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날이 밝았다.
외진 바다, 가파른 절벽 사이에 자리 잡은 왜구의 은신처에는 일본의 배인 ‘안택선’이 정박해 있었다.
작은 2층짜리 건물크기의 배가 1척.
그 절반만한 크기의 배가 2척. 총 3척이었다.
왜구들은 서둘러 짐과 물건들을 실어 날랐는데, 값비싸 보이는 비단과 도자기들이 주된 물품이었다.
분명 바닷가 인근 고을에서 약탈 한 것임이 틀림없다.
놈들은 이 값나가는 물건들을 팔아 또 어디선가 도적질을 해댈 것이다.
반대편에는 어제 상해와 함께 묶여 있던 사람들과 조선인 포로로 보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추레하고 빼빼 마른 사람부터 꽤 지체 높아 보이는 사람까지, 거진 서른이 넘는 사람들이 묶인 채로 앉아있었다.
그 속에는 상해의 모습도 보였다.
상해는 충격으로 말을 잃은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또 죽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조선시대에서라니..
왜구의 숫자 역시 대략 서른이 조금 넘어 보였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개기여 볼까? 어차피 두 번이나 죽었던 목숨이다. 또 한 번 어디선가 다시 안 깨어나라는 법도 없다.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포로들을 감시하는 왜구 수하의 날선 일본도를 보니 그 마음이 쏙 들어갔다.
왜구에 대해서라면 상해는 이미 어느 정도 정보력이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말, 수강신청 실패로 듣기 싫은 일본 역사 교양수업을 겨우내 들었는데, 교수님이 얼마나 역정을 내시며 설명하던지,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일본 왜구 놈들은 악질 중에서도 제일가는 악질 놈들이다.
동해 인근의 마을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걸쳐 수탈을 일삼았고, 중국은 물론, 멀리는 베트남, 필리핀, 태국까지. 거의 동아시아 전역을 휩쓸며 약탈을 해왔다.
거기에 현지인들을 포로로 데려가 매매를 하거나 여성들의 경우 성적노리개로 삼다 쓰다 버린 보릿자루마냥 버렸다. 남성의 경우 대부분 팔거나 처참히 참수해버렸다.
그 정도로 이놈들은 악질이다.
“이소게! (서둘러라!, いそ-ぐ)”
상해는 단박에 일본어를 알아들었다.
과거 일본인 여자 친구를 사귄 경험으로 기본적인 일본어쯤은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후지타 유키, 내 첫 경험 상대가 될 수도 있었는데 차였었지..’
서두른다? 무엇을 서두른다는 말인가?
상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까부터 왜구들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두르고 있었다. 떠나는 것인가? 설마 이대로 일본 왜구를 따라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 인가!?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무당으로 10년을 살고, 세 번의 죽음을 맞았고, 이젠 조선시대 포로로 일본에 가게 되다니.. 상해가 생각하기에도 스스로의 인생이 참 파란만장하다 여겨졌다.
그때, 왜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남자가 포로 무리에 접근했다.
근엄하게 뒷짐을 지고 시찰하듯 포로 무리를 둘러보는 남자. 흔한 왜구들과는 차림새부터 달랐다. 일본장수의 것과 비슷한 갑옷을 입었고, 제법 좋아 보이는 일본도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절대 왜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일본의 장수 같았다.
“관상이 절대 왜구 같은 하찮은 일을 할 관상은 아닌데... 이상하네.”
옆에 있던 어젯밤 친절한 남자가 상해의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뭔 관상가양반처럼 말을 혀네..”
돌팔이 관상가 상해지만, 관상학을 공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기본적인 관상정도는 볼 줄 알았다. 그런 상해가 보기에도 남자의 관상은 범상치 않았다.
조선 포로를 보던 왜구의 남자는 혀를 차댔다.
“역시 조센징들은 멍청하다니까..”
놀랍게도 남자는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를 썼다.
게다가 발음 또한 놀라울 만큼 좋았다. 조선인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실제로 조선시대, 왜구에 의해 일본으로 잡혀가는 조선인들은 꽤 흔했다. 심지어 그들의 밑으로 들어가 왜구로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배웠는데, 상해는 혹시 이 남자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멍청하니 매번 이렇게 당하는 게 아니겠어?”
남자의 말이 상해의 신경을 거슬렀다.
‘왜 자꾸 멍청하다는 거야? 멍청해서 조선인들이 당한다고? 일본인이 비열해서 당한 건 아니고?’
“어차피 너희는 곧 죽거나 일본의 노예로 전락하겠지. 후훗”
‘죽여 봐. 어디 쉽게 죽나. 난 죽어도, 죽어도 살아나는 불사신이다 이 새끼야!’
둘러보던 남자는 한쪽에 시선을 고정하곤 비열하고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기분 나쁜 미소였다. 그 시선을 따라간 곳엔 어여쁘고 젊은 여자가 있었다.
무리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고 조선시대가 아니라 21세기 한국에서도 꽤나 인기있을만한 얼굴이었다.
‘역시 남자새끼들 보는 눈은 어느 시대나 다 똑같군.’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얼굴을 여자 가까이 들이대자 여자는 고개를 피했는데, 다시 비열하고 음흉한 미소를 보인다.
‘재수 없는 새끼’
그러더니 혀로 낼름 여자의 볼을 핥았다. 상해의 동공이 이렇게나 커질 수가 없었다.
‘아니 저 새끼가!! 지금 뭐하는 짓이야!!’
“역시 여인은 조선의 여인이 제 맛이구나. 일본 여인은 비교가 되지 않는 군. 훗”
참아야한다. 나서서는 안 된다. 어렵게 다시 얻은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쫄보지만 상해도 남자다. 남자로서 불의를 보면 당연히 화가 나는 법. 안간힘을 다해 화를 참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는 또 다시 도발을 해댔다.
얼굴을 피한 여자의 턱을 잡더니 고개를 돌리곤 또 다시 혀로 얼굴을 핥는데..
“야이 변태 개새끼야! 지금 뭐하는 짓이야!!”
결국 쫄보 상해가 폭발했다. 어디서 난 용기인지 여태껏 보았던 상해의 모습과는 달랐다. 상해는 자신의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스스로도 당황한 눈치였는데, 어차피 세 번이나 죽은 목숨이다. 죽어도 어디선가 또 깨어나겠지.
어느 순간부터 상해는 겁을 상실했는지 아니면 정말 별안간 용기가 솟아난 건지, 두 눈을 부릅뜨고 대들 듯 남자를 쳐다봤다.
그런 상해를 보고 남자가 말했다.
“빠가야로! (ばかやろう!)”
“빠가야로!? 이 새끼가..!!”
상해는 사냥개마냥 남자에게 쏴대며 말했다.
“더럽게 여자한테 뭐하는 짓이야 이 새끼야! 이 변태 십덕후 같은 새끼!”
남자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서서히 빼려하자 상해는 순간 흠칫한다.
‘설마 또...?’
이번에는 진짜 죽는 것은 아닌가, 다시 깨어났는데 지옥이면 진짜 어떡하나. 슬슬 걱정이 되는 상해였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엎질러졌고 이렇게 된 거 더 세게 나가야한다.
원래 미친개는 주인도 안 건드리는 법이다!
“그,그래.. 죽이려면 죽여라 이 새끼야! 내가 누군지나 알아? 내가 죽었다 세 번이나 다시 살아난 놈이야. 운수로는 옥황상제랑 하이파이브도 할 놈이다 이거야! 네 놈이 아무리 용을 써봐라 나를 죽일 수 있나. 내가 위대한 대한민국 순국열사 유관순, 안중근의 자랑스런 후손이다 이 놈아! 네 따위 왜놈 앞에 무릎을 꿇을 것 같냐!”
‘이상해! 이건 꿈이 아니야.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오호라. 네 놈 용기가 아주 가상하구나. 좋다, 네 놈부터 죽이겠다. 그래 네 말대로 네 운수가 좋은지 아니면 내 운수가 좋은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꾸나.”
남자가 결국 목을 치기위해 칼을 빼자, 상해는 두 눈을 찔끔 감았다.
‘이번이 진짜 끝인가...’
상해의 목을 치려 남자는 칼을 높이 들었고, 상해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그때였다. 포로 중 한 남자가 소리쳤다.
“관,관군이다! 관군이 왔다!!”
남자가 외치는 방향에 관군이 있었다. 분명 왜구의 서너 배는 넘어 보이는 장수와 군졸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살았다! 역시 하늘은 상해의 편이었다.
상해를 참수하려다 멈칫한 남자가 아직 못 다 실은 짐과 상해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칼을 거둔 남자는 시선을 돌려 놀라 허둥대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야키모노시! 야키모노시! (도공!, やきものし)”
그렇군, 이 놈들 목적은 역시 도공이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요한 거점이다. 그렇기에 두 국가에 조선이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았다.
이는 과거에는 더욱 그러했고, 서역과 교역을 트지 않았고 신대륙이 개발되지도 않았던 시대에, 일본은 거의 외딴 동쪽 섬에 불과했으니 조선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선진 문물 역시 대부분 조선을 통해 전해졌기에, 조선이 작정하고 일본과 무역을 하지 않는 다면 일본의 손해가 막심했다.
특히나, 조선의 도자기라면 일본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탐을 낼 정도로 뛰어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의 도공들을 노렸다.
“괜찮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