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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늦은 오후 즈음 첫 번째 거사를 눈앞에 두고.
“어버이를 잃고 굶어 죽어가던 저와 제 동생들을 거둬주신 건 마마님이십니다.... 쓸모없던 저를 다독여주시고, 계속 궁녀로 일하게 해주시고... 목숨으로 항상 빚을 갚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저로선 정말 여한이 없어요. 저, 반드시 성공해서 마마님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마마님, 정말 보고 싶을 거에요.”
내일 새벽에 자살하기로 약속한 부하에까지 마지막 인사를 받은 터라,
“흥, 제 까짓게.”
갈마 미인의 부름을 받았어도, 부 상궁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야만인이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해도,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뭣보다 자신에게는 배후에 보다 높은 비빈마마들이 계셨다. 향후 어떤 아수라가 펼쳐지든 자신은 언제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
그래,
연혜궁의 수발상궁으로서, 자신이 이번에 맡은 임무가 바로 이것이었다.
궁중에서 있어 야낙의 평가를 최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아랫것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할 만큼, 미인을 상당히 잔혹하고 포악한 사람으로 몰아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야만인은 녹록치 않은 상대라고 했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단 궁녀들의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야만인을 상전으로 모시라는 숙비의 명을 받았을 때부터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예상못할
비정한 수를 쓰기로 작정했었다.
부하 한 명이 죽어 나간다 해서, 슬프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그런 충성스런 부하는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거사를 앞둔 시점에서 자신을 부른 야만인을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생각해야했다.
그러고 보면 저 야만인.... 처소에 도착한 첫 날부터,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대놓고 시비를 걸며 무례를 범하는 자신들에게도 화도 내지 않았고.
“...........”
내방이 아닌 작은 연못이 딸린 후원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미인을 보며, 부 상궁이 먼저 태연하게 예의를 갖춘다.
“미인 낭랑, 소인을 부르셨사옵니까.”
“...........”
‘.......주변에 아무도 없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는 와중에도... 주변에 본방나인은 물론이거니와 자신 측의 사람 또한 없다는 걸 파악한 부 상궁이 가소롭다는 듯 썩은 미소를 지어 올렸다.
‘흥, 그럼 그렇지. 그 모래 밥을 먹고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넘길 수가 없었겠지. 나인들 대신 나를 조지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로군.’
미인이 화를 내서 자신들에게 역정을 내릴 때까지 밥에 이물질은 물론이고 계속해서 무례를 범할 작정인 그녀였다. 미인이 화를 내서 벌을 내릴수록, 그것이 자신의 모략에 유리하게 작용되었기 때문이었다.
......
미인이 자기만 따로 인적드문 곳에 부른 것도,
아무도 없을 때 자신을 꾸짖으려함인 것같았다. 아님 협상을 요청하거나.
그런데.
“주변에 사람이 있는 지나 살피는 것 보니, 자네도 대충은 내 의도를 파악한 모양이로군.”
미인은 상궁이 예상하는 모든 걸 비켜나가고 있었다.
야낙의 무미건조한 어조는 여전히 다를 게 없었지만, 듣는 이에게 있어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비수와 다를 게 없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주동자와 독대하는 상황인지라, 야낙의 태도는 그 여느 때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첩보원이라기엔 그 실력은 최악이고. 모략을 세워 일을 진행시키는 책사라고 보기엔 초보적이고...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이고 있지만, 내가 어찌 나올지 뻔하다는 그 눈빛은 대놓고 노골적이야. 내가 오늘 무례에 대해 자네를 꾸짖을 거라 생각하나, 부 상궁? 아니면 이 일에 관해 내가 어떤 거래를 요청 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
서재인의 수발 나인에게 들었던 것처럼, 미인은 상대방의 속마음은 물론이고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까지 너무도 재빠르게 간파하고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모른 척 야낙을 탐색하려 했던 부 상궁이 곧 표정을 고치고 허리를 바로 편다.
“독심술사라더니, 사람 속내를 너무 잘 읽는 것 아닙니까? 낭랑.”
“본인이 유능한 책략가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허점을 많이 보이곤 한다네. 거기다 그런 허점같은 건 원숭이도 알아볼 수 있는 건대도 꼭 자네 같은 사람들이 나를 독심술사로 보더군.”
“.....원숭이? 하참~ 나!”
바로 궁중예법을 때려치운 부 상궁이 본색을 드러내며 기분 나쁘게 코웃음을 친다. 이미 없애기로 결심한 웃전 따윈 무섭지도 않았다. 멍청한 궁녀들과 달리 자신에게는 믿는 배경도 있었던 터라..... 뭣보다 여기 벌어지는 상황을 증명할 증인도 증거도 없었다.
팔짱까지 끼며 제대로 된 도발을 벌일 작정인 듯 부 상궁이 한껏 비웃으며 신랄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디 벼락출세한 오랑캐 가문에서 나온 것이 말이야. 미인 첩지를 받았다고 웃전 행세 하는 것 보면 기도 차지 않아서.... 초야 이후로 폐하께서 단 한 번도 찾지 않는 신임 후궁주제에 분수를 알아야지. 사실 예정된 일이긴 했어. 너 같은 배워먹지 못한 야만인 따위에게 폐하께서 관심을 가져줄 턱이 없지.”
하긴, 후궁 첩지를 받은 이래로 왕과 다시 만난 적 없는 그녀였다. 연혜궁에 간간히 왕의 행차가 오고가긴 했었지 야낙에게만은 폐하께서 방문하지 않으셨으니... 아랫것들이 슬슬 얕볼 때가 되긴 한 것이다.
“..........”
하지만, 야낙은 그런 말을 상궁에게 들어서조차 무서울 정도로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침착하고 냉정하리만치 분석적이었다.
“냉궁에 내쳐지든, 폐출되든, 사약을 바든 얼마안가 가문과 함께 몰살 될 거..... 생전 좋은 추억이나 만들고 가라고 우리 같은 문명인들이 친하게 대해주었더니 어머 세상에... 그게 기분나빴나봐? 미.인.낭.랑?”
.....소위 문명인들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은 저런 식의 괴롭힘이 제일 최악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집단 따돌림이라든가, 먹을 것에 장난을 치는 거라든가.
문득 그런 점이 부러워졌는 지 야낙의 입가로 씁쓸함이 돌고 있었다.
“글쎄다, 내가 기분 나빠야 할 게 있었던가? 형편없는 인사치레라든가, 모래 밥이라든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데.”
“뭐?”
“이게 자네가 나한테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괴롭힘이었나? 이이상의 것은 정말 더 없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잘.....”
“자네는 도발과 괴롭힘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 이건 괴롭힘이 아니야. 단순한 애들 장난에 불과하지. 정녕코 나를 화나게 싶으면... 도발에 넘어가게끔 하고 싶으면 자네는 인생의 ‘지옥’부터 맛봐야 할 거야.”
“오호라 이제야 포악한 본성을 드러내주시는 군!!!!!! 낭랑, 너무 하십니다! 소인이 무슨 잘못을 하였다고.....”
“내겐 길들이기란 없어. 굴복하느냐, 죽느냐 이 둘 뿐이다.”
두 시녀가 스스로 자신을 위해 일해주고 있는 동안, 자신도 자신대로 준비해놓은 ‘모략’이 하나 있었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듯 부 상궁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그녀가 낮고 차갑게 말을 잇는다. 야낙의 눈빛은 다시금 ‘야만인’의 것으로 되돌아 있었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미인께서.. 미인께서!”
신나하며 아랫것을 부르는 부 상궁의 앞으로 야낙이 더없이 환히 웃으며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자네는 내 개가 되어줘야겠어. 모래 밥에 대한 답례로... 자네들의 부하까지 모두 내 애완견으로 키우고 싶군.”
“뭐?”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생각하고 얼른 미인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땐,
퍼억!!!
너무 늦어있었다. 부 상궁이 급소를 얻어맞고 쓰러지는 데 있어
일격....
단 한방의 일격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인들은 내방에서 다소 떨어진 처소의 후원에까지 올 수도 없었다.
늦은 오후, 나인들더러 다과상을 준비하고 내방을 청소하라 야낙이 몸소 이것저것 많은 일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미 괴롭힘을 가했던 데다 거사를 앞둔 시점이었던 탓에, 나인들은 최대한의 자극을 피하고자 순순히 지시를 따라주었었다. 부 상궁과는 이미 입을 맞춰놓고 있던 터라 어느 누구도 상궁을 찾지도 않았고.
그 덕에 그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후원에서 공격을 당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말았다. 부 상궁을 어깨에 짊어지고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지는 미인을 어느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고....
밤이 깊어서야, 야낙은 마나에게서 자살을 기도했던 나인하나를 잡았다는 보고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나인들의 처소에서 발견한 유서는 란초이의 손에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그리고 바로 그 날 새벽.
갖은 기대를 가지고 자살했을 동료의 시체를 발견하기 위해 한 나인이 광문을 열었을 땐.
그녀가 목격한 것은 약속대로 목을 매달고 죽었을 동료의 모습이 아니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나인의 앞에는
칼로 무참히 살해당해 있는 동료와, 동료의 피가 묻힌 칼을 들고 쓰러진 부 상궁만이 광 속에 나뒹굴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후궁이 되고 난 지 며칠 만에 자신의 처소로 살인 사건이 일어나버렸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곤,
야낙의 하루는 아침부터 평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알리바이부터 시작하여,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에게 여러모로 불리할 텐데도 옷고름을 여미며 다음 일을 준비하는 그녀와 마나의 표정이 더없이 덤덤했고, 심지어 사악까지 했다.
“어쩜, 부루크나 여기 궁이나 다를 게 하나 없대요. 사람들 행동하는 건.”
자살 사건으로 끝나야 할 것이 무려 ‘살인 사건’으로 번져버렸다. 그것도 왕과 왕후가 생활하는 이 ‘궁중’에서..... 하지만 신나라하며 야낙에게 대화를 거는 마나의 표정에는 무려 즐거운 미소가 만연해있었다.
“그렇다 해도.... 부 상궁은 시시했어. 간만에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나나했더니 그냥 그저 그런 상대였거든.”
“전 이젠 정말 짜증난다고요! 그 년의 눈빛이 내 것과 닮아서 저도 안 그래도 잔뜩 기대했거든요!! 설마 그 상궁 년, 이대로 우리한테 당하는 거 아니죠? 좀 더 발악하며 덤벼들어야 나도 기대한 보람이 있다고요.”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은 모두 마나와 야낙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미인인 야낙을 모함하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기로 예정된 동료가 오히려 웃전에게 살해를 당한 것 같은 사태가 벌어지자, 나인들이 현재 섣불리 상황을 바깥으로 알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행동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사람을 얼마나 모함시키고 죽였는지 몰라도, 모두들 직접 살인 현장을 본 적은 없었을 테지.”
지루하게 하품을 늘어놓던 야낙이 옥가락지를 낀 자신의 손가락을 노려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결국 시체와 용의선상에 오른 상전을 두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년은 단 한명도 없었어. 바깥에 병사를 부르거나 주위의 도움을 청했을 경우, 준비한 증언도 마련해놓았거늘....”
“웃전은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멍청한 책략가에, 그 아랫것은 겁쟁이들이라 저 년들 믿고 야낙 님에게 보낸 높으신 분께선 지금쯤 어디에 뭘 하고 있을까요?”
“나도 모르지. 그건.”
마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랄하게 비웃고 있었다. 지금쯤, 시체를 숨기고 부 상궁 주변으로 모여 수습책을 짜고 있을 나인들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절로 조소가 졌기 때문이다.
“급소를 가격하셨다죠?”
“아아, 그래. 기도를 쳤었지.”
“즉사를 면했다면 상궁도 지금쯤 깨어나겠네요. 란초이도 움직였겠다. 슬슬 저도 바깥에 상황을 알리러 가겠습니다.”
“.............”
야낙이 말했듯이, 한 번 적이 된 상대에겐 ‘길들이기’란 정말 없는 모양이었다.
나인들까지 용의자의 공범으로 몰아 한꺼번에 사람 이하로 만들어버릴 작정이었는지 야낙이 비정한 태도로 대답대신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하긴, 그녀는 작전의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는 마나를 시켜, 은신술이 뛰어난 란초이에게 살해를 지시한 장본인이었다. 거기다 살인자가 된 란초이에게 추후 현장을 목격했을 나인들의 미행까지 맡기지 않았던 건가.
그리고, 마나는 나인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우연히 처음으로 시체를 목격한 척 바깥에 도움을 요청하는 역을 알아서 자처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대화를 나누기 바로 얼마 전에는 나인들의 뒤를 쫓던 란초이가 시체의 위치까지 보고한 터였다.
나인들이 부 상궁을 수습하느라, 시체는 현장 주변에 이불로 만 채로 일단 내버려두었다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일을 저지를 때가 오자,
여유를 부리면서도 마나가 준비운동이라도 하는 듯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준비 되었죠, 야낙 님?”
“음.”
“....그리고 저.....”
그리고 내방에 나서기 전,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녀가 장난기를 거두며 진지한 표정으로 주인에게 나직이 입을 열고 있었다. 부하의 의미심장한 태도 앞에 야낙이 날카롭게 시선을 올린다.
“뭐지?”
“야낙 님, 일이 끝나면, 단 둘이 하고픈 의논이 있는 데 따로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지요.”
“..........”
“란초이에 대한 것입니다. 의문이 가는 점이 있어서요.”
“단 둘이 의논하고픈 것이라.... 그 소리는 당사자인 란초이조차 같이 들어선 안 되는 것이냐?”
“제 의문이 사실이라면, 저와 야낙 님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나아가 우리 일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겠지요.”
“........!”
큰 용기를 내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그녀였다. 란초이는 자신 못지않게 야낙의 신임을 얻는 동료인데다, 이번엔 큰일까지 해낸 공로자였으니 말이다.
여기서 잘못 입을 놀렸다간, 그 동안 자신이 보인 시기와 텃세 때문에 동료를 험담한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었기에 란초이를 언급하는 마나의 태도가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야낙 님은 거짓말을 잘 파악하시는 분이죠. 그러니 제 눈을 봐주시고 판단해주세요.”
“...........”
“저는 결코 절대로... 동료를 모함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해 스스로의 자만을 뉘우치고 란초이에게 사과까지 건넸으니까요. 란초이와 이번 일을 공모하면서 문득 생긴 의심이 강한 의문으로 번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보통 사안이 아닌 지라, 시녀인 저로선 주인이신 야낙 님이 들어주시고 판단해줬으면 한 겁니다.”
마나의 눈은 거짓을 고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냐......”
몸종의 말을 들으면서, 잠시 란초이를 생각에 둔 듯했다. 머릿속에 무엇을 그리고 있는 걸까?
“알았다.”
그녀의 말끝이 어쩐지 힘이 없었다.
“너는 추후 따로 부르지.”
“아!! 감사합니다, 야낙 님! 저 이제 다녀올게요!”
적어도 주인에게 오해는 안 산 것 같아, 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방을 나서고 있었다.
“.........”
하지만,
떠나는 오랜 몸종의 등을 바라보는 야낙의 눈빛은 마나와 달리 조금씩 흔들리며 동요를 보이는 중이었다. 어둡게 표정을 굳힌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긴 소매 끝을 꽉 쥐어버린다.
오늘 찬의성 날씨는 늦가을의 것치고는 산뜻했다.
새들은 지저귀고,
고이 피어난 국화꽃들은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고.
궁중의 담벼락을 차지한 고양이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즐기고 있었으니...
“산보가기에 좋은 때로구나. 오늘은 중궁과 후원이나 걸어 볼까나....”
일찍 만기(萬機:왕이 치르는 업무)를 마치고, 개인 시간을 보내던 중.
왕이 너무도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다정히 웃어보였다.
“성상 폐하 납시오!”
태화궁 못지않게 웅장하고 화려했지만 언제나 적막하고 쓸쓸한 왕후의 궁.... 중궁(中宮)으로 간만에 왕의 행차가 당도해 있었다. 임금의 당도를 알리는 내관의 목소리가 근엄하게 중궁의 내전에 울려 퍼지자,
“폐하!”
봉황의 복식을 한 젊은 여인이 뒤로 상궁과 나인들을 대동한 채, 반가운 기색으로 바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이구, 저런.”
직접 내방으로 가기도 전에 아픈 몸을 이끌고 몸소 마중 나온 왕후를 보며 왕이 먼저 다가가 아내의 부축을 돕고 있었다.
“내전에 계시지...! 편찮으신 분이 어찌 친히 마중을 나왔소. 중궁.”
지독히도 다정다감한 목소리였다.
“..........그것이...저.....”
지아비의 진심어린 염려 앞에 젊은 왕후가 쑥스러움을 느꼈는지 볼우물을 붉혔다. 폐하가 그리워 체신도 잊고 그만 서둘러 나왔노라 대답하기엔 그녀의 위신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간택을 거쳐 국혼을 맺고, 왕후가 된 지도 어연 10년 째. 그녀에게 있어 왕은 여전히 대하기 수줍은 지아비였다.
“으음!”
수줍음에 말도 못 잇는 중궁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이며,
근 두 달 만에 찾아와 보는 중궁전의 광경을 쭉 훑어 본 왕이 어느 덧 호탕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자, 자 서론이야 어쨌든. 이만 드십시다, 중궁. 짐은 내일까지 예서 머물 예정이니.... 서로 밀린 회포는 천천히 풀어도 늦지 않아요.”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첩이 경솔하였사옵니다....”
“사람이 반가우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무에 경솔한 짓이오?”
왕후 춘추 24세.
지아비인 국왕과는 나이 차이만 무려 36살이나 났지만, 부부는 훈훈할 정도로 정다웠다. 아랫것들의 도움도 마다한 채 왕이 손수 왕후의 허리를 잡으며 내전으로 걸음을 옮긴다.
“........”
수줍게 웃으며 듬직하게 자신의 부축을 해주는 지아비를 올려다보는 그녀다. 병상에 누워 지낸 지도 몇 년 째. 웃을 날이 통 없었던 근래 들어 제일 기쁜 일을 겪는 중인 지, 왕후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미소 짓고 있었다.
*********
“그 간 짐이 중궁에게 무심했소, 다른 일을 돌아보느라 짐이 본처에게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아 그게 영 마음에 걸려서.....”
중궁의 내전은 광활한 외부와는 달리 소담하고도 아늑한 장소였다. 저녁 수라에 앞서, 가볍게 입가심하고자 함인 부부 사이에는 소담한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
언제나 상냥했고, 언제나 자애로웠던 왕후.
중궁이 내어준 도자기 찻잔을 내려다보며, 분위기를 풀고 싶었는 지 왕이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농을 잇기 시작했다.
“짐이 너무 늦게 방문한다싶으면 내자들은 저마다 짐에게 도끼눈을 치켜뜨거나 곧잘 토라지고는 했소. 하지만 중궁만은 짐이 얼마나 늦든, 얼마나 소홀하든지 간에 늘 상냥하게 예를 갖춘다 말이야. 하하하! 중궁....... 설마 그 얌전하고 고고한 얼굴 뒤로 사실 짐을 원망하고 있었다거나 하지는 않았겠죠?”
...........
“.......설마요.”
저번, 내명부 다과회에서 후궁들에게 보여주었던 위엄은 간 데 없었다. 지아비 앞에서만큼은 온순하고 상냥한 아내가 되고 싶었는지, 다소곳이 찻잔을 들어 올리는 왕후의 낯빛이 너무도 부드럽고 다정했다.
“신첩이 어떻게 폐하를 원망하겠습니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신첩은 폐하의 뒤를 밟아 따라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사람입니다.... 신첩은 정녕코 그것 말곤 여생에 바라는 게 없어요,,,,”
“........”
“10년, 그 길고 길었던 10년 동안.....”
조르르.
잘 말린 국화꽃차를 잔에 자르며 왕후가 파리한 웃음을 지어 올렸다.
“남은 거라곤 가문의 연줄 밖에 없는 아내의 손을 지아비는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중궁!”
“잡아주는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어떤 여인은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죠.”
“............”
“폐하, 부디 국사에 전념하시어 한 번 돌아봐도 족할 처에게 너무 마음 갖지 말아주세요. 신첩은 폐하와 같이 하는 이 순간만으로도 정녕코 기쁘옵니다.”
“........으음.”
분위기 풀기는 어김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불쾌하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단지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만 들 뿐.
왕후와 대면하면, 언제나 이런 얘기가 오고 가는 지라....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가 내전의 공기를 싸늘하게 식히고 있었다.
왕 또한, 본처 앞에서만큼은 늘 쓰고 다니던 유쾌한 가면을 쓸 수가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차를 마시던 그가 말없이 젊은 아내의 손을 부드러이 잡는다.
“상심이 아직도 크겠지. 마음의 상처는 여전할 테고.”
아마 왕후와는 평생 웃으며 대화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죽어버린 아기씨의 존재가 둘 사이의 간극으로 남아있는 한.
“............”
친하게 지냈던 소꿉친구와 믿었던 혼수시녀.
왕후는 이 둘에게 속아.
회임 6개월 차에 유산을 유도하는 극약을 마시고 말았었다. 그렇게 사산된 태아는 모체 밖으로 나오질 않았고, 왕후는 어의들이 보는 앞에 강제분만을 감행해야했었다.
한창 청춘일 때, 아기씨는 물론 건강마저 잃어버리고 평생 지고 갈 마음의 상처까지 얻어버렸다.
주동자인 덕비는 폐비가 되어 사사되고 이에 반발한 번 씨 가문까지 토벌하는 것으로 복수는 끝났지만, 불임 판정까지 받아버린 왕후의 우울증은 여전히 그칠 줄 몰랐다.
“면목이 없습니다, 후사하나 폐하께 못 안겨드리는 신첩의 죄가 너무도 송구스럽습니다.”
“짐이 중궁을 지키지 못한 죄도 크오. 이제 더 이상 그에 대한 얘긴 하지 맙시다.”
잡은 손을 다독이며, 아내를 위로하는 그였다. 이래서 바쁜 와중에조차 왕후를 방문하는 것이다. 장인이자 조정의 실세인 마 승상의 눈치를 보고자함도 아니었고. 그는 단지 왕후의 고통을 이해했을 뿐이었다.
“........5왕자를 방문하였다 들었습니다.”
눈물을 숨기며 슬쩍 화제를 돌리는 왕후의 말에 그가 얼른 화답한다.
“그렇소, 그랬지.”
“5왕자의 환후가 갈수록 깊어지니 신첩의 근심 또한 크옵니다. 그 어린 아이가 몸도 가누지 못하고 병상에만 누워있는 데 모친인 숙비의 심정은 오죽 비참할까... 신첩이 최근 고심이 많습니다.”
“그래, 그렇지. 숙비가 너무 쇠약해졌소, 짐에게 차를 대접하는 데도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더군.”
“하여, 신첩이 따로 숙비에게 5왕자의 환후를 돌봐줄 간병인과 처소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따로 보태주고자 하는 데..... 폐하께서 윤허해줄 수 있으신지요.”
“내명부의 재정을 쓰는 건.... 중궁의 재량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
“.....아하.... 재정이 부족한 모양이로군.”
한숨을 쉬며 고개만 내젓는 임금이었다.
“국고는 매우 신중하게 써야하오. 무엇보다 마 승상을 위시한 조정대신들이 크게 반대할 테지. 무엇보다 숙비는 죄인의 딸이 아닙니까, 분명 여론도 좋지 않을 것이오.”
조심스레 요청을 올리면서도 왕후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실, 내명부의 재정이 고갈된 데엔 전적으로 숙비의 횡령이 한 몫 하긴 했지만.... 왕후는 구태여 부하의 잘못을 지아비 앞에 고하지 않았다.
“숙비의 친정가문은 이미 쇠락하였사옵니다. 가족과의 연통마저 끊기고 홀로 남겨진 숙비가 고통 받고 있는데, 왕후로서 신첩이 어찌 그를 외면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몸이 불편한 5왕자 또한 왕손입니다.”
“짐도 그들을 어여삐 여기는 건 매한가지. 다만, 짐은 숙비의 가문 만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소. 한 푼 한 푼 소중한 이 때에 인 씨들은....”
숙비의 아비는,
마 승상 천거로 호조상서(戶曹尙書:국가의 재정관리 및 계획을 맡았던 부서를 통괄하는 참판)로 임명되었다가, 조세 횡령 및 매관매직으로 파직되어 변방으로 귀양이 된 인물이었다.
믿고 자리를 내줬다 뒤통수를 맞은 마 승상은 대단히 격노했고, 나라의 재산을 사사로이 쓴 신하에게 큰 실망을 한 왕은 법도에 따라 인 씨 가문의 전 재산을 몰수하여 귀족의 신분까지 박탈했었다.
“아비의 죄를 여식과 손자에게까지 물은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숙비와 5왕자만은 이 궁에 내버려두었고요.”
병약한 얼굴로 간곡히 청을 올리는 왕후의 표정이 다소간 절절했다. 왕이 말없이 차만을 들이키며 침묵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만나 본 5왕자가 생각났는지.
“승상에게 거론은 해보리다.”
“망극하옵니다!”
결국, 왕후의 요청에 승낙을 표하는 그였다. 왕후가 바짝 허리를 낮춰 감사를 표한다. 그런 아내를 내려다보는 왕의 입가로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그보다, 중궁. 수라를 들기 전에 짐이 한 가지 묻고자 하는 것이 있소.”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왕이 문득 생각이 난 게 있었는지 굳은 표정을 풀며 입을 열고 있었다.
“네, 하문하시옵소서.”
“이번에 미인이 된 야인 족의 갈마 씨가 연혜궁의 처소에 배치되었던 데. 미인은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소?”
“네?”
“짐은 초야 이후로 며칠 미인의 처소에 들르지 않았습니다. 일부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될 때까지 내버려두는 게 옳을 듯해서요.”
“아.......”
숙비에게 보낸 그 야인 족 여자?
몰락해서 쓸모없어지긴 했어도 숙비는 한 때 자신의 책사 노릇까지 하던 사람이었다. 야인 족 여자는 내명부의 계획에 없었던 존재였고, 왕후인 그녀에게도 있어 야낙은 관심 밖의 인물인지라....
잔챙이 숙청 역을 맡아 온 숙비가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겠거니 여겼는지 왕후가 자애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미 미인이라면 지금쯤 처소에서 수발 상궁과 나인들의 인도에 따라 하나하나 적응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숙비의 사정이 나아지고, 신첩 또한 병상에서 일어나면 미인의 문안을 받을 것이고요.”
“허허허, 그래야지.”
미인의 근황을 듣자 흡족했는지 왕이 드디어 파안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던 초야 이후, 그도 야낙에게 방문하고는 싶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아 좀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었다.
“좋소, 좋소. 중궁은 비록 옥체는 미령하나, 덕이 있고 만인을 포용하니 내명부의 수장으로 자격이 충분한지라. 새로 들인 후궁의 출신배경이 미천하여 다들 미인을 홀대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짐의 노파심이었나 보오. 중궁도 이리 현숙하고, 숙비도 덕이 있는 여인이고, 아끼는 공빈도 서재인들도 모두 순하고 사람 귀한 것을 아는 사람들인데.... 하하하, 짐이 나이를 먹다 보니 의심이 늘었어.”
그 노파심은 들어맞았으나, 왕후의 낯빛은 여전히 부드럽기만 했다.
“새로운 미인이 마음에 드시옵니까? 폐하.”
“.....글쎄요, 마음에 들기보단 어쩐지 묘한 아가씨라.”
‘소녀의 이름은 야낙이라 하옵니다.’
초야 때, 이름을 답하며 고개를 올렸던 야낙의 모습을 회상한 왕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간식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무례한 것이 오히려 매력적인 여인은 첫 사랑 이후 처음이었소. 정말이지 모습이며 분위기며 비슷해서 놀랐다니까? 하여 짐의 기대가 제법 크오. 새로 설렐 상대가 생겼다는 건 즐거운 일이거든.”
“......그러십니까?”
첫 사랑이라면, 임금의 30년 된 조강지처인 온 귀비를 가리키는 것일 거다. 사실 올해 환갑인 임금에게 첫 사랑이라 언급 될 만 한 인물이 있다면 그건 딱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
다른 건 몰라도 귀비를 좋게 언급하는 지아비의 발언이 대단히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주 미미하게나마 왕후의 입가가 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미인의 처소로 숙련된 시녀들을 추가로 넣어야 하겠군요. 미인도 좀 더 편히 궁 생활에 적응을 해야, 폐하를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지 않겠습니까.”
더없이 자비스런 모습으로 지아비를 대하는 왕후의 모습은 현모양처의 것 그 자체였다. 왕 또한 흡족하다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중궁의 두 손을 다시금 꼭 잡고 있었다.
“고맙소, 중궁. 짐에게도 이런 현숙한 아내가 있기에 마음 놓고 내명부를 맡길 수 있는 것이오.”
“..........”
왕후가 웃는다.
왕이 하는 저 말이 진심인지 아닌 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지아비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그러나,
“주, 중궁 마마!!!!”
“?”
부부간의 도타운 분위기는 예고도 없이 박살나고 있었다.
왕후의 전속 상궁의 목소리가 무례를 잊고 내전에까지 전달된다.
“무엄하다! 무슨 일이냐!”
지아비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큼은 아랫것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급보를 전하는 상궁의 목소리는 몹시도 떨려 있었다.
“대단히 송구하옵니다, 마마! 하오나 연혜궁으로 감히 아뢰기조차 힘든 사건이 일어난 지라.....”
“뭐라, 연혜궁이?”
“내명부의 급보이옵니다.. 마마, 신형사로 급히 병사를 파견해야 하는 사건이온데, 이는 반드시 중궁 마마의 윤허가 있어야 하는 일이옵니다.”
그 정도의 사건이면, 대단히 큰 사건임이 분명했다.
왕의 표정도 순식간에 정색하여 굳어지고 있었다.
“.....연혜궁이 왜?”
당장 침착해하며 지아비의 안색부터 살펴보던 왕후마저 이어 들리는 보고를 듣고 결국엔 기함하고 말았다.
“사... 살인이 벌어졌습니다. 연혜궁의 갈마 미인 낭랑 처소로 수발을 드는 나인 하나가 무참히 살해를 당하였나이다.”
“뭐라고?”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에는 항상 마(魔)가 낀다더니.
웬만해선, 평화롭게 흘러갈 줄 알았던 찬의성의 내명부에 또 다른 파란이 생겨버렸다.
간만에 찾아온 왕의 방문에 안도하며 기뻐하던 왕후에게로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었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지아비 옆으로, 왕후의 안색이 파랗게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