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
“와 그라노..?”
혜자는 뭔가 결심했는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엄니, 제가 엄니한테 지금 이 말을 혈땐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꼴은 이래도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이 아니여라?”
“...”
“그런 제가 봤을 띤, 우리 상해는 분명 좋은 극락으로 갔어라. 아니, 천국이유. 천국! 암만요. 우리 상해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여. 경찰도 그라지 않았오? 자살이라기엔 뭔가 좀 껄정시렵다고. 아마 이건 자살이 아닐거요. 우리 상해가 그리 마음 약한 놈도 아니고. 분명 아닐 거여라.”
상해는 혜자의 위로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상해가 장례식장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
부모님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저 말이다.
‘나는 자살한 것이 아니여. 나한테 미안해 하지마소.’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면, 미안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꼭 미안해하지 말란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혜자는 말을 이었다.
“그라니 엄니, 이런 말 하긴 좀 이르지만, 우리 상해 편히 보내줍서... 내가 아는 상해는 엄니 아부지 이런 슬픈 모습 보면, 결코 이 생을 못 떠날 놈이여라. 미안해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아마 지금쯤 극락에서, 아니 천국에서 행복해하고 있을 거여.. 그러니, 우리 보내줍서..”
상해의 부모는 혜자의 위로에 다시 흐느껴 울었다. 상해 역시 한편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못 다 전한 말을 혜자가 모두 다 해주었다는 생각에 마음에 남아있던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이 조금은 내려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상해는 이제 이정도면 괜찮다는 듯 마음을 추스렸다. 그러더니 소매로 이내 눈물을 훔치고 뭔가 결심한 듯 일어났다.
그리곤 부모 앞에 가서,
“엄니, 아버지. 못 다한 인생, 못 다한 자식 노릇. 불효자는 울고 갑니다. 비록 불효자인 아들은 먼저 가나 엄니 아버지는 꼭 끝까지 만수무강하고 오래 오래 사시오.”
상해는 크게 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이번엔 혜자를 보며 말했다.
“누님, 돌팔인 줄 알았구만 영 돌팔이는 아니여라. 내가 알아봤소. 누님. 그동안 참말로 고마웠고 앞으로도 우리 아부지 엄니 잘 부탁하요. 고마웠소.”
상해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서는데, 순간 마취제를 마셨을 때처럼 다시 몸이 어지러워지더니 이내 다시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
한참을 잠들었던 상해가 다시 깨어났다.
깨어난 곳은 어둡고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곳이었다. 바닥은 거칠었으며 보이는 거라고는 멀리 불덩어리들뿐이었다.
상해는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진짜, 내가 지은 업보가 많긴 했나 보네. 지옥불로 떨어진 걸 본께.”
상해가 순순히 결과를 받아들이려 할 때 누군가의 말이 이어졌다.
“새벽부터 뭔 개소리여.”
그곳에는 상해 혼자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였다. 대략 열댓명의 사람들이 낡은 옷차림새에 꼴이 말 같잖은 상태로 손발이 묶여있었다. 게다가 고약한 냄새까지 풍겼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이상하다. 여기가 지옥이라고? 그럼, 이 사람들도 같이 지옥에 떨어진 건가?’
골똘히 생각하던 상해는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지옥인가요?”
옆에 앉아있던 남자는 그런 상해가 안쓰러웠는지 혀를 찼다.
“쯔쯔, 드디어 맛이 갔구만.. 지옥은 뭔 놈의 지옥이여! 내가 지옥으로 보내줘!?”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자는 상해가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생각해 안쓰러운 표정을 보였다. 상해는 다시 되물었다.
“그러면 여기가 어디죠?”
“어디긴 어디여!! 왜놈들 소굴이지!”
상해는 오히려 남자가 더 이상했다.
이게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왜놈들 소굴?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남자가 사극을 많이 봤나.
이 남자 상태가 왜 이러지, 꼴은 또 왜 저렇고.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분명 장례식장에서 쓰러졌던 거 같은데.. 정말 여기가 지옥인가? 아니면, 극락? 극락이라 하기엔 좀 초라한데.. 대체 어디야..’
상해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자, 옆에 앉아있던 또 다른 남자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아따, 아까 넘어질 때 머리를 찐 거 같더니, 완전 맛이 가부렀나 보네. 내가 차근차근 딱 한번만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 보쇼.”
남자의 말이 묘하게 상해를 집중시켰다.
“그니께,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왜구, 그 잡것들한테 잡혀서 우리가 지금 여기 있소. 형씨도 어디선가 왜구한테 잡혀왔응께, 여기 있는 거고. 이제야 이해됐소?”
아니 전혀 되지 않았다. 이 남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상해는 생각했다.
설마, 원래부터 죽었던 게 아니고 자신이 여태 살아왔던 인생이 모두 꿈이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사실 내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고 지금은 촬영 중인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정신 나간 소리였다. 시급히 상황파악을 해야 했다.
“실례지만 오늘이 몇 월 며칠 입니까?”
이번엔 상해가 날짜를 묻자 남자들의 표정이 다시 뚱해졌다.
“아따.. 참말로 요상한 걸 묻는 고마이.. 그니께 오늘이 말이여.. 음.. 만력18년 경인년...”
‘뭐 만력 18년 경인년?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만력제 18년 경인년이면... 아마 조선 중기쯤이란 소린데..’
무당이 직업인 상해이지만, 처음부터 무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학창시절 역사에 흠뻑 빠져 대학도 역사학과를 다녔고, 한때 역사학자가 되길 꿈꿨으나 역사학을 공부하다 역술의 역사에 빠져 역술인의 길에 들었다.
그렇기에 연호쯤은 항상 줄줄이 외고 있는 그였다.
“경인년이라니 아까부터 무슨 소립니까?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좀 말해주세요! 다 큰 어른이 이 무슨 장난입니까!”
결국 상해가 짜증을 내며 버럭하자 대뜸 남자는 더 큰 목소리로 버럭했다.
“아따, 나 지금 태어나서 가장 진지한디!! 너야말로 다 큰 어른이 아까부터 무슨 장난질이냐 참말로!! 나한테 먼저 죽고잡냐!!!”
이상했다. 이 남자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말은 여기가 조선이라고?
상해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타임워프를 한 것인가 싶었다.
전혀 믿기지 않아 볼을 수십 번도 더 꼬집어봤지만, 꿈은 절대 아니다.
이 남자도, 이 사람들도, 이 고약한 냄새와 불쾌한 자리도.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사실이다.
상해는 정말 조선시대로 죽지 않고 떨어진 것이다.
상해의 얼굴엔 이내 미소가 가득 서렸다.
‘감사합니다, 천지신명님. 이 미천한 저에게 조선시대에서나마 다시 살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진짜 사기 안치고 좋은 일만 하며 살게요. 감사합니다.’
상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려댔다.
그걸 보고 있던 남자들은 무섭다는 듯 자리를 슬쩍 멀리했다.
“참말로 제 정신이 아니여라.”
“긍께, 죽을 날이 멀지 않아서 그런가, 아예 정신을 놔부렀으..”
감격에 잠겼던 상해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
“방금 뭐라했소..!?”
남자는 상해가 정신 나간 듯 자신의 멱살을 잡고 다급히 물어대자,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아따 성님, 이 놈 진짜 정신을 놔부렀는 갑소..! 나 무소와요..! 진짜 왜 이런다요 이 양반..!”
상해는 그제서야 자신의 몰꼴을 살폈는데, 누군가에게 맞은 듯 성치 못한 모습에 앞에 있는 사람들처럼 손과 발이 묶여있었다.
불현 듯 그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 복장은 사극에 흔히 나오는 포로들의 모습이다... 그렇다는 건..’
아까 조곤조곤 잘 설명하던 남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따 형씨, 진짜 정신이 나가버렸는 갑소. 내가 다시 딱 한번만 설명할 것이니 잘 들으쇼.”
상해는 남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받아 적고 싶을 만큼 집중했다.
남자는 불타오르는 상해의 눈빛이 부담됐지만,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말했다.
“그니께, 아까 말한 대로 우리는 저 잡껏들.. 그니께 왜놈들한테 잡혀 온 것이고, 그 왜놈들이 하는 말이 글씨... 아!”
남자는 마침 떠오르는 해를 가리키며 다시 설명했다.
“저기 저 해 뜨는 거 보이쇼?”
상해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남자는 상해의 듣는 자세에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니께, 저 해가 다 뜨는 아침이 될 때, 저 잡것들이 우리를 끽! 그니께 우리 목을 끽! 베어버린다고 안혀요.”
“뭐... 또 죽는다고..?”
상해는 그대로 굳었다.
처음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끌려가 옥상에서 동반자살로 죽었다.
아니 이건 살인이니 죽임 당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
깨보니 본인의 장례식장이었고 일말의 희망과 감동을 느끼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야 극락에 왔나 싶어 다시 눈을 떴는데,
무슨 조선시대 세트장 같은 곳에 잡혀 와 있고, 상해 자신은 묶여 있고, 옆에 이상한 남자 둘은 상해를 더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또 죽는단다.
억울했다. 세상 억울했다.
20살 때, AV의 환상을 품고 처음 사겨 본 일본인 여친이랑 한 번 못해보고 차였을 때보다 억울하고, 어릴 적 레이싱카 사려고 모은 돈을 문구점 앞에서 동네 형한테 송두리째 뺏겼을 때보다 억울하다.
한 번 태어나서, 아니 세 번 태어나 이보다 억울한 적이 없었다.
결국 상해는 마침내 미친 듯이 발광을 해댔지만, 손발이 묶여 그물에 걸린 광어마냥 펄떡펄떡 거렸다.
그걸 지켜보던 남자들은 귀신을 본 사람처럼 소스라쳤다.
급기야 정신 줄을 놓은 상해는 울다 웃다를 반복하며 울부짖었다.
그리곤 말했다.
“천지신명님, 부처님, 하나님, 알라님, 성모마리아.. 이 잡것들아!! 왜..!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왜 나를 세 번 죽이는 거냐! 왜!!!”
상해는 하늘에 대고 억울함을 토해댔지만,
하늘은 말이 없고 날은 밝아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