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문 앞에는 도도한 인상의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며, 명혜 공주?!"
태정왕의 입에서 당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명혜 공주라는 여자가 금세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 내가 그쪽에게 그렇게 불릴 사람인가?"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담월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저 목소리는?!'
귀에 매우 익은 말투였다.
곧이어 그 이유가 생각났다.
'그래, 맞다. 황태자! 그 사람 말투랑 똑같잖아?!'
담월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다.
곧 태정왕비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명혜 공주마마시군요……. 어, 언제 귀국하셨어요?"
"내가 그런 걸 일일이 그쪽에게 알려야 하나?"
"네?! 아, 그건 아니지만……."
찍어 누르는 듯한 기운에 태정왕비가 맥을 못 추었다.
태정왕은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태정왕비의 얼굴 역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쟤들 좀 보려고.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네."
명혜가 후보자들을 쓰윽 한 번 훑더니 태정왕 부부를 쏘아보았다.
'쟤들?! 와, 누가 싸가지 여동생 아니랄까 봐 말투하고는.'
담월이 속으로 싸가지 3호의 입명식을 마쳤다.
곧 명혜의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으니 아주 가관이더라? 일정에도 없는 자리를 억지로 만든 이유가 있었네."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태정왕을 쏘아보았다.
보다 못한 태정왕비가 후보자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며, 명혜 공주마마. 아무리 그래도 아랫것들도 있는 자리에서 말씀이 좀 지, 지나치시옵니다……."
"지나치다?"
"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여, 여기 계신 태정왕 전하의 체면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정왕이 마른기침을 하며 불쾌한 기색을 나타냈다.
그걸 본 명혜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오, 그래?"
"네. 사실 아무리 정실 혈통이 아니라고는 하나 그래도 저희 부부가 공주마마보다 어쨌든 항렬은 높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 점 헤아려 주십시오."
태정왕비가 조곤조곤 따지고 들었다.
명혜가 기가 찬다는 듯 짧은 숨을 토해냈다.
"항렬이라……. 두 사람이 언제부터 황실의 항렬에 속했지?"
"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그쪽이 말하는 항렬이 도대체 어디 항렬이냐고."
"……."
명혜의 싸늘한 말에 태정왕비가 차마 대꾸를 못 했다.
그녀의 말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황실의 항렬을 말하는 거야!"
날카로운 음성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담월이 잔뜩 긴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에게 이리 함부로 대하는 걸 폐하께서 아신다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견디다 못한 태정왕이 손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명혜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럼 어디 가서 말씀드려보시던지. 아, 말씀드리는 참에 방금 여기서 얘들이랑 했던 얘기도 함께 말씀드리고. 아, 아니다. 내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낫겠네, 그치?"
"아휴, 공주마마도 참……. 저희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순간 위기를 느낀 태정왕비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명혜의 싸늘한 눈빛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동안 황실에서 적지 않은 돈을 챙겨준 거로 아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나봐? 여기서 이런 추잡한 짓거리를 벌이는 걸 보니 말이야."
"마마, 오해이십니다. 저희는 단지……."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태정왕비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황실의 이름을 더럽힌 것으로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항렬을 따져?! 어디서 감히!"
"아이고, 마마. 그, 그것이 아니오라……."
"닥쳐라!"
명혜의 일갈에 일순간 모두의 몸이 움찔거렸다.
뒤이어 진심이 가득 담긴 그녀의 말이 들렸다.
"기대해. 조만간 내가 아주 빅엿을 날려드릴 테니까."
이윽고 태정왕 부부를 향했던 차가운 시선이 그녀들에게로 옮겨졌다.
순간 머리털이 곤두서는 사나운 기운이 느껴졌다.
"소문대로 아주 재미난 얘들이네. 감히 황실에서 이따위 추악한 작당이나 하고 있다니 말이야."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그녀들이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와중에 명혜의 눈길이 담월에게로 향했다.
어쩐지 사나운 맹수의 기운이 느껴지자 담월이 저도 모르게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명혜와 그녀의 눈이 딱 마주쳤다.
담월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나마 그쪽은 좀 마음에 드네."
"네?!"
담월이 흠칫 놀란 몸짓을 했다.
명혜가 태정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말 다 끝났지? 그럼 니들 나 좀 보자."
그녀가 후보자들을 쓰윽 훑더니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문밖을 지키던 늙은 상궁은 보이지 않고 대신 다른 궁녀가 후보자들에게 다가왔다.
"절 따라오시지요."
후보자들이 태정왕 부부의 눈치를 살피더니 궁녀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방에 남겨진 부부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분을 이기지 못한 태정왕이 찻상을 냅다 뒤집어엎었다.
"저 망할 계집이 어디서 감히!"
태정왕비 역시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녀가 핏발이 선 눈으로 문 쪽을 노려보았다.
"내 언젠간 저년을 찢어 죽여버릴 거야!"
그녀의 말에 무시무시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한편.
궁녀를 따라나섰던 후보자들은 공주의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치스럽게 치장된 공간이 그녀들을 반겼다.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명품에 귀한 물건들뿐이었다.
그녀들이 뻘쭘하게 서 있자 곧 명혜가 들어왔다.
"뭐해? 다들 앉아."
불필요한 형식은 모두 빠진 채 엑기스만 남은 말투였다.
그녀는 그럴 만한 위치에 있었다.
"오빠는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지 몰라."
간택 소식을 듣자마자 급하게 귀국하는 바람에 예민해진 그녀가 대뜸 짜증부터 냈다.
담월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훔쳐보았다.
황후를 닮아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미인상이었다.
다만, 군림하는 사람 특유의 도도한 눈빛과 까칠한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태도가 유독 눈에 띌 뿐이었다.
'한 성깔 하게 생겼구나.'
정찰을 마친 담월이 저절로 몸을 사렸다.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
명혜 공주는 황실의 트러블메이커였다.
흥청망청 사치를 일삼는 건 물론이고 못마땅한 건 죽어도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항상 이런저런 사고를 달고 살았다.
다양한 직업의 남자들과 온갖 염문설을 뿌리며 대중들 눈 밖에 난 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악역을 즐기는 듯 그녀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이런 사실을 미소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살살 눈웃음을 지으며 명혜의 짜증에 조심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공주마마께서도 당황스러우셨죠? 사실 저희도 많이 놀랐답니다.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경황이 없어서. 그저 누가 오라면 가야 하는 줄 알고. 그런 자린 줄 정말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그녀의 말에 명혜가 무표정한 시선을 주었다.
"그쪽은 배우지?"
"어머, 절 알아보시는구나. 역시, 눈썰미가 예사롭지가 않으세요. 호호호."
미소가 정말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명혜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너 참 웃긴 애구나? 내가 말을 편하게 한다고 너까지 말을 함부로 하니? 내가 지금 누구로 보이는 거야?"
"네?!"
"황실 모욕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가르쳐 줘야 정신을 차릴래?"
서릿발 같은 위엄에 미소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아, 아닙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공주마마."
미소가 황급히 사과하자 명혜가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를 드라마 세트장으로 착각하지 마. 난 너의 상대 배우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녀야."
그렇게 미소의 기를 잔뜩 죽여놓은 명혜가 이번에는 영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네?"
"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두 사람의 인연은 외국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만남을 가졌던 사이였다.
그런 인연 때문일까.
명혜의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
"지금 내 안부 물어볼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
"……."
"그쪽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 어쩔 수 없는 장사꾼인가 봐?"
"송구하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영선이 고개를 숙이며 침착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살벌한 분위기에 담월의 긴장도 점점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명혜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잠시 아무 말도 없던 명혜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근데, 그쪽은 대체 누구야?"
엥? 나, 나?! 내가 누구냐고?!
아, 그렇구나.
난 황녀에게 그저 듣보잡인 여자구나.
호감도 조사에서도 이놈의 인지도가 발목을 잡더니 여기에서까지!
순간 담월의 마음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공주와의 만남이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
대리석으로 만든 복도를 세 여자가 줄지어 걸었다.
모두 기운이 쭉 빠진 모습이었다.
그만큼 명혜 공주가 그녀들에게 남기 여파는 대단했다.
담월은 오직 집으로 직행할 생각뿐이었다.
넓은 홀을 지나 마침내 현관을 빠져나왔다.
대기하던 차들이 서둘러 영선과 미소를 태우더니 조용히 궁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녀들이 인사도 없이 가버리자 뒤늦게 긴장이 풀린 담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댁까지 모실 차량이 도착할 겁니다."
"네?! 아, 아니에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궁녀의 말에 담월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그러자 궁녀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문까지 한참입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좀 걷고 싶었는데요, 뭘. 하하하."
더는 황실과 관련된 무엇과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차일지라도 말이다.
'흥! 내가 차라리 걷고 말지.'
이럴 땐 튼튼한 두 다리가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웠다.
궁녀가 마지못해 물러가자 담월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저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만이 그녀의 걸음에 동행했다.
그렇게 담월이 한참 걸어가던 순간이었다.
"한담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담월이 고개를 휙 돌렸다.
곧이어 그녀의 두 눈이 소리 없이 커졌다.
그녀를 향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