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는 여전히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결을 시도한 왜의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상해뿐 아니라 수령과 포졸 역시 놀란 모습이었다.
서둘러 수령은 포졸들을 불러 시신을 처리해야했다. 만약 이 일이 형조에 알려지기라도 했다간 수령 역시 크게 질타를 받을 것이었다.
그때, 소란스런 소리를 들은 정만이 옥으로 달려왔다.
정만은 자신의 눈앞에 벌어져있는 참혹한 현장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여!”
상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만은 조용히 상해를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수령과 포졸들은 시신을 처리하느라 정만과 상해가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만과 상해가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그때.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정만과 상해를 발견한 수령이 말했다.
그러자 정신이 없는 상해를 대신해 정만이 대답했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구만유.”
“어디를 간다는 것이냐. 그 놈은 아직 나와 할 말이 남아있다!”
상해가 수령의 말에 고개를 들고 물었다.
“할 말이요?”
수령은 종전에 보이던 날카롭고 심기를 숨긴 표정으로 상해를 바라봤다.
“그래, 난 아직 너에게 물을 말이 더 남아있다. 그러니, 넌 여길 나갈 수 없다! 여봐라! 저 자를 당장 붙잡아 옥에 가두거라!”
상해는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상해가 항변을 할 새도 없이 포졸들이 상해를 에워싸 데려갔고, 상해를 지켜려던 정만은 밀쳐져 버렸다.
정만은 붙잡혀 가는 상해의 모습을 보며 수령의 다리를 붙잡고 애걸복걸했다.
“수령나으리..! 저놈은 왜 붙잡는 다요!! 저 놈이 뭔 죄가 있다고!”
정만은 수령이 지독한 놈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모든 이들이 죄가 없다 하는 사람도 수령이 의심이 든다면 그 사람은 죄인이었다.
그 정도로 수령은 고집스럽고 지독한 사람이었다.
상해를 왜 붙잡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잡혀갔다간 결코 가만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내 놈을 처음부터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구나. 저 놈은 왜의 우두머리와 내통을 했다! 한패가 분명하다! 내 결코 자백을 받아내고 말 것이다! 넌 이만 돌아가거라!”
“내통이유...?”
정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해를 두둔하며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우선 내통이란 말에 놀랐고, 자신 역시 상해에 대해 아는 거라곤 상해의 나이와 이름 정도였다.
상해가 어디서, 왜,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순간, 정만은 상해가 정말 왜와 내통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유, 절대 그럴 일이 없구만. 암만.. 상해친구가 그럴 리가...’
“돌아가거라! 여긴 네 놈이 있을 곳이 아니다.”
한참을 망설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만은 돌아가라는 수령의 말에 아까와 달리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터벅터벅 돌아 나갔다.
그의 뒷모습에는 상해를 처음 봤을 때의 연민은 그 어디에도 없어보였다.
***
다음 날,
“제..제발... 물 한잔만 주세요..”
정만이 돌아가고 부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해의 몰골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 날이 밝도록 의자에 묶여 형문을 당하고 있었다.
관아 뒤편 산등성이 너머까지 들릴 정도로 비명이 나왔고, 수령은 결코 봐줄 눈빛이 아니었다.
“어서 불어라!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이냐! 네 놈 역시 왜의 놈이 맞는 게지!? 누구의 짓이냐, 왜의 왕이 시킨 짓이더냐!?”
수령은 막무가내로 상해에게 자백하라 명했다.
하지만, 도대체 상해에게 무엇을 자백하라는 말인지..
상해 역시 아는 게 있다면, 모두 다 털어놓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아는 거라고는 왜의 남자 역시 자신과 같은 현대에서 왔다는 것 뿐.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 왔는지도 모를뿐더러.
만약 자신과 남자가 미래에서 왔다 말하면, 저 고집불통 수령이 믿어주기는 할까?
절대 그럴 턱이 없었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선에 올 때까지 겪은 세 번의 죽음은 잠깐이라 고통이 거의 없었지만, 고문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차라리 다시 죽고 싶다. 여기서 죽는다면 다시 어디선가 깨어날까.. 이제 제발 그만...’
하지만, 수령의 얼굴에선 아량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 옥죄었다.
“저 놈의 주리를 다시 틀어라! 저 놈이 입을 열 때까지 계속 틀어라!”
그러자 상해의 옆에 서서 막대를 잡고 있던 포졸들이 양쪽으로 막대를 눌러 재꼈다.
그와 함께 상해의 입에서 찢어질듯 한 비명 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아악!!! 제..발 제발!!!”
한참을 고문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수령에게 포도대장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리고 수령의 귀에 대고 뭔가를 전했다. 수령은 자리에 일어나 명했다.
“그만하거라. 내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울테니,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거라.”
수령은 포도대장과 함께 자리에 떴고 고문은 멈추었지만, 상해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 기절해 있었다.
***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나 같은 하찮은 사람을 다 찾고 말이야.”
잠시 동헌으로 들어 온 수령의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혜걸이었다.
수령은 일종의 승리의 미소를 감출 수 없어 즐거운 표정으로 혜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혜걸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런 모습이었다.
“제 수하가 지금 이 곳에 있다 들었습니다.”
“오호라. 그 놈이 네 놈의 수하였느냐?”
수령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는 듯 시치미를 뗐지만, 얼굴은 감추지 못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더냐?”
혜걸은 고개를 들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 때문입니까?”
수령의 입이 더 크게 찢어졌다.
기쁨을 주체 못해 얼굴에 그대로 감정이 다 들어나 있었다.
“아니다. 저 놈은 왜 놈들과 내통을 한 놈이다. 내가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것 같은가? 이 일은 네 놈과 관련이 없다.”
그러자 혜걸이 수령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령은 가만히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리며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러더니 입을 열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내가 무엇을 원하기에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내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만 돌아가거라.”
수령은 몸을 돌려 앉으며 시선을 돌렸다.
혜걸은 분에 차올라 소매 사이로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자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내 어머니와 누이를 죽였던 그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령은 혜걸의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보고 놀리듯이 말했다.
“어디가 많이 불편한 모양이구나. 빨리 돌아가도록 하거라. 저 놈은 내 친히 맡아 입을 열 때까지 형벌을 내릴 것이다. 입을 안 연다면 죽을 때까지 말이다.”
“쌀 100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혜걸의 제안에 수령이 솔깃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심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혜걸은 그것을 못 본 모양이다.
“올해 대흉년으로 관아의 곡간이 비어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곡간을 제가 채워드리겠습니다.”
“흠... 그깟, 쌀 100석으로 그 많은 전주 백성들을 다 먹일 수야 있겠느냐?”
수령은 기쁨과 놀라움을 얼굴에 그대로 들어내 놓곤, 파렴치하고 퉁명스럽게 제안을 거절했다.
“... 저번에 말씀하신 금 10냥도 함께 드린대도 말입니까?”
수령의 얼굴이 떨려왔다,
온 욕심이 얼굴 가득 붙은 노인네는 그 욕심을 충족해준다는 혜걸의 말에 기뻐 자신의 얼굴이 떨리는 지도 몰랐다.
“정말인가?”
“예..”
“네 놈 답지 않구나. 이리 말이 잘 통하다니. 그래, 좋다, 당장 놈을 데려 가거라.”
“예... 쌀과 금은 곧 우리 수하를 통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쌀로 이번 흉년을 꼭 조심히 넘기셨으면 합니다. 나으리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혜걸은 이를 갈며 말하곤 일어나 수령을 한번 흘기고 나가려는데, 흘기는 그의 눈에는 차갑고도 고독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그때 수령이 다시 말을 꺼낸다.
“그런데, 왜 그토록 그 자에게 집착을 하는 것이지? 전주를 들썩일 정도의 힘을 가진, 전주 최고 상단의 대방인 네 놈이 말이다... 무척 궁금하구나.”
나가려던 혜걸은 멍하니 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