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자마자 한 장관이 담월과 마주 앉았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냉전 상태였다.
한 장관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담월이 긴장한 얼굴을 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데.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침내 한 장관이 입을 열었다.
"궁에서 소식이 왔다."
꿀꺽!
긴장한 담월이 저도 모르게 굵은 침을 삼켰다.
한 장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내일 입궐하라는구나."
맙소사!
결국, 올 것이 와 버렸구나!
담월의 얼굴이 금세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아니, 그게 무슨……. 그럼 정말로 간택을 하겠다는 거예요?!"
"일단 진정해라."
담월이 흥분하자 한 장관이 다급하게 타일렀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어떻게 진정을 해요?! 그냥 얼굴만 한 번 비추면 되는 형식적인 절차라면서요!"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겠니."
"몰라요. 전 시키는 대로 했으니깐 나머지는 아빠가 알아서 하세요!"
담월이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마음에 억지를 부렸다.
한 장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을 좀 끝까지 들어봐라. 일단 이번에 입궐을 하라는 건 황궁에서 간택 절차를 진행하기 전에 당사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마련하는 자리라는구나. 다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야."
"의견을 들어요? 이제 와서요?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래서 황제 폐하 앞에서 전 싫은데요? 이렇게 말하면 간택에서 빠질 수는 있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그것 보세요. 명분이야 어쨌든 결국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라는 거잖아요."
담월이 기가 막힌다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 장관이 다 큰 딸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거 이해한다. 황궁에서도 최대한 배려하면서 절차를 진행하려는 것 같으니 일단 참고 지켜보자꾸나."
"전 싫어요. 당장 면접에 합격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고요."
답답한 마음에 울컥 눈물이 다 나려 했다.
그런 담월의 마음을 알기에 한 장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잖니"
"그러다가 덜컥 간택이라도 당하면요? 그럼 전 어쩌라고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한 장관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역시 솔직한 한 장관이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담월이 꾹 참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핑계를 대고 후보자 명단에서 절 제외시키면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몰라요. 아무튼, 전 절대 못 해요."
담월이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저 입궁해서 얼굴만 한 번 비추면 그만이라는 말에 덜컥 받아들인 것인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간택에 발이 묶여 아무것도 못하게 생겼다.
아버지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고집을 부리며 버텨보는 수밖에.
담월이 일부러 화가 잔뜩 난 얼굴을 지어 보이며 시선을 피했다.
난처해진 한 장관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
뒷말이 궁금할 수밖에 없는 말이 던져지자 담월이 금세 관심을 보였다.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한 장관의 표정이 진지했다.
"이번 간택에 순순히 참여만 해준다면 그 회사에서 일하는 거 반대하지 않으마."
뜻밖의 말에 담월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로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사실 그동안 그녀가 하려는 일에 번번이 반대하는 아버지의 때문에 은근히 마음이 불편했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더는 반대를 하지 않겠다니.
이건 둘도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정말이시죠?"
"내가 이제 와서 왜 거짓말을 하겠니? 대신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문제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절차를 따라야 한다. 알았지?"
한 장관이 다짐을 받으려는 듯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담월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승낙하면 협상의 달인 한담월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기발한 생각이 스쳤다.
"좋아요.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 이 와중에 그게 무슨……."
곧 담월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걸 본 한 장관이 불안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
담월이 잔뜩 지친 얼굴로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아버지가 오래 버티는 바람에 기운을 많이 빼앗겼다.
하지만 결국엔 그녀의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아주 흡족한 결과였다.
담월이 지친 몸을 침대로 던졌다.
곧이어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언제쯤 전화하나 가만 두고 봤는데, 너 정말 안 되겠구나.
"앗, 태진아. 미안."
다짜고짜 화를 내는 상대에게 그녀 역시 다짜고짜 사과부터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대의 목소리는 곱지 않았다.
-이게 또 성을 붙여서 부르네. 너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얘기했어, 안했어?
"아, 미안 미안. 습관이 돼서. 크크크."
담월이 특유의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전화를 한 쪽은 그녀의 오랜 친구 진아였다.
예쁜 이름을 가진 친구였지만 성이 태 씨라 부득이하게 유명한 트로트 가수를 떠올리게 했다.
성을 붙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느낌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이름이었다.
그러니 예민할 수밖에.
-습관은 얼어 죽을. 그래, 차라리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어리석은 것이 감히 한국에 들어왔음에도 연락을 안 하길래 잡아서 주리를 틀려고 했는데 이참에 그 몹쓸 습관도 함께 고쳐보자.
진아의 협박에 담월이 연신 웃어대며 말했다.
"잘 지냈지?"
-니가 지금 내 안부를 물을 때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
"나? 내가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진아였다.
-뭐긴. 너 이번에 간택인가 뭔가 한다며?
"아, 그거?"
-아, 그거? 뭐지, 이 태연한 목소리는? 내가 지금 오늘 저녁 메뉴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담월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아직도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순진한 그녀가 맞선도 아니고 간택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거품을 물고 있어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기는. 말도 마. 집 앞에 쓰레기 분리수거하러 나왔다가 날벼락 맞은 기분이야."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거야?
담월이 순순히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그제야 이해를 한 진아를 향해 담월의 푸념이 이어졌다.
"아, 이러다가 덜컥 간택이라도 되면 어쩌라는 건지 몰라."
-저기요, 친구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정신 좀 차려주실래요?
진아가 냉수라도 한 그릇 떠다 주고 싶다는 듯 말했다.
냉정한 친구의 질책에 담월이 오기를 부렸다.
"아니야. 내가 또 은근히 매력진 여자잖아. 여기저기 숨겨진 매력들이 드러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꼭꼭 숨겨놨길래 그 긴 세월 동안 난 그놈의 매력을 구경 한 번 못했을까?
담월의 허세를 순순히 리스펙할 리 없는 진아가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담월이 금세 입을 삐쭉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람 일이란 게 모르는 거야. 혹시 아니? 내가 진짜로 황태자비라도 될지?"
-웃기고 있네. 지금 네 호감도가 제일 바닥이야, 이 맹추야.
진아의 말에 담월이 귀를 쫑긋거렸다.
"호감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집에 TV 없냐? 오늘 아침부터 아주 지겹도록 나오는 게 그 간택 얘기인데. 어째서 당사자인 너만 모르는 거야?
"뭐?!"
담월이 서둘러 TV를 켰다.
그러자 곧장 이번 간택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뉴스 화면이 나왔다.
맙소사!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담월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곧이어 무뚝뚝한 황태자의 얼굴과 함께 이번 간택에 참여한 후보자들의 얼굴과 이력 등이 낱낱이 공개됐다.
그중에는 담월 자신의 얼굴도 있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문이 턱 막혔다.
화면에는 바보같이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 화장이라도 하고 다닐 걸.
그 와중에도 그 부분이 유독 속상한 그녀였다.
전화기 너머로 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호감도가 6%가 나오냐? 너 나 모르게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거야?
그녀의 지적에 담월의 눈이 예리하게 번쩍였다.
마침 뉴스 화면에 각 후보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가 나타났다.
차 부총리의 딸이 51%, 추 장관의 딸이 43%, 그리고…….
"에게? 고작 6%?!'
직접 자신의 호감도를 확인한 담월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도대체 누굴 붙잡고 어떻게 조사를 했길래 저런 웃픈 수치가 나온 거야?!
담월의 자존심에 제대로 생채기가 났다.
안 되겠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당장 숨겨둔 매력들을 불러 모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