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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붉은 땅의 주인
작가 : 두부한모
작품등록일 : 2016.8.3

여섯번째 천 년.
전능하며 잔인하고 동시에 자비로운 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심판 받는 세상.
신의 이름을 외치며 인간 세상을 뒤덮은 대규모 민란으로, 남부를 지배해 온 천년 왕국 역시 무너졌다.

그로부터 십 여년.
은둔 왕족. 몰락 귀족. 천출 기사.
저마다의 이유로 통일 왕국을 세우려고 일어선 그들을 이곳에 기록한다.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5)
작성일 : 16-08-16 12:03     조회 : 500     추천 : 0     분량 : 1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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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0년 가을 2일 새벽

 @ 단티아 붉은 성채의 정문 ‘용의 아가리’

 # 단티아 신전 수도자 블린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마지막 구호가 끝이 났다. 예정대로라면 이제 연설문을 읽어 사람들에게 가르침에 대해 알리고, 선고문을 읽어 왕과 그 가족들의 죄를 밝힌 후 처형을 마치면 영원과도 같았던 긴 밤은 끝이 난다. 하지만 이대로 성문 앞에 못 박혀서야 오늘 밤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놓쳐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절대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사람들의 환호를 듣기 위해 잠시 뒤로 향해 있던 고개를 앞으로 되돌렸다. 사람 하나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큼만 열린 성문. 그 앞을 어제 새벽까진 왕을 위해 싸웠을 근위대 병사 셋이, 왕을 지키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 서있다. 내가 그들을 봄과 동시에 가운데에 선 병사가 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가 들고 있는 창이 크게 흔들린다. 하지만 티를 내며 내 시선을 피하건 어쩌건 나는 반드시 이 안에 들어가야 한다.

 

 “저 소리 듣지 않았나? 이제 곧 시작인데 여기서 보낼 시간이 없단 말일세.”

 “아직 확인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오늘을 내가 어떻게 준비했는데. 환장하겠네 정말. 내가 말야, 이 목.”

 

 손이 절로 올라가고, 머리가 아닌 가슴이 주먹을 움직여 가슴팍을 몇 번이나 두들겨 댄다. 조급함에 답답해진 속이 이렇게 한다고 풀어질 리는 없지만, 눈 앞의 그를 향한 무언가는 조금 풀어낼지도 모르는 일.

 

 “응? 이 목숨 내걸고 처음부터 같이한 사람이란 말일세. 그러니 가능한…”

 “아, 글쎄 조금만 기다려 달라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제가 수도자님을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도 나름 절차란 게 있습니다. 이제 곧 돌아올 때가 됐으니 조그만 더 기다려 주십쇼.”

 “후우…”

 

 여전히 시선을 미묘하게 옆으로 돌려 날 마주보지 않고 있는 가운데 병사가 말을 받고, 내 속은 한숨으로 응수한다. 여기 붙잡혀 있은 지 얼마나 됐지? 한 시간? 두 시간?

 사실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을 것이다. 초조해서 시간이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 그럴 것이다. 혹시라도 누군가 알아채면 끔찍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을 한 해를 보냈다. 그 오랜 맘 졸임의 결말을 눈 앞에 두고, 고작 이 잠깐을 기다리는 게 이리 힘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다 됐는데 뭘 걱정하고 있어.’

 그래, 저 병사의 말도 옳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들여 보내준 광장처럼 이 곳도 허술하다면, 일이 틀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 할 수 없다. 할티르란 작자의 숨이 끊어질 때까진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만 하겠지. 사실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세워둔 계획이 있고, 내가 아니라도 처형에 필요한 손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놈의 죽음을 직접 보고 싶은 것은 단순히 나의 욕심이지 않은가. 생각을 정리하니 머릿속이 한층 가볍고 편해진다.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저 떨떠름한 얼굴들보단 환호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는 편이 나을 터, 몸 전체를 틀어 뒤를 돌아본다. 끝까지 올라간 도개교와 성벽 사이의 작은 틈으로 병사들이 보인다. 옆으로 나란히 선 채 반원을 그려 성문 앞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들 너머로 저마다 흔들어 대는 환희에 찬 얼굴들과 팔들, 거기에 들린 횃불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신전의 일처리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오히려 계획했던 이상으로 완벽한 성공이나 다름 없다. 알테어를 찾느라 잠시 애를 먹었지만 순진하게도 기도나 드리고 있었고, 외부에 나간 신관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붙잡았다. 마법사들의 저항도 없었고, 화재가 보고되긴 했으나 한 곳에 불과한 것을 봐선 예기치 않은 소요사태는 아닐듯하다.

 매일 밤 하만과 같이 올렸던 간절한 기도에 신께서 대답하신 듯,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들은 모두 빗겨나갔다. 이제 성공적으로 처형만 진행한다면, 혹시 모를 외부의 간섭도 오늘을 되돌릴 순 없을 것이다.

 

 “저, 수도자님.”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성문 앞에 선 세 명의 병사 중 왼쪽에 선 병사의 말. 키가 조금 크고 앳된 얼굴. 도저히 성인으로 볼 수 없는 이 병사 역시 병역세를 감당 못한 누군가를 대신해 팔려 온 것이겠지.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섰다.

 

 “그래, 무슨 일인가.”

 “사실 저는 그게, 오늘 이…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 저야 명령이라 그러니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후회하나?”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앳된 얼굴의 병사는 잠시 곁눈질로 가운데 선 병사를 살펴본다.

 

 “얼핏 듣기에, 그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라는 게 왕이랑 대장이랑. 하여튼 수도자분들이 앞장서서 귀족들을 전부 없애는 거라고….”

 “말하자면 그렇지. 신관이니 하며 거들먹거리는 것들, 귀족이란 것들. 왕부터 시작해서 다 없애버릴 걸세.”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왕은 수도자분들 중 한 사람이 하시는 겁니까?”

 “풉.”

 “흐하하하. 막내야 쫌. 하하하하.”

 

 앳된 얼굴의 병사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두 병사가 웃음을 터뜨리고, 잠시 옆을 돌아 본 그는 고개를 푹 숙인다.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말 없이 웃던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은 듯 눈치를 살피곤 금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정자세로 돌아간다.

 

 “그런 게 아니네. 왕이니 귀족이니 하는 것들이 죄다 없어지면, 진짜 신의 뜻대로 사는 세상이 오는 걸세.”

 “그러면 여기 근위대는….”

 “왕이 없으면 근위대는 대체 누굴 지킬 셈인가?”

 “그야 근위대는 왕을 지키기 위함인데, 왕이 없어지면….”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알을 굴리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사하름에서 돌아온 하만에게서 바른 가르침을 받고 난 후 너무도 힘든 시간들을 버텨왔다. 혹시나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나 싶어 사나흘이 멀다 하고 악몽을 꾸었다. 뜻을 같이 할 동료들을 모으기 시작한 후론, 혹시나 누가 배신할까 싶어 단 하루도 잠을 설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버텨냈는가? 바로 저런 얼굴을 보기 위해서다. 억울하게 고통 받는 절대 다수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해방시켜 자유를 주고, 세상을 덮고도 남을 그들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때. 대답이 좀 됐나?”

 “예, 옛. 감사합니다.”

 

 앳된 얼굴의 병사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익숙한 동작으로 오른팔을 가슴에 붙이고 상체를 숙여 보인다. 수비대나 선단, 근위대의 병사들이 자기들의 부관이나 대장이란 놈들께 하는 인사.

 오른손을 쭉 뻗어 저어 그를 제지한다.

 

 “아아, 그런 건 그만 둬. 자네나 나나 평등한 관계니까.”

 “펴, 평등이요?”

 “그래, 평등. 자네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이고,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아니란 말이지.”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수도자님.”

 

 앳된 얼굴의 병사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곤 다시 성문 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갑자기 사라졌다 몇 일 후 시체로 발견되던 동료들을 보며, 그들을 잡아 고문하고 죽이는 데 힘을 보탰을 대신관들을 따르는 척하며 버텨냈다. 서로 배신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꿋꿋이 믿고 지켜낸 오늘이 왔다. 더럽고 위선적인 놈들의 머리통을 돌로 깨부수고 싶은 것을 몇 번이나 참아왔던가. 곧 그 결실을 함께 나눌, 함께 맛 볼 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가 지기 전까지 계획을 알고 있던 수도자들과 병사들은 넉넉히 잡아도 삼 백이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얼핏 봐도 광장을 채운 수 천이 넘는 이들 중 절반만. 아니, 열에 하나만이라도 바른 가르침을 받아 들인다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국 남부 전체에 퍼져나갈 것이다.

 

 * * *

 

 

 “수도자님.”

 “응? 또 뭔가?”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모여선 사람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 가운데 서 있던 병사가 옆으로 한 발자국 옮겨서 있다. 그들은 여태껏 양손으로 들고 있던 창의 끝을 저마다 바닥에 대고 왼손만으로 지탱하고 서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올라가 보시지요.”

 “오, 그 확인인가 하는 게 끝난 건가?”

 

 반가운 마음에, 반쯤 돌아선 몸도 재빠르게 병사들을 향해 돌려세웠다. 그도 이번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예, 그렇습니다. 방금 안에서 전해주고 돌아갔습니다.”

 “아, 고맙네.”

 

 반가운 소리에 절로 미소가 나온다.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세 병사를 다시 둘러 본다. 가운데 선 병사가 다시 입을 연다.

 

 “감사는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 합니다. 수도자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노예면서도 노예가 아닌 줄 알고 살았을 겁니다.”

 

 말을 마친 그들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가슴에 팔을 가져다 붙인 뒤 상체를 숙여 보인다.

 

 * * *

 

 @ 단티아 붉은 성채의 정문 ‘용의 아가리’ 위 성벽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거대한 환호성 소리가 지금 막 길고 어두운 나선 계단을 벗어난 온 몸을 연달아 덮쳐 온다. 수십 번이나 다시 읽고 다시 고쳐 쓴 연설문의 효과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터질 듯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오른쪽으로 반걸음을 옮겨 벽에 기대어 섰다.

 달빛 하나 없는 밤하늘 아래 허리춤까지 오는 성벽위로 사람의 형상들이 나란히 솟아있다. 성벽 밖으로 걸린 횃불이 마치 한낮의 햇살처럼 밝아서인 듯, 형상들은 어두운 단면만을 이쪽으로 보여주고 있다. 계단으로 통하는 문으로부터 대 여섯 걸음 떨어진, 열댓 정도의 그림자들. 오늘을 위해 같이 준비해 온 수도자 형제들과 근위대 병사들, 그리고 이제 곧 처형 될 할티르와 그 가족들일 것이다.

 

 “아하하하하하하하, 하아. 흐흐하하하하하.”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던 손을 억지로 떨쳐냈다. 이제 그럴 필요 없다. 이제 됐다. 정말로 됐다. 이 한 몸 어찌 되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다. 이제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아, 어서 오시요, 블린 형제. 그렇게 기쁘십니까?”

 

 검은 형체들의 한 가운데에 선, 남들보다 조금 작고 왜소한 하만의 그림자가 밝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넨다.

 

 “하하하하하… 하아, 하아. 잠시만요, 으하하하.”

 

 벽에 기댄 그대로 고개를 들며 눈을 감았다. 딱딱한 돌덩이에서 가을 밤의 차가움이 전해져 온다.

 몇 번인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웃음이 더 나오지 않는다. 두 눈을 떠 마치 손에 잡힐 듯 낮게 깔린 먹구름들을 바라보곤, 고개를 내려 그림자들을 바라본다.

 

 “그럼요.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간의 노력들이 있는데.”

 “그러시다면 저도 기쁩니다. 이리 와서 함께 하시죠.”

 “숨이 좀 차서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세요 형제님들. 알아서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뭐, 천천히.”

 

 하만의 그림자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의 그림자처럼 그 역시 웃고 있을 것이다. 알테어를 수행해 사하름에 갔다 온 이후 그는 오랫동안 웃음을 잃었었다. 그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친형제와 다름 없는 그와 함께 예전처럼 웃을 수 있는 때가 돌아왔다.

 

 “이제 잠시 쉴 때도 된 것 같습니다. 예정대로 한 시간 후에 선고문을 읽도록 하지요. 다른 분들도 좀 앉아 있거나 하셔도 됩니다.”

 “하만 형제님. 아직 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바로 처형을 진행해야 됩니다.”

 

 근위대원이었던 하메인의 목소리. 하만의 그림자 왼쪽에 있는 유독 커다란 그림자가 틀림 없이 그일 것이다. 그가 근위대원들을 설득하고 오늘 밤 앞장서 주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왕이 아닌 우리들의 피가 뿌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한다. 여태껏 모르고 있었지만, 자신의 진짜 뜻을 알아차린 우리들을 위해 신께선 훨씬 전부터 우릴 돕고 계셨던 것이 확실하다.

 하만의 그림자가 하메인의 그림자를 쳐다본다.

 

 “글쎄요. 지금 이대로라면 함성 소리에 묻히지 않을까요?”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언제 분위기가 바뀔지 모르니 빨리 해야 됩니다.”

 “네? 하하하하… 방금 전 소리 듣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쉽게 가라앉진 않을 텐데요.”

 “그건 장담 못 합니다. 저나 여기 다른 형제들도 처음 하만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 얘길 믿지 않았습니다. 신전에서 받은 가르침과 완전히 틀렸으니까요. 저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지금이야 연설과 함성에 묻혀 있겠지만, 분위기가 바뀌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흠, 하지만….”

 

 원래 작은 키와 몸집에 평소와 다름 없는 간소한 복장을 걸치고 있을 하만의 그림자는 팔짱을 끼고 있고, 큰 키와 덩치에 두터운 갑옷까지 갖추고 있을 하메인의 그림자는 양 팔로 성벽을 짚고 있다. 확연히 줄어든 함성을 배경으로 고개만 돌려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옆 얼굴과 그 위에 자리한 그림자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 하지만 말이죠. 저들 중에 그런 죄인들이 섞여 있다 해도 얼마나 되겠나요? 비록 그 동안 배워 온 것과 다르기 때문에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저마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기 계신 형제님들처럼 결국엔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좀 줘서 바른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저들 스스로….”

 “아닙니다 형제님. 경우가 다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면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형제님께서 겨울에 절 처음 찾아왔을 때, 제가 뭘 하려고 했는지 기억나십니까?”

 “물론 기억나요, 납니다. 하지만 하메인 형제. 형제도 결국엔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하만 형제님께서 가르침을 주신 덕분입니다. 제 협박도 무시하고 몇 번이나 찾아오셔서 진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지, 저 혼자 해낸 게 아닙니다. 물론, 지금 여기. 제 형제들 중에도 가르침을 한 번에 받아들인 형제도 있긴 하... 아니, 그런 얘길 하려는 게 아니고.”

 

 하메인의 그림자가 성벽을 짚고 선 팔을 거두고 하만을 향해 돌아선다.

 

 “제가 처음 하만 형제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때, 그게 틀려서 형제님을 잡으려 한 게 아닙니다.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혹시 부관들이 알면, 대장이나 왕이 알면 어떡하지 무서웠습니다. 이단으로 몰려 고문 받을까, 그렇게 죽는 거 아닐까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형제께선 근위대원이었고, 왕이 수도자들을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저기 광장에 모여선 사람들 대부분은 가르침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을 거에요. 그러니 귀족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메인의 그림자가 세차게 고개를 저어 하만의 말을 끊어 버린다.

 “하만 형제께선 대신전에서 자라셨고, 왕이니 귀족이니 하는 것들을 매일 보셨습니다. 그래서 놈들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다, 그냥 운이 좋은 놈들이다, 그런 거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 사람들은 다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러니까… 아무튼 수도자들과는 다릅니다.”

 

 하메인의 그림자가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자가 하만과 그 오른 편에 선 병사의 그림자를 지나 양팔을 몸에 한껏 붙인 채 있는 그림자의 앞에 선다. 그 그림자의 움직임을 따라 하만의 그림자 역시 방향을 바꾼다.

 

 “어렸을 땐 왕이란 게 정말 대단한 건 줄 알았습니다. 왕의 명령이라며 병사들이 몰려오면, 마을 어른들이 있는 거 전부 싸들고 가서 사정 좀 봐 달라고 엎드려 빌었습니다. 어쩌다 철로 된 낫 하나 사면 보물처럼 아끼고 아껴야 했는데, 수십 명이나 되는 병사들은 그 비싼 철로 온 몸을 감싸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왕이란 게 저런 무시무시한 어른들을 떼로 부리는 존재라면, 사람이랑 신 가운데 어디쯤 있는 건 줄 알았습니다.”

 

 하메인의 그림자가 무릎을 조금 굽혀 상체를 낮추고, 자신의 앞에 선 그림자의 허벅지쯤을 양손으로 감싼다.

 

 “어른이 되어서야 놈들도 사람인 걸 알았지만,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더 뺏길게 없어 놈들 중 하나가 되었고,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팔에 안긴 그림자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지만, 그를 감싼 그림자는 아랑곳 않고 무릎을 쭉 펴며 들어 올린다. 들어 올려져 횃불에 비친 그림자는 온몸이 밧줄로 둘둘 감겨 있고, 얼굴도 반 이상이 천쪼가리 같은 걸로 감겨 있는 듯하다. 너무 밝은 횃불 때문에 오히려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으나, 분명 곧 숨이 달아날 할티르란 놈의 마지막 몸부림일 것이다.

 

 “어어, 하메인 형제. 아, 아직 안 됩니다! 아직은 안 되요!”

 “알고 있습니다 형제님.”

 

 몸부림치는 그림자를 좌우로 흔들어 대던 하메인의 그림자가 손을 풀어 버리자, 품에 안겨 있던 그림자는 둔한 소리를 내며 성벽 그림자에 섞여 버린다.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합니다. 그 잘난 이름들이 실제론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하메인의 그림자가 쇳덩어리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양팔을 털어 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 하만의 그림자를 마주본다. 두 그림자 사이에 낀 병사의 그림자가 뒷걸음질로 하만의 그림자보다 멀리 물러선다.

 

 “지금 당장은, 왕이고 귀족이고 다 없어질 거란 말을 들으니 기분 좋을 겁니다. 힘들게 농사지은 거 장사한 거 안 뺏긴다는 데 누가 싫다 합니까? 뭐가 뭔지 몰라도 일단 되니까 따라 하라고 소리치면 대부분은 따라 하기 마련입니다.”

 “하메인 형제도 연설문을 듣고 나선 완벽하다 하지 않았나요? 다른 수도자들도 대부분 한 두 번만 듣고도 이해하고,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분명 저 중에도 그 동안 신전의 가르침이나 신관들의 거만함이 잘못 됐단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에요. 그걸 깨닫고 나면 시키지 않아도 귀족 놈들을 잡으러 다닐 테고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이야기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바른 신의 말씀을 받아 들여야 의미가 확실해 져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형제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셔야 합니다. 언제 병사들이 무섭단 사람이 나올지, 여태 신관한테 배운 게 맞다 하는 사람이 나올지 모릅니다. 얼마나 걸릴진 몰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나설 겁니다.”

 “네, 분명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수도자들을 저들 사이에 같이 섞어 놓지 않았습니까? 반발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얼마 안 될 거에요. 조금 전에 말씀 드렸고 형제님도 동의하셨죠? 저들이 스스로 깨달아야만 진짜 가치가 있습니다. 몇몇이 말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전체적으로 대세를 뒤엎진 못해요. 여태껏 신전이 가르쳐 온 거짓말은 절대로 바른 가르침을 이길 수 없습니다.”

 “형제님께서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은데, 신앙이 아닌 겁쟁이들에 대한 이야깁니다. 저 중에 귀족이란 놈들도 섞여 있을 테고, 왕을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저기서 몇이나 신의 말씀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따지려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백 년도 더 남은 심판 날에 자손들이 죽던 말던, 지금 당장 칼과 방패를 든 자들이 자신들 편이란 걸 보여줘야 합니다. 가르침은 내일부터 시작해도 되지만, 왕이 무서워 한 번 돌아간 사람들을 다시 모으긴 어렵습니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에요. 아닐 텐데요. 저들 중 몇이 반발 한다 쳐도… 그러니까, 스스로….”

 

 하메인의 그림자를 향해 서 있던 하만의 그림자가 몸을 돌린다.

 

 “블린 형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메인 형제의 말대로라면 계획이 틀어질 텐데.”

 “네? 저요?”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갑자기 날아온 질문.

 하만과 머리를 맞대고 연설문이니 선고문이니 논의를 마치며 한 시간씩 시간을 두기로 계획을 세웠다. 연설문을 읽고 나면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는 사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테고, 한 시간 정도면 성내 거의 모든 귀에 연설 내용이 전달 될 것이다. 그때 선고문을 읽어주면, 숨어 있던 귀족들을 죄다 잡아 올 때까지 한 시간 정도가 더 걸릴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할티르의 목숨과 함께 왕국을 끝낼 생각이었다.

 

 “일단 계획은 그랬지요. 기다렸다 진행하기로. 그런데…”

 

 하메인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 동안 많은 수도자들이 잡혀 순교한 이유는 바른 가르침을 받고나서 그대로 신전에 고한 자들 때문이다. 사하름에서 돌아온 하만에게 스카니안이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혹은 그가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이단자로 몰려 순교자들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확실히 하메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을 주도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두둔한다면, 그 동안 이 모든 것을 준비해 온 하만의 공이 빛 바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게 참 어렵네요. 기다리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메인 형제 말을 듣고 나니 또 그것도 그렇고....”

 

 성벽을 따라 늘어선 그림자들을 다시 살펴 본다. 가운데 선 하만과 하메인, 그 오른쪽으로 묶여 있을 할티르와 또 다른 남자, 여자와 아이들의 형체. 하만의 왼쪽으로 근위대의 복장을 하고 있을 여러 형체들. 그 사이에 길고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스카니안 형제는 어찌 생각하시나요?”

 

 그의 기다랗고 깡마른 그림자가 주위를 둘러 본다. 무슨 일이던 깔끔한 걸 좋아하는 그라면 어느 쪽이던 해결을 봐 줄 테지.

 

 “예? 저요?”

 “네, 형제님. 저와 하메인 형제의 이야기. 듣고 계셨습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하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보던 스카니안의 그림자가 옆으로 돌아서 하만의 그림자를 마주본다.

 

 ‘후~’

 난처한 상황에서 자연스레 발을 뺐다는 안도감에 저절로 한숨이 흘러 나온다.

 

 “아. 아직도 그 이야기 하고 계셨습니까?”

 “아직도라뇨?”

 “하만 형제님께선 기다리면 지금보다 좋아질지도 모른다 하시고, 하메인 형제님께선 기다리면 지금보다 나빠질지도 모른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지 않습니까?”

 

 타오르는 횃불들을 뒤로 한 채, 스카니안의 그림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만의 그림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둘 사이에 선 그림자들이 조금씩 작아지고, 그의 그림자가 하만의 그림자에 팔을 쭉 뻗으면 닿을 거리에 멈춰 선다.

 

 “주세요.”

 “네?”

 

 스카니안의 그림자는 손바닥을 위로한 채 한 손을 앞으로 뻗는다.

 

 “아니, 스카니안 형제.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선고문 작성해 오신 거, 지금 주시죠. 그래야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느냐 나중에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물었는데, 갑자기 달라는 소리가 나오냐 이거죠.”

 “갑자기가 아닙니다 형제님. 그 동안 해 온 방식이란 게 그랬지 않습니까? 무조건 안전하게. 오늘이라고 다르진 않습니다.”

 

 하만의 그림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대신 몸을 돌려 주변을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항상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자신을 편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을 것이다. 평소라면 유일한 가족인 그의 자존심을 위해, 내 의견 따윈 버리고 그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아니야.’

 고개를 들어 달빛 하나 들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이제 와서 느끼지만 스카니안의 말마따나 간단한 문제였다. 하메인의 말이 완벽하다곤 못해도 충분히 새겨 들을 가치가 있었지만, 쓸데 없는 사족으로 질질 늘어지기만 했다. 지금 이 순간, 아주 잠시라도 시간이 생겨 행복할 사람은 단티아란 놈들 외엔 없을 것이다.

 

 “다른 형제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바로 집행해야 된다고 보시나요?”

 

 하만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리자, 여러 형상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림자들은 가끔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로를 말 없이 돌아볼 뿐이다. 하만의 그림자가 몇 번이나 주변을 돌아보지만,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저 밑에서 들려오는 함성이 어느새 꽤 잦아들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잘 못 생각했던 모양이군요.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하만 형제님. 제가 하메인 형제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하만 형제의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두 분의 말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둘 다 말이 되지만, 늘 그랬듯 안전한 쪽을 골랐을 뿐입니다. 그러니 자책은 그만하세요.”

 

 스카니안의 그림자가 내밀고 있는 손끝이 작게 위아래로 흔들리고, 하만의 그림자는 말 없이 이를 내려다본다.

 

 “지금이던 한 시간 후던 어차피 읽을 거니까요. 예습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읽어 놓도록 하지요.”

 

 하만의 그림자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두워 눈에 잘 들어오진 않지만, 허리띠 안쪽에 넣고 매어 감춰둔 선고문을 꺼내려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잠시만요.”

 

 약간의 기다림 끝에 스카니안의 그림자에게 얇고 기다란 물건이 전달된다.

 

 “고맙습니다 형제님.”

 

 말을 마치며 손에 든 물건을 삼켜버린 스카니안의 그림자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을 피해 혼자 있으려는 생각일 터. 가까워지는 그의 그림자를 보며, 자리를 비켜 주기 위해 등을 대고 있던 벽을 밀치며 바로 섰다. 그리고 어느덧 가라앉은 심장을 안고 조심스레 성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성벽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동료들의 그림자가 작아지고, 아침 해보다 밝은 빛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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