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를 따라 그녀들이 이동했다.
황제와의 만남은 짧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황제는 세 사람 모두 마음에 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법을 바꿔서라도 셋 모두를 며느리로 만들고 싶다는 망언도 서슴치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상선이 연신 기침을 하면서 간신히 말렸다.
그 와중에 미소의 애교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완벽한 선취 득점이었다.
담월은 안마 의자 사건 때문에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황제가 마음을 바꿔 자신을 끌어낼까 봐 불안했다.
'이번에는 얌전히 있기만 해야지!'
복도를 걸어가며 담월이 다짐했다.
잠시 뒤, 또 다른 접견실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대기하시지요."
안내를 마친 궁녀가 자리를 떠났다.
그녀들이 차례로 방 안에 들어섰다.
"와, 예쁘다!"
들어서자마자 그림 한 점이 담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의 초상화였다.
주름진 그녀의 얼굴에는 세월의 풍파와 함께 진한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 밖의 내부 인테리어도 그림 속 여인을 닮아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는 꾸밈이었다.
황제의 접견실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담월이 얌전하게 의자에 앉았다.
이 방 안의 그 무엇도 건들지 않으리!
속으로 다짐 또, 다짐했다.
영선은 구석에서 통화를 했다.
그녀는 항상 바빠 보였다.
한편 미소는 방 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선반 위에 진열된 인테리어 소품을 만지작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기분이 아주 좋은 그녀였다.
그때였다.
'찰그락!'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담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새 모양의 작은 소품이었는데 그만 날개가 부러져있었다.
당황한 미소가 얼른 소품을 집어 들었다.
"어머, 뭐가 이렇게 약해?"
자신의 실수보다 소품의 강도를 탓하는 그녀였다.
담월은 자신이 한 짓도 아닌데 괜히 긴장하며 문 쪽을 살폈다.
때마침 문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납시오!"
궁녀의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미소가 황급히 손에 든 것을 선반에 올려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담월 역시 고개를 푹 숙인 채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곧이어 황후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고개를 드세요."
후보자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와!"
담월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눈앞에 초상화 속 여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긴 속눈썹에 진한 눈동자.
보드라운 피부와 윤기 있는 입술.
눈가의 주름마저 아름답게 보일 정도로 빛이 나는 여인이었다.
"담월 양?"
황후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담월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네?! 아, 죄, 죄송합니다……."
"왜 그러나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네?! 아, 아니요! 그, 그게 아니라…… 너, 너무 예쁘셔서 그만……."
마땅한 핑계가 없던 담월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자 황후의 얼굴에서 금세 미소가 사라졌다.
"벌써부터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네?!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정말 너무 곱고 예쁘셔서……."
"호호호. 농담이에요.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길래 놀려주고 싶어서 한 말이에요."
황후가 포근한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그제야 담월도 마음을 놓았다.
곧 황후가 웃음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반가워요. 다들 바쁠 텐데 어려운 걸음 하느라 고생했어요."
황후가 그녀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듣던 대로 세 사람 모두 참 곱고 예쁘네요. 호호호."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미소가 곧장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황후 폐하에 비하면 저흰 아무것도 아닌 걸요. 호호호."
그녀의 말에 순간 황후의 눈빛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미소 양은 직업이 배우라지요?"
"어머, 벌써 제 이름이랑 직업까지 알고 계셨네요. 황공하옵니다, 폐하."
미소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꼬았다.
그녀를 향해 황후의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너무 연기에 집중하다 보면 가끔 현실과 드라마를 혼동할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주변의 오해를 사는 일도 종종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네?! 아, 네……."
미소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애교 작전이 보기 좋게 실패한 것 같았다.
"차를 내오거라."
황후의 나지막한 소리에 금세 찻상이 차려졌다.
그때 황후의 시선이 소품들이 진열된 선반으로 향했다.
"저게 어째서 부서져 있지?"
모두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맙소사! 결국, 걸려버렸잖아!
그곳에는 미소가 부셔 먹은 공작새가 눈에 띄게 엎어져 있었다.
황후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세 후보녀가 서로 치열하게 눈치를 살폈다.
그중 미소의 눈동자가 가장 불안하게 요동쳤다.
그걸 놓칠 황후가 아니었다.
"미소 양."
"네?! 아, 저기 그게……."
미소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우물쭈물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마땅한 변명거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능숙하게 둘러댔겠지만 조금 전 지적까지 받았던 터라 머릿속은 더욱 하얬다.
곧이어 황후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무슨……."
"귀한 물건이 그만 망가졌네요. 문밖에 나가면 지밀상궁이 있을 거예요. 수리를 하라 전해주겠어요?"
"네?! 아, 네……."
미소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른 소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황후는 누가 그랬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그사이 차가 모두 준비되었다.
"자아, 식기 전에 마셔 봐요."
황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긴장하고 있던 담월이 허둥지둥 찻잔을 들었다.
그녀와는 반대로 영선의 움직임은 침착했다.
"차 맛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요."
황후의 말에 차 맛을 보던 영선이 조용히 말했다.
"빙도노채 보이차 같사옵니다, 폐하."
영선이 맛만 보고 차를 알아맞히자 황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영선 양은 차에 대해서 잘 아는가 보군요."
"아버지께서 워낙 차를 좋아하셔서 어깨너머로 조금 배웠습니다."
"그렇군요. 그래, 차 맛이 어떤가요?"
황후가 관심을 보이며 묻자 영선이 가만히 차 향을 음미했다.
곧 그녀의 담담한 대답이 이어졌다.
"음, 아주 좋은 차인 것 같습니다. 최소 100년 이상 된 고목에서 나는 고수차를 전통적인 보이차 제다법으로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발효시킨 최상의 차입니다."
그녀의 말에 황후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군요. 맞아요. 지난번 중국 사절단이 가져온 차인데 그때 들었던 설명과 똑같네요. 호호호."
황후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얼굴을 했다.
'아, 이번에는 이 여자가 점수를 따는구나.'
담월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자신에게는 득점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때마침 자리로 돌아온 미소가 잔을 들어 홀짝대더니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음, 정말 향이 아주 좋은데요?"
황후가 다른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역시, 배우가 맞긴 맞나보군요. 맹물을 마시면서 그렇게 맛있게 먹는 모습을 연기하는 걸 보니 말이에요."
맙소사!
무리수를 두다가 그만 대량 실점한 것 같았다.
담월이 슬쩍 미소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영혼이 송두리째 빠져나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전을 꿈꾸다가 본진까지 털린 얼굴이었다.
담월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행여나 불똥이 자신에게도 튈지 몰라 은근히 긴장됐다.
그런 담월과 황후의 시선이 교차했다.
당황한 담월이 황급히 들고 있던 차를 들이켰다.
"앗, 뜨거워!"
담월이 혀를 날름거리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황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괜찮아요?"
"네?! 아, 네. 괜찮습니다, 폐하……."
황후가 찬물을 직접 건네주며 물었다.
"담월 양은 평소 어떤 차를 주로 마시나요?"
"네?! 아, 저는……."
갑작스런 질문에 담월이 금세 당황했다.
그렇게 잠시 망설이던 담월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저, 저는 주로 믹스 커피를 마십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담월이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100년이 어떻고 전통 제다법이 어떻고 하는 자리에서 믹스 커피라니!
아, 이 방정맞은 입이여!
담월이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호호호. 죄송하긴요. 저도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믹스 커피를 종종 마셨답니다."
"네?! 정말요?!"
황후의 웃음에 담월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금세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황후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 역시, 예리하게 빛났다.
***
휘가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앞으로 재빨리 그의 전용차가 멈춰섰다.
휘가 올라타자 곧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일정을 앞당기는 바람에 모두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두 개의 일정을 한꺼번에 소화하느라 휘도 피곤했다.
그의 비서진 역시 뒤엉킨 스케줄을 다시 조율하느라 사무실에서 정신이 없을 것이다.
피곤한 휘에게 택원의 보고가 날아들었다.
"다음 일정은 언론인 대표들과의 간담회입니다. 그리고 곧장 이어서…….
"궁으로 가자."
갑자기 휘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택원이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방금 궁으로 가자 말씀하셨습니까?"
"오냐."
"하지만 아직 일정이……."
"모두 취소하거라."
휘의 단호함에 택원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려 본 적이 없는 휘였다.
오히려 짜인 일정대로 하지 않으면 호통을 치던 그였다.
택원이 일정이 적혀있는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하오나……."
택원이 차마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냉랭한 휘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두르거라. 좋은 구경 놓치겠다."
휘가 단단한 어조로 명령했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들떠 보였다.
그렇게 휘가 탄 차가 빠르게 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