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의 오라버니인 이드리스 그란디아는 가출한 이후 황태자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제이스가 이런 물밑작업까지 해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엘레나는 허탈감에 실없이 웃음을 흘리며 이든의 뒤를 따랐다. 이든은 자신의 집무실로 엘레나를 안내했다. 엘레나는 이든과 마주보고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아들었다.
“음, 그러니까 엘레나?”
“네. 오라버니.”
소름 돋는 걸 무시한 채 얌전한 영애 노릇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엘레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안고 그린 듯한 미소를 띄웠다. 처음 보는 오라버니의 앞에서 추태를 부린 건 벽에 머리를 처박은 걸로도 충분했다.
“제이스 전하가 좀 제멋대로긴 하셔도 영 생각 없는 분은 아니셔.”
“……알아요. 그런 것 같았거든요.”
그 뺀질거리는 얼굴을 떠올리니 또 울컥했다. 윌리엄이 조금만 더 괜찮은 사람이었어도 그냥 다 엎어버리는 건데. 엘레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겉으로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15년 만에 처음 만난 동생이 어색하긴 마찬가지인지 이든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굴렸다.
“부모님은 잘 계시니?”
“그럭저럭 괜찮으세요.”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이든이 종종 아버지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는 잘 모르겠지만. 엘레나로써는 난생 처음 보는 오라버니가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게 굉장히 낯설었다.
“진작 너를 만나봤어야 하는 건데. 미안하구나.”
“저는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엘레나의 말에 이든의 입매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모습은 어느 날에 보았던 아버지의 웃음과도 겹쳐졌다. 점점 엘레나의 어색함도 흐려져 갔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황태자 전하와 일하게 되신 건가요?”
“아버지께서 다리를 놔주셨어.”
역시 그렇구나.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의 잿빛 눈동자가 엘레나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엘레나의 눈매가 곱게 접혔다.
“네가 싫지 않다면 종종 이렇게 만날 수 있을까?”
엘레나는 이든을 보며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이든도 엘레나의 가족이었다.
“물론이예요, 오라버니.”
이든은 아직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가 달라지셨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해봤지만 껄끄러운 감정을 모두 털어내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이든과 조금 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 엘레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을 황궁에서 보냈다.
어느덧 중앙에 떠있던 태양이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엘레나는 황궁에서 나와 오랜 시간동안 세워둔 그란디아 가의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세워둔 마차가 눈에 보이자 엘레나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엘레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이상한데…….
순간이지만 황궁의 모습이 희뿌옇게 보였다. 들어갈 때 전혀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도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왠지 드욘 숲에서 보았던 마법진과 유사한 느낌도 들었다.
설마 리오인가? 그럴 리가 없지. 리오가 황궁에 갈 이유가 없지 않나?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황궁 안에 다른 마법사라도 있는 모양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엘레나는 마차에 올랐다.
*
백작가로 돌아온 엘레나는 오랜만에 노아와 함께 수다를 떨었다. 노아의 일방적인 백작가 생활을 들어준 것뿐이지만 황태자와 보낸 시간보다 훨씬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엘레나는 노아를 통해 듀랜트 경과 오렌의 최근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 피곤해 죽을 것 같다고 놀아주지도 않아요.”
불만 가득한 노아의 얼굴에서 서운함을 찾아낸 엘레나는 노아를 다독여주었다.
“너도 기사수업을 같이 받아보면 어떠니?”
그 방향이 노아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노아는 과장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번에 크로우 경이 그랬어요. 너는 무기를 쥐는 것보다 도망치는 걸 연습하는 게 훨씬 빠르겠다고요.”
“……그거 지독한 평가네.”
제 앞에선 허허거리며 웃기 바빴던 크로우 경이 이렇게 어린 아이에게 독설을 할 줄이야. 매번 비슷한 소리를 들어왔다면 노아가 저렇게 질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엘레나는 노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음에 크로우 경을 만나면 한소리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노아에게도 물어볼 것이 있었지.
“그런데 노아. 너 드욘 숲에 대해 아는 게 있니?”
드욘 숲으로 출발하기 전 이상했던 노아의 행동을 떠올린 엘레나가 문득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별 뜻 없이 던진 물음은 노아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불러일으킨 듯 했다.
“…….”
순식간에 변한 노아의 안색을 보며 뒤늦게 깨달은 엘레나가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차라리 오렌에게 물어볼 걸.
“노아, 미안해. 누나가 실수 했으니까 그냥 잊어버려.”
고개를 푹 숙인 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이런 쪽은 영 서툴러서 감도 잡히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리던 엘레나는 일단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엔 묵직한 의자가 뒤로 물러나는 소리만 들려왔다. 엘레나는 그 자리에서 쭈뼛대다 노아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곧 사라질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그 곳에서 실종되셨대요.”
아, 젠장. 엘레나는 세심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노아를 덥석 끌어안았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노아. 누나가 아버지 소식을 알아볼까?”
“괜찮아요.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인걸요. 형도 그만 포기하는 게 좋다고 했어요.”
괜찮다고 말을 하는 노아가 기특해서 엘레나는 노아의 등을 토닥거렸다. 엘레나의 품 안에서 따듯한 온기가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불편함을 느낀 노아가 꼼지락대자 엘레나는 미소를 띠며 노아를 놓아주었다. 노아는 겸연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제 발끝을 꼬물거리며 움직이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종이뭉치들을 꺼내놓았다.
“참, 누나 이거 집사님이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
“제롬이? 뭔데?”
이만 돌아가봐야겠다는 노아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건 편지뭉치였다. 일거리네. 곧바로 흥미를 잃은 엘레나가 구석으로 밀쳐두었다. 노아는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엘레나에게 한쪽 팔을 들어 힘차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봤자 한 식구니 마주칠 일이 많을 텐데도.
“가져다줘서 고마워, 노아. 언제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와.”
“네!”
노아의 맑은 웃음이 그간 했던 엘레나의 복잡한 생각들을 모두 날려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덤으로 노아 같은 동생도 있었으면 좋겠다. 엘레나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창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버지도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걸 보면 엘레나가 이대로 얌전히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라버니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복잡해지진 않았을 텐데. 황궁에서 일하고 있을 게 뭐람. 언제부터 어디까지 내다보시고 오라버니를 황궁에 밀어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도 있었다. 황궁은 죽어도 싫다는 엘레나에게 아버지는 네가 바라는 쪽으로 해결될 거라고 말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당시엔 흘려들은 말이었다.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엘레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눈을 내리깐 엘레나는 한 쪽 구석에 던져놓은 편지 봉투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두툼한 봉투들은 얌전히 엘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투들 중에 유난히 낡은 봉투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이런 게 있을 이유가 없는데, 쓰레기가 섞여 들어갔나? 엘레나는 팔을 뻗어 낡은 봉투만 쏙 끄집어냈다.
색이 바랜 종이봉투는 굉장히 얇았다. 다른 누군가의 편지가 잘못 섞여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엘레나는 봉투를 뒤집어보았다.
“뭐야? 왜 이래?”
봉투에 풀이 부실하게 붙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엘레나가 손으로 집어든 봉투에서 내용물이 툭 떨어져 나왔다. 엘레나는 테이블 밑으로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자연스레 엘레나의 눈이 까만 글자들을 향해갔다. 종이의 단면에는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너는 5대 로이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엘레나의 한쪽 입 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누가 이런 저급한 장난을. 리오와 계속 붙어있었더니 이런 편지도 받아보네. 엘레나는 종이를 형체 없이 찢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 기억 속에서 지나간 광경에 멈칫하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ㅡ 상관없어?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그 때 엘레나는 리오에게 상관없다고 말했다. 기억 속의 리오는 달라지지 않으니, 자신에게 리오는 유일하게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엘레나의 손아래에서 종이가 바스라졌다. 리오가 파티장에서 일으킨 사건 이후 엘레나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봤자 얼마나 했겠어? 그런 생각으로 적당히 덮어두었던 의문들은 자그마한 요인에도 쉽게 수면위로 올라왔다.
ㅡ 너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없었어.
ㅡ 마탑에서 같이 살 때부터 쭉 너를 좋아했어.
ㅡ 내가 왜 너를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해?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우선 엘레나는 이 장난을 시작한 사람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누구의 짓인지 알아야 이야기를 들어보든 박살을 내주든 할 게 아닌가.
대체 누가, 왜 이런 편지를 보내온 걸까. 엘레나는 대충 보고 넘겨버렸던 종이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시건방진 문구 밑에는 희미하게 이니셜이 적혀있었다.
K
엘레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름에 K가 들어가는 사람이라. 수많은 후보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후보 목록이 현재 알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 점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자 엘레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방법으론 안 되겠다.
얇고 수상한 봉투 하나는 집사의 손에서 걸러지지 않았으며, 그란디아 가에서 교육을 받은 노아에게도 전혀 의심을 사지 않았다. 엘레나가 생각하기에 이 봉투를 두 사람 모두 보지 못할 확률은 굉장히 낮았다. 하물며 상대가 제롬이니…….
어쨌든 이렇게 엘레나에게 무사히 전달되어 온 걸 보면 심상치 않은 편지였다. 그렇다면 발신자는 혼동마법을 걸 수 있는 마법사일 확률이 높다. 너무 비약이 심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엘레나의 기억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돼.
엘레나는 제 생각을 부정할 증거를 찾기 위해 급히 구석에 밀어두었던 겉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동시에 엘레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ㅡ 엘리제에게
과거의 이름이 나온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엘레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혼동마법이 특기였던 카르나 로이스. 스승님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