“어제 술 많이 드셨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집으로 안가고 숙직실에서 잠을 주무셨을까나.”
윤은 민과 다툰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의견이 안 맞을 때나 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이렇게 숙직실을 이용했다. 검사 되고 이 방에서 일한지도 벌써 3년. 이 검사실에서 많은 사건, 사고가 해결되기도 미결되기도 했다.
“뭐 일이 꼭 있어야 오나요. 그냥 잘 때 찾다가 오는 거지.”
“그래요?”
수사계장은 미심쩍다는 듯이 윤을 바라보다 갑자기 생각이 번뜩했다.
“아! 그 사건 있잖아요.”
윤은 숙직실에서 잔 이유를 캐묻는 수사계장 눈을 피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검사님이 조사하시는 정운초등학교 화재사고요.”
“그게 왜요?”
“어제 좀 알아보니 하나 이상한 게 있더라고요.”
수사계장은 자기 자리에 있던 서류를 윤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윤은 그 서류를 자세히 보았다. 꼼꼼히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이승아. 그리고 그 아래 아민정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왜 보지 못했을까.
“자매가 있죠?”
이승아 밑에 아민정이라는 이름과 자매를 뜻하는 妹(매)자가 적혀있었다. 왜 보지 못했지? 성은 왜…
“성이 달라서 좀 이상하긴 합니다. 아버지가 아 씨인 걸로 봐서는 성이 ‘아’로 가야 맞는데 이승아 씨만 성이 ‘이’네요.”
윤은 가만히 서류를 들여다보다 수사계장을 바라보았다. 자매가 있다? 이승아의 엄마, 박정심 씨를 우선 찾아야 한다.
“박정심 씨 소재 파악 됐어요?”
“네! 여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