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지경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내가 그의 애인도 아니고,
그가 나의 애인도 아니고,
그저 첫데이트인데,
내가 좋아하니 쿨하게 가버릴 수도 없는 이런
아스팔트 껌딱지 같은 상황!!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동철씨의 문자가 도착했다.
"지연씨, 너무 미안해요. 지금 너무 급한 일이 생겨서 다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뭐야! 시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포크로 돼지 고기를 한웅큼 물었던 옆 테이블의 불량 감자 같이 생긴 남자가
입에 잔뜩 고인 맥주를 뿜어냈다.
내가 아마 지 얼굴을 보고 분노한 걸로 착각했나보다.
아무튼 못생긴 친구들은 스스로 찔려하는 경향이 있다구!
얼굴이 벍개져 자리에 앉았다.
아까 그와 내 앞에서 다정하게 족발을 썰어주던 점원이 다가왔다.
“손님, 뭐 문제 있으신가요?”
문제가 많지만, 말할 수가 없지.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동철씨가 또 문자질을 했다.
비굴하고도, 박력없게.
“저 테이블 위에 제가 아마 카드를 놓고 온 것 같은데요.
그걸로 계산해 주시고 다음에 만날 때 주세요. 진짜 미안해요!”
뒷목이 땡긴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여기 있는 독일 돼지 족발 10개를 흡입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열이 뻗쳤다.
나는 추가로 소시지를 하나 더 주문하고, 맥주를 한 잔 더 흡입.
어차피 미래 남친이 될 지도 모르는 그가 카드를 주고 갔잖아?!
그래,
두 번 만나고 카드 받은 여자는 내가 최초일 것이야.
그를 미워하지 말자!
진짜 급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잖아?
드라마에서 본 그런 흔하디 흔한 0장면이 내 상황일 수도 있는 거다.
다급한 주주총회가 열린 것이다.
회장은 갑자기 위독하고,
그의 단 하나뿐인 친아들이기도 한
계열사의 평직원이자 베일에 가려있던 그가 급하게 소집된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거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이지.
그래, 세상은 그런거지.
내 삶이 이렇게 죽기전까지
남루하고 평온할 것이라고 굳이 단정짓지 말자!
쿨해지기로 했다.
그래,
난 지금 ‘카드주는 쿨가이’를 만나고 있는거야!
복 받은 거야!
동철씨는 비록 장은 약하지만,
겉보기에는 호남형이고, 180cm가 넘는다.
그런 최면을 걸면서,
다홍색 바지에 은색 구두를 착용한 나는 계산대로 걸어갔다.
“팔만 삼천원입니다”
도도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요”
카드 긁는 소리 ‘퀵퀴키’
헉, 다시.
“손님, 이거 한도초과인데요”
망할, 어의가 없었다.
“그럼 그 카드로 일단 오만원 긁어주세요!”
긁는다.
“손님 한도초과입니다!”
이 새끼,
넌 죽었어!!!
내 이 가게를 나가면 너는 파리 목숨 혹은
한줌의 재가 되어 날아다니니라!!
“그럼.. 삼만원?”
“손님 한도 초과입니다!”
망할.. 개자슥.
결국 내 지갑을 열었다.
이런 불경기에 저녁만찬으로 팔만 육천원 어치를 먹었고,
두 번째 데이트에서,
은목걸이 한쪽 받은 것도 아니면서,
독일족발 사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가게를 나왔다.
내 평생 다시 ‘독일 족발’을 먹을 일은 흔하지 않을 것이야!
맛있게 느끼는 내가 더 처량했다.
차라리 유럽 여행 때, 먹었으면
이토록 억울하지나 않았을 것을.
오늘 오후부터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다.
대체 낮에 계천에서 본 그 실루엣은 무엇이며,
이 촌시러운 바지는 왜 입고 있는 것이고,
그 남자를 어떻게 만났으며,
왜 저런 고급 족발값을 계산하고 나온 것일까.
삼총녀에게 이 사실을 고하기로 했다.
깨톡방,
수지가 분노했다.
“근데 그 새끼 진짜 뭐냐, 걔.. 혹시?”
“혹시?”
수지가 또 말했다.
“완전 거지에 개털 아니야?! 돈 없어서, 튄 거 아니냐고!!
독일 족발 먹고 싶어서 너한테 돈 내라고 하고...”
“그..그런가..”
순간, 당황했다.
낮에 선글라스를 끼고 강가를 배회하고,
3만원도 안 되는 체크카드 한 장을 카드지갑에 넣고 다니고.
물론 카드지갑은 명품이었지만, 페라가머.
마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남자를 그렇게 정말 정말, 진짜 좋아해?”
모르겠다, 이제 나도..
“아마... 그런 것 같아.”
마리가 날 안심시키듯 말했다.
“널 좋아하는 건 분명해. 그러니깐 또 만나자고 한 거지”
수지가 기름을 끼얹었다.
“야! 좋아하는 여자한테 이럴 수 있냐?”
마리가 나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돈이 없는 거지.. 뭐 잘 벌어도 주식을 해서 날렸을 수도 있고, 집이 망했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너한테 직접 체험으로 보여주는 거지.
내 마음은 정말 너에게 맛있는 독일 족발 같은 것을 사주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어. 그러니 니가.. 앞으로 내라..”
수지가 완전 비웃었다.
“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리가 다시 말했다.
“수지도 알아듣네...”
통장을 열어보았다.
사실 이런 게 이례적인 상황은 아니다.
나를 뜯어먹기로 작정했던 놈은
이제껏 한두 시키는 아니었으니..
대학시절,
자신이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자신이 하던 택배 아르바이트를 대신 보냈던
전도 유망한 회계사 준비생 남자친구,
내가 한 달 동안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을 꼬여내 컴퓨터를 산 컴공과 남자친구,
내 첫 월급을 급하게 꾸어 자신의 외상 술값을 계산하고 연락을 끊은
사업가 남친까지.
모두가 나에게
물질과 정신적 피해를 동시에 선사하고도,
자신들이 뭔 짓을 했는지 인지조차 못하는 그런 무례한 자식들..
물론,
최소한의 피해만 선사하고 조용히 내게 연락을 끊은 시키가 하나 있기는 하다.
아마 경찰대를 다녀서,
구린 짓을 하다가 나한테 명예훼손을 당할까봐 조용히 사라진 듯..
그나마 그 놈은 조금 나았다.
내 친구들의 보통의 남자친구처럼 그런 코스프레로
적어도 내 기억에 나쁜 놈이라는 기억은 없다.
하지만,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잠적한 그 자식...도 뭐
별 다를바 없는거지, 뭐.
지난 몇 년간 소개팅한 남자들의 뜸하디 뜸한 에프터를 받아들일지라도
세번이상 만나지 않은 이유다.
더 이상 피해보기 싫어서.
난 힘없이 말했다.
“나 진짜 지쳐. 또 남자 뒤치다꺼리 하기 싫다….”
마리가 위로했다.
“니 맘.. 이해해”
수지가 재수없이 말했다.
“주접스러워, 그냥 나처럼 개나 키워. 비혼 선언해!!”
마리가 다시 말했다.
“지연이 그 남자 진짜 좋아해... 난 그때 삼겹살집에서 느꼈어.
얘가 확실히 다르더라. 그 남자 앞에서.. 진짜 조금 먹더라구..”
그건 아니었는데...
그날은 마리가 하도 쳐먹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돼지고기 마니아라고 해도,
전날도 오겹살을 먹었고,
눈앞에 고기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달려들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다.
혼자 생각해보자.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
마음의 크기가 서로 다르거나
내가 주도적으로 쏴야 할지라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벽에 붙은 그의 사진을 보았다.
내가 이제까지 사귀어 본 남자 중에
가장 우월한 비주얼.
그것만으로 나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환상이 들었다.
그래!
사랑은 상대방 주머니의 질량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