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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대국의 빈(嬪): 악의 딸
작가 : 써니벨
작품등록일 : 2017.7.15

도덕심이든 윤리의식이든 단 1g도 없는 야만인의 아가씨, 야낙(여주)의 피말리는 궁중생존기와 위태로운 로맨스 스릴러! 살육과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야인족의 영애로서, 가벼운 마음으로 입궁한 대국의 내명부는 그야말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였다. 그러나 얼마못가 궁에서 낙오되어 사라질 것 같았던 야만인 소녀는 정말 강하고 사악했는데?! 아름답고 가련한 '마왕(魔王)'과 그 마왕을 사랑하고 만 '대마왕(大魔王)'의 사극 로맨스 스릴러.(실제 역사와 아무런 상관없는 중세시대 사극물입니다. )

 
17.야낙 vs 서 재인.
작성일 : 17-07-19 18:52     조회 : 287     추천 : 0     분량 : 1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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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뒤.

 

 ‘衍惠宮(연혜궁)’

 

 “넘칠 연, 은혜 혜, 집 궁.... 은혜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궁이라.”

 

 이 왕성은 유독 ‘혜(惠)’자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몽혜당부터, 여기 연혜궁까지. 모두 그 이름에 혜가 들어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소 은혜를 받았단 뜻을 가져, 첫인상부터 거만한 느낌을 주었던 몽혜당과 달리 연혜궁은 이름부터 사뭇 밝고 사랑스런 느낌을 주었다.

 

 달리 해석하자면, 은혜의 집, 사랑의 집도 되는 게 아닌가.

 

 ‘궁이라는 데가 고아원도 아니고 무슨.’

 

 반어적인 표현을 쓴 건지, 아니면 정말 이름대로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데인지는 감히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 밝아 오그라들기까지 하는 이름 앞에 가마를 타고 궁에 도착하는 대로, 현판부터 읽어본 야낙이 낮게 인상을 찌푸렸다.

 

 “낭랑, 당도하였나이다. 여기가....”

 

 “연혜궁이라고. 알겠네.”

 

 곁에서 조용히 안내하는 상궁의 말을 자르며 가마에서 내리는 야낙의 눈가에는 무미건조함과 따분함이 가득 차 있었다. 유치찬란한 궁의 이름은 그냥 넘겨짚더라도.

 

 “.....조용하군. 알아서 가라는 건가?”

 

 입궁 첫날부터 느낀 바였지만 자신은 정말 여기서 환대받는 존재는 아닌듯했다. 마중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크고 화려한 궁의 입구에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처소까지 안내해줄 아랫것들이라도 나올 줄 알았더니. 하례식도 생략되었지, 보통 첩지를 받은 후궁은 첫날 왕후께 인사를 올려야했는데 아까 물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필요조차 없다고 했다.

 

 웃전부터 대놓고 이런 취급인데, 아랫것들이라고 뭐가 다를까.

 

 

 누구라도 불쾌하게 여길법한 상황이었다. 벌써부터 감정적인 마나부터 입술을 씰룩이며 불쾌해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제일 마음 상해야 하는 야낙만은 태연하게 하품이나 하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궁주 되시는 마마께 인사라도 올리고 싶은데. 오늘은 안 된다고?”

 

 “송구하옵니다, 낭랑. 궁주이신 숙비마마께선 소생으로 5왕자 저하가 계시는데, 지금 왕자 저하께서 몹시 편찮으신 터라.... 모후로서 간호를 해야 한다면서 인사는 뒤로 미루기로 하였나이다.”

 

 “그 다음 어른이 되는 마마는?”

 

 “아.. 그게 아까 들어온 전갈이옵니다만, 공빈 마마께서도 편찮으시다고 인사는 나중에 받겠다하였습니다.”

 

 그것 참 고상하고 그럴듯한 핑계로군.

 

 속으로 차갑게 빈정대며, 야낙이 잠시 궁 주변을 관찰하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흘겼다. 입구 바로 앞에 있다 보니 근처의 인기척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심어놓는 듯했다. 얼굴은 마주하고 싶진 않지만, 나에 대해선 알아야겠다는 건가?

 

 ‘염탐꾼....이나. 그러기엔 솜씨가 서툰데.’

 

 저 멀리서 눈치를 보며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 자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대놓고 수상한 냄새가 났지만, 일단 눈치 채지 못한 척 다시 상궁에게로 눈길을 준 야낙이 또다시 질문을 놓는다.

 

 “다른 웃전들도 마찬가지느냐?”

 

 “오늘 재인 낭랑께서 미인 낭랑께 인사를 올린다하였는데.....”

 

 “그래?”

 

 연혜궁에 어떤 후궁들이 사는 지 아직 제대로 아는 정보는 없었다. 일단, 상궁에게 들은 것 정도만 재빨리 머릿속에 정리해 입력해놓은 그녀가 이윽고 입구 쪽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자.

 

 드디어, 아까부터 눈치만 보던 사람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미인의 일행 앞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염탐꾼으로 추정되던 여자는 차림새가 자신의 시녀와 다를 게 없는 걸 보니 누군가의 본방나인인 듯했다.

 

 “무례하다! 너는 누구냐!”

 

 기별도 없이 갑자기 등장하고 나선 나인에게 상궁이 바로 위엄을 보이며 꾸짖고 있었다. 어딘가 많이 능글 맞아 보이는 여자였다.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장년이었고. 허리를 꾸벅 숙이며 별다른 말도 없이 야낙의 앞으로 서찰 하나만을 내밀던 나인이 눈을 껌벅인다.

 

 “.........”

 

 입구에 들어가기도 전에,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염탐꾼이 있을 리 없었다. 일단 서찰은 받아만 주었지만, 그걸 뜯지는 않고 자신만을 노려보는 미인에게로 그녀가 비로소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자신의 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인 낭랑,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금안전의 본방나인 유가 명옥이라 하옵니다.”

 

 “금안전이라 함은?”

 

 “재인 낭랑이 거처하는 곳이옵니다. 연혜궁 동쪽에 위치한 전각이온데.....”

 

 “아아, 그렇담 재인의 혼수시녀가 되는 자로군. 내게 주인의 전언을 전하러 온 거겠군. 그래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던 거였어.”

 

 “..........”

 

 길게 설명하려는 상궁의 말을 대뜸 자르며, 야낙이 서찰을 뜯자 명옥이 곧 긴장하고 있었다. 예정에도 없던 일이 갑자기 일어나자, 제조상궁을 위시한 다른 궁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지만, 전혀 아랑곳 않고 내용을 죽 읽던 그녀가 곧 기가 막히다는 듯 어느 새 피식 웃어버렸다.

 

 단 몇 줄밖에 되지 않는 글이었지만, 서찰을 썼을 사람의 학문적인 소양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글씨부터가 개발새발인 것이 무슨 암호문을 보는 것 같았다.

 

 “하아....”

 

 아니, 자세히 보니 악필은 문제 축에도 끼지 않았다. 기본적인 한자도 뭐라 써야할지 몰라서 몇 번 지우고 쓴데다, 문법이고 맞춤법이고 안 틀린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간단하게 해석해서 읽는 데만 대략 몇 분 정도 소요될 지경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시녀 시켜서 말로 전할 것이지. 뭐 하러 서찰을 쓴 거야?’

 

 울컥 짜증이 났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다 읽은 서찰을 고이 접어든 야낙이 간신히 미소를 지어 올렸다.

 

 “인사는 올리고 싶은데 사정이 생겨서 직접 찾아갈 수 없으니 나더러 금안전에 와 달라는 얘기로군. 인사를 받고 싶으면 직접 와 달라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니 뭐 그런.”

 

 “시끄럽다, 마나!”

 

 내용을 종합하면 결국 ‘누워서 절 받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원래는 인사를 올리는 사람이 먼저 찾아가는 것이 법도인 데, 재인은 사정이 생겼으니 이것을 뒤집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놓고 무례를 범하려는 재인의 태도에 마나가 벌써 화를 내며 목청을 높이고 있었지만.

 

 “감히 어디서....”

 

 “죄, 죄송합니다. 낭랑.”

 

 마나에게 살의를 보이며 사납게 다그치는 야낙의 서슬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렀다.

 

 “정말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미인 낭랑. 하지만, 저희 재인 낭랑도 사정이 있는 지라.”

 

 명옥도 이것이 무례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키도 무척 크고 인상부터 싸늘해 보이는 저 야만인이 어찌 나올까 초조했던 거다. 잠시 숨을 고르며 표정을 고치던 그녀가 곧 명옥에게로 시선을 내리깐다.

 

 “금안전으로 안내해줄 수 있겠느냐?”

 “네?”

 

 “배정된 내 처소로 가기 전에, 네 주인을 만나고 싶다 이 말이야. 이것이 예법에 맞는 일인지 아닌 지를 떠나서, 궁금해졌구나. 재인이란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

 

 “.....네, 낭랑.”

 

 “하오나.”

 

 일정과는 달리 행동하려는 미인에게 상궁이 바로 딴지를 걸려고 하자, 야낙이 먼저 선수를 쳐 그녀의 말을 가로 막아버린다.

 

 “어차피 두 웃전모두 인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니, 그 일정 대신으로 재인을 만나고자 하는데 문제될 것이 있겠소? 배정받은 처소는 그 뒤에 가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

 

 “........”

 

 그렇게 상궁을 가볍게 따돌린 야낙이 바로 명옥을 따라 연혜궁 안으로 걸음하자, 바로 그 뒤를 따르는 두 시녀들이다. 미인이 처소에 자리 잡을 때까지 그녀를 수행해야하는 명을 받은 제조상궁으로선 망연자실하게 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

 

 

 

 

 -연혜궁의 동쪽, 금안전.

 

 미인이 연혜궁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겨우 귀인에게서 탈출한 재인이 식은땀을 훔치며 서둘러 처소로 향해가고 있었다. 모두와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는 그녀로선, 제일 기피되는 오아 귀인과도 좋든 싫든 말상대나 되어주며 가까이 지내야했는데.... 귀인은 오로지 자기 할 말만 하는 유형이라.

 

 “아우.”

 

 말이라도 재밌게 하면 모를까. 어조며 말투며 고리타분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서, 오늘도 신과 자연에 대한 기나 긴 설교를 들고 오는 서재인의 얼굴은 피곤기가 가득했다. 장장 2시간이나 들어주고 오는 길이다. 오늘은 그래도 짧게 끝난 편이었지만, 걸어가는 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재인의 표정은 무척이나 짜증나 보였다.

 

 사람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 까마귀 귀인에 이어, 이번엔 성정 사납기로 유명한 야만인 미인과 상대해야 했으니 기분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루 연달아 어려운 상대와 사교활동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신물이 나는 모양인지. 목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어먹은 재인이 처소 밖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본방나인에게 대뜸 화부터 내버렸다.

 

 “야, 미인이 오긴 왔냐?”

 

 “낭랑, 이제 오셨습니까! 네네, 와 계십니다.”

 

 “준비한 건?”

 

 “다과상이며 뭐며 다 준비해놓았어요. 그보다 미인께선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쯧. 사람 쉴 틈도 안주고 말야.”

 

 응접실을 앞에 두고, 거울을 꺼내들며 자신의 용모를 다시 한 번 살피던 재인이 다시금 숨을 들이킨다. 그러다 준비가 끝났는 지 곧.

 

 “고해라.”

 

 문을 지키는 나인들에게 긴장하며 명령을 내리는 그녀였다. 나인들이 다소곳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다.

 

 “미인 낭랑, 재인께서 오셨사옵니다.”

 

 “오, 들라 해라.”

 

 실내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의외로 나직하고도 조곤조곤한 어조였다. 서재인이 어이없다는 듯 속으로 헛웃음을 삼킨다.

 

 ‘들라 해라? 참나, 나보다 한 품계 위라고 벌써부터 웃전 행세하네? 야만인이 웃기지도 않게.’

 

 드르륵!

 

 문이 열리고.

 

 “!!!!!!!!!!!”

 

 상냥하게 웃으며 응접실 내부로 들어오던 서재인이 곧 놀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의 처소에 배치된 곳인 익숙한 응접실이 이렇게까지 낯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석에 앉아 두 시녀를 곁에 대동한 채 거만하게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야낙의 모습은 압도적으로 위엄 있었고 당당했다. 왠지 왕좌에 앉은 군주와도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말이다.

 

 “그대가 서재인이오?”

 

 “...........”

 

 “재인 낭랑, 주인님께서 하문하십니다.”

 

 “아...그....”

 

 바보같이 첫 대면부터 기세에 눌려 말부터 더듬고 마는 그녀였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곧 다시 표정을 고친 서재인이 얼른 예법에 따라 먼저 절부터 올린다.

 

 ‘뭐지, 뭐야?’

 

 식인까지 한다는 막나가는 야만인 일족 태생에, 무례 좀 범했다고 나인들에게 고문을 가할 정도로 성격파탄자이면 그 첫인상부터 무시무시한 도깨비처럼 생겼을 거라 생각했던 서재인이었다. 하지만, 야인족의 여자는 의외로 ‘도깨비’같은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다.

 

 아니, 생긴 것만큼은 멀쩡한 사람 같았다. 단지 엄청난 장신이라는 것과 생각보다 반반한 외모를 하고 있다는 게 좀 신기했을 뿐이지.

 

 그래도 뭔가 잘생겼단 표현이 더 어울리는 여자였다. 그러면서도 압도적이고 으스스한 위엄을 보이는 것이, 그녀는 지금 재인에게 그녀 자신만의 기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

 

 ‘....벼락출세한 오랑캐 주제에 첫 인상 한 번 강렬하네.’

 

 야낙이 풍기는 분위기에 휘말려 긴장부터 하고 말았지만, 절을 올리고 슬며시 야낙에게로 시선을 준 재인이 곧 노련하게 활짝 접대용 미소를 지어 올렸다. 아까 말을 더듬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입술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첫 인사 올립니다. 빈첩은 금안전의 서재인이라 하옵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갈마 미인 낭랑.”

 

 “..........”

 

 서재인과 야낙의 시선이 맞부딪히는 순간이다.

 

 씨이익!

 

 미인이 자신을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자 재인이 곧 여유를 가지며 더더욱 환히 웃어보였다.

 

  자고로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했다. 박색은 면한 얼굴이라 해도, 미소와 보조개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아 왔기 때문에 나름 자신도 있었고.

 

 이래봬도 이 보조개 핀 웃음은 폐하조차 귀엽다 감탄하신 것이었다.

 

  제 아무리 냉혈한 야만인이라고 경계를 풀지 않을 리가....

 

 “그게 궁중의 사과방식입니까?”

 

 응, 없었다.

 

 “네?”

 

 대뜸 인사부터 무시당한 기분이라 재인이 그만 미소를 거두고 정색하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를 욕보이려는 의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가만히 재인만을 노려보던 야낙이 보다 조곤조곤한 어조로 잘못을 지적한다.

 

 “서 재인, 나는 당신의 청을 받아들여 여기에 왔습니다.”

 

 “아!”

 

 “특별한 사유도 없이 한 시진이나 기다렸지요.”

 

 아 맞다, 그랬지.

 

 “그그그!”

 

 제 2차 당황이 엄습했다. 그 바람에 말을 또 더듬어버렸고.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급하게 오느라, 거기다 첫대면부터 기가 눌리는 바람에... 그만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먹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저 야만인은 자신보다 한 품계 더 위인 ‘미인’의 첩지를 받은 자였다. 엄연히 자신의 ‘웃전’에 해당됐고.

 

 웃전에게 오라 가라 청을 올린 것부터 큰 실례였는데(그것도 서찰로), 자신은 오자마자 사과부터 안하고 웃는 식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시늉을 했으니...

 

 .......그러고 보면, 저 야만인은 예법에 대해 제법 능통하다고 했다. 뭣도 모르고 덤볐다가 골로 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정보도 있었는데.

 

 ‘낭패로군.’

 

 상황부터 수습하고 싶었는지 그녀가 곧 울상을 짓는 척 눈물샘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곤란한 사태에 직면할 때마다 울면서 용서를 비는 작전을 써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작전만큼 잘 먹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아흑! 대단히 송구...”

 

 “앉으세요.”

 

 ‘에?’

 

 본격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올리려던 재인이 순간 또 멈칫하고 말았다. 미인이 너무도 간단하게 자신의 작전을 저지하려 했으니까 말이다.

 

 이미 재인이 뭔 짓을 하려는 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무표정한 야낙의 눈빛에는 권태로움마저 담겨져 있었다.

 

 “앉으라했습니다. 재인께서도 분명 사정이 있었을 텐데 내가 뭐라고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아,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웃는 것도 실패해 우는 것도 실패해.

 

 날카롭게 잘못을 추궁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미인이 자신의 잘못을 너무 싱겁게 묻어버리자 재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되는 바람에 표정 또한 엉망이 되었고 말이다.

 

 거기다

 

 딸각.

 

 “?”

 

 재인이 자리에 앉자마, 야낙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아까 따라놓은 차를 내밀었다. 상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경계하자, 태연하게 먼저 차를 마신 그녀가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도(茶道)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뜨거운 물을 마시다보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오자마자 당황하고 웃고 울고. 재인처럼 감정이 다채로운 사람은 처음 보는 군요. 몇 분 전에도 3가지 이상의 감정을 선보이고 말입니다. 저는 놀랍더군요.”

 

 “!”

 

 “분노, 성가심, 짜증.”

 

 경계하며 찻잔을 올리지 않던 재인이 뜨금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미리 따라놓은 차라 뜨뜻미지근하니 마시기 수월하실 겁니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마음의 평정을 도모하시지요.”

 

 “.......하..하하.”

 

 “그리고 눈물을 끌어올리고 싶으면 슬픈 생각을 하며 감정을 잡는 것이 좀 더 효율적입니다. 재인,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지 마세요. 위험하잖아요.”

 

 

 “하...하하하 그게 무슨 소리신지 저로선 잘....”

 

 아까 허리를 숙이는 척 재빨리 눈가로 손가락을 넣으며 눈물을 빼려던 그녀였다. 이것도 나름 안 보이게끔 굉장히 능숙하게 해치웠다 생각했는데.... 심지어 아까 명옥에게 분풀이를 했던 것부터 이미 다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자연스럽게 수치로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지만, 끝까지 모른 척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그녀였다. 어쨌든

  참고 또 참는 거다. 저런 여자하고도 친해져야하는 게 자신의 책무였으니 말이다.

 

 딸각.

 

 차를 다 마셨는 지, 빈 잔을 도로 올려놓던 야낙이 어느새 아까와 같은 위엄을 내려놓고 있었다. 분위기가 좀 더 편안해지자 재인도 조금 긴장을 내려놓으며 아까의 실수를 잊고 다음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 그렇담 제 오해였나 보군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재인. 난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주의라.... 가끔 이런 내 성정이 다른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죠. 첫 대면부터 실례했습니다.”

 

 “아휴, 아닙니다. 미인 낭랑. 저야말로 감히 웃전께 서찰로 처소에 와 달라 청하지 않았습니까. 본디 제가 입구에서 낭랑을 맞이하려 했는데 급히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아까 같은 상황이야 어쨌든 적어도 분위기가 좋게 좋게 흘러가려는 조짐이 보이자 서재인이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대화하는 데, 미인의 곁에 서 있는 저 뒤숭숭한 느낌의 두 시녀가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헤, 주인만큼이나 기분 나쁜 느낌의 몸종들이네.’

 

 그 주인에 그 시녀 아니랄까봐. 미인의 양 옆을 지키는 저 본방나인들은 주인 못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멀대 같이 큰 키에 체격마저 빼빼마른 시녀는 차갑고 과묵한 느낌이었고, 대조적으로 수다스럽게 생긴 옆의 시녀는 통통한 체격에 둥글둥글한 외모를 가진 것이 제법 푸근한 인상이긴 했지만.,,,

 

 기분 탓인지 몰라도, 저 푸근해 보이는 시녀에게는 주인 못지않은 ‘귀기’가 느껴졌다. 거기다 아까부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게 기분이 더러워질 참이었는데.

 

 

 “마나, 란초이.”

 

 “네, 낭랑.”

 

 “너희들은 물러가 있어라. 재인과 편히 담소를 나누고 싶구나.”

 

 ‘에?’

 

 미인은 심지어 자신의 불편한 기색까지 읽어버린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자신의 얼굴만을 쳐다보던 미인이 너무도 간단히 시녀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재인은 결국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참, 마나!”

 

 “네? 낭랑.”

 

 “돌아올 때, ‘그것’도 챙겨 오거라.”

 

 “아아.. 네, 네!”

 

 ‘그것은 또 뭔데?’

 

 심지어 그냥 보내는 것도 아니고, 미인이 시녀에게 뭐라 분부를 내리자 재인이 결국 공포심을 느끼고 말았다. 그것마저 알아버린 모양이다. 야낙이 그녀에게 또 차를 따라주며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자꾸 실례를 범하는 군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재인. 저는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하는 법을 잘 몰라서.... 상대방에게 자꾸 공포만을 주는 군요.”

 

 ...이쯤 되면 소름이 끼쳤다. 처음 분위기부터 사람 기를 죽이더니, 이제는 기를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의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었으니까.

 

 “네?! 아, 하하하 자꾸 미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계속 능청을 피워보는 그녀였지만, 떨리는 손은 감출 수 없었다.

 

 설마, 독심술을 익힌 사람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상대방의 감정 정도야, 사람이 신경 좀 쓴다면 누구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거였다. 아까 자신이 스스로 눈을 찔렀던 것도 어느 정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눈치 챌 수도 있던 거였고 말이다.

 

 하지만 표현도 하지 않은 사람의 기색이나 속마음까지 단숨에 읽는 건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소 놀라워하며 서재인과 초조해하는 사이, 여유롭게 다른 간식을 집어먹던 야낙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며 조용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차 맛이 참 좋더군요. 저로서는 처음 맛보는 것인데 어떤 찻잎을 쓴 겁니까?”

 

 “말린 국화꽃잎을 차로 끓인 겁니다. 이, 이맘때 국화차를 자주 마, 마시곤 하죠. 하, 하... 햐, 향이 참 좋죠?”

 

 “음 향기롭네요. 제 고향에는 차로 끓일 풀이든 꽃이든 나지 않는데. 신선한 경험이로군요.”

 

 “호호호..... 그, 그러십니까?”

 

 야낙과 단 둘만 남게 되었지만, 무서워도 끝까지 웃는 낯을 버리지 않는 그녀였다. 본래 미인에 대한 이모저모를 캐려고 자신의 처소에 미인을 끌어들인 거였으니 말이다. 벌써부터 후회가 들고 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처세에 능하고 똑똑하다 생각하는 전형적인 멍청이인 것 같은데... 음 집안에 돈 좀 있나 보군. 지갑으로 삼아 볼 만한데..... 작업 좀 쳐 볼까.’

 

 한 편, 여유롭게 국화차를 마시며 재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야낙이었다. 재인을 떠보면서 그녀의 기량을 재보는 건 이미 끝났으니 말이다. 재인의 화려한 옷차림과, 화장. 그녀가 찬 비싼 장신구에게 짧게 시선을 준 그녀가 어느 덧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 미인 낭랑. 이번에 미인이 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낭랑께 드릴 약소한 선물이 하나 있사온데.”

 

 재인이 잠시 선물을 꺼내기 위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 사이에, 야낙이 자신이 찬 팔찌 하나를 조용히 쓰다듬고 있었다. 갖은 보옥으로 만든 그 팔찌는, 자신이 입궁 하기 전에 왕후 폐하께서 하사하는 예물 중 하나였다. 얼마 전, 첩지를 받을 때 같이 차고 있던 것이었고 말이다.

 

 “약소한 선물이라니.....”

 

 선물을 주겠단 재인의 말에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는 그녀였다. 이건 기쁜 척이 아니었다. 정말로 기뻤으니까.

 

 "후후후."

 

 팔찌를 장식한 보옥들을 하나하나 훑으면서 어느덧 팔찌의 끈에까지 부드럽게 손을 대는 야낙의 눈동자로 ‘사악함’이 감돌고 있었다. 제 아무리 집안에 돈 좀 있는 부잣집 아가씨라도.... 왕후 폐하께서 하사하신 보옥 팔찌는 어디서 ‘못’ 구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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