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거짓을 말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순간, 리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엘레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
엘레나는 다행이라거나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다.
“리오, 나에겐 시간이 필요해.”
“그래.”
리오는 엘레나의 귀밑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그렇게 대답했다. 혼란스러운 엘레나의 심정과 달리 리오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깊게 가라앉은 붉은 눈은 이상하게도 끓어 넘치기 직전처럼 보이기도 했다.
“네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언제나 곁에 있을 거야, 엘.”
리오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엘레나는 리오를 뒤로 한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엘레나가 직접 알아본 바로는 리오의 말이 맞았다. 에르난 백작님은 다행스럽게도 천장에서 떨어지는 샹들리에를 보고 피했다고 했다.
오른쪽 팔 하나가 다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엘레나는 크게 안도했다. 사고에 휘말린 열 명 남짓한 사람들도 큰 부상이 없었다는 소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급작스러운 사고로 마무리 된 테르드 후작영애의 생일 파티는 결국 망했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끝까지 수습해보려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사고 후에 계속 파티 분위기를 이어나가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엘레나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고 소식에 주인공인 테르드 후작영애보다 윌리엄이 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었다고 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라니 후작영애의 생일을 핑계 삼아 제 지분을 다져보려 했던 모양이었다.
장자이지만 권력구도에서 밀린 윌리엄 황자는 곧 다가올 황태자 제이스의 생일을 의식한 듯 했다. 지금 현 국왕인 파비우스의 병색이 짙다고 하니 급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찜찜한 사교계 데뷔 후, 몇 번 엘레나에게 파티 초대장이 오긴 했었다. 하지만 불유쾌한 기억 때문에 내키지 않았던 엘레나는 모든 초대를 거절했다. 어느 파티에 가든 자연스럽게 리오가 떠오를 것 같았다.
엘레나는 아직 리오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리오가 제 뒤를 몰래 따라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아가씨, 이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 가져왔어요.”
“거기 두고 나가.”
두 손 가득 우편물을 가져온 에바는 테이블 위에 종이뭉치를 올려두었다. 에바가 가져온 일거리에 창가를 응시하던 엘레나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엘레나가 테이블 옆의 의자를 빼내 그 자리에 앉았다. 의도치 않게 집에 틀어박힌 엘레나는 그동안 착실하게 일을 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그윈이라는 이름을 가진 상단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마법약과 마법 물품 제조에 뛰어들었다. 공격적인 행보에 아버지와 듀랜트 경, 오렌과 노아까지 이유를 물어왔지만 엘레나는 딱히 뭐라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머리가 복잡했고, 머리를 비우기 위해선 일을 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참, 아가씨. 여기 이 초대장은 꼭 보시고 답장을 쓰셔야 해요.”
“초대장?”
초대장은 다 거절해두라고 말했었는데. 못마땅한 표정으로 본 봉투는 절대 거절하지 못할 초대장이라는 걸 온 몸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붉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휘황찬란한 초대장의 앞에는 사자모양의 레아르드 제국 인장이 찍혀있었다.
“불쏘시개로 쓰면 딱 좋게 생겼네.”
이 시기에 엘레나에게 올 초대장은 딱 하나 뿐이다. 봉투를 뒤집어 본 엘레나는 아래에 멋들어지게 적힌 제이스 레아르드의 서명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 아가씨. 무슨 소리세요? 황태자 전하의 탄신 기념 파티인데 꼭 가셔야지요.”
“에바, 말이 된다고 생각해? 명색이 황태자비 내정자인데 나는 그놈의 황태자를 본 적도 없어. 황제폐하는 물론이고.”
엘레나가 굳이 테르드 영애의 생일파티에 간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다른 황족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말이다. 결국 윌리엄 황자 하나밖에 보지 못했지만.
“확실히 이상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꼭 뵙게 될 거예요.”
에바, 넌 낙천적이라 좋겠다. 엘레나는 속으로 그런 말을 삼켰다. 지금은 모든 것이 내키지 않았다. 엘레나는 조용히 집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여태껏 그랬듯 엘레나의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엘레나는 황금빛으로 도배된 내궁에서 벗어났다. 제이스의 얼굴을 보겠다고 미적대다 웬 머저리 같은 놈을 만나 시간만 낭비했다. 내 앞에서 엘리제 오데이른을 험담해?
“빌어먹을. 그게 바로 나다 이 자식아!”
얼마 전, 오데이른을 험담하던 영애들에게 괜한 심통을 부린 뒤로 엘레나 그란디아가 오데이른 가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비딱하게 쏘아붙여서 그런지 제법 흥미 있는 소문으로 퍼져나간 것 같았다. 더불어 그란디아 가의 영애가 이상하다는 소문도 더욱 널리 퍼졌다. 아직 모르는 사람도 많아 보인다는 게 문제지만.
엘레나의 구두 끝에 차인 작은 돌멩이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황태자의 탄신 기념 사교파티라니 알 게 뭔가. 지금 중요한 건 엘레나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러게 내가 오데이른의 팬이란 걸 먼저 알았어야지.”
엘레나는 혼잣말을 하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는 사치보다 자신의 홍보에 더 돈을 투자해야 할 판이었다. 엘레나는 그렇지 않아도 더해진 유명세에 황태자비 내정이라는 아주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붙여준 제이스가 굉장히 못마땅했다. 암살길드에 의뢰를 할까? 아니면 직접……. 걸어가던 엘레나가 우뚝 멈췄다.
“정말 처리해 버릴까?”
암살 길드는 못미덥고 엘레나에겐 사람이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는 마법약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리오의 생각이 났다.
리오도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왜 그랬는지 묻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후에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거의 확실했다. 자신의 문제로 거슬렸겠지. 그러니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리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게 엘레나가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는지 리오를 떠올리자마자 본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느새 내궁을 모두 벗어난 엘레나의 앞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리오가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있던 걸 보니 제법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것 같았다.
“제이스 레아르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리오는 엘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유추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엘레나는 대답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이럴 줄 알고 추적마법을 걸어뒀거든.”
뭐야, 이제 막나가는 건가. 엘레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디에?”
“내가 준 마법 주머니.”
아, 돈을 가득 넣어준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러면 엘레나가 마법 주머니를 떼어놓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리오는 이상할 만큼 엘레나의 행동패턴을 잘 맞추곤 했다.
“같이 나갈까?”
궁 밖을 탈출하려던 엘레나의 계획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너도 손님 아니야?”
“상관없어. 너를 만났으니까.”
모르겠다. 어차피 늦은 건 황태자다. 엘레나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리오가 내민 손을 잡았다. 늦을 거라면 미리 미래의 파트너에게 언질정도는 줬어야지. 엘레나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 아버지의 근심이고 뭐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는 자신을 온 세상을 보듯 하는 리오가 있었고, 리오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있었다.
“엘, 어디로 갈까?”
붉은 눈동자에 홀려버리기라도 한 걸까. 엘레나의 머릿속에는 딱 한군데의 장소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위드모어.”
의외라는 표정이던 리오는 곧 엘레나의 허리를 당겨 감싸 안았다. 엘레나도 팔을 들어 리오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잠시 흠칫했던 리오는 이내 엘레나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덮어 올려놓았다. 그리고 따스한 바람이 온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귓가를 간질이는 새 소리가 지금 엘레나가 있는 장소를 제일 먼저 알려주었다. 무사히 이동했다는 것을 깨달은 엘레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보고 싶었어?”
위드모어를 이야기하는지, 리오를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엘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리오는 자신이 보고 싶었냐고 물었던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리오의 손을 덥석 잡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붕이 있는 곳 아무데나 가서 이야기 좀 해.”
“마탑으로 갈까?”
엘레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왜 하필 마탑이야? 생각나는 대로 위드모어를 내뱉긴 했지만 마탑은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거긴 빼놓고.”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두 사람이 이동한 곳은 위드모어의 유명 음식점이었다. 제 딴에는 이런 것이 생겼다며 신나서 소개를 해주는 것 같았지만 엘레나는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나는 달달한 디저트를 제외하곤 딱히 음식투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긴 마지막에 나오는 쿠키들이 맛있어.”
진작 이야기해주지. 곧바로 흥미가 생긴 엘레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육질의 고기가 씹혔다. 곁들인 샐러드도 나쁘지 않았다. 순식간에 메인 메뉴를 쿠키로 정해버린 엘레나는 부지런히 포크를 놀렸다. 리오는 그런 엘레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만 보고 너도 먹어.”
“그래도 돼?”
숨이 턱 막혔다. 체할 뻔했네. 리오를 보던 엘레나는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갑자기 너무 태도가 변했는데? 며칠 만에 나타난 리오는 미묘한 태도를 유지 중이었다. 평소라면 더 뻔뻔했을 텐데. 이러면 마음을 다잡은 보람이 없어지잖아. 엘레나는 포크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리오, 나는 널 추궁할 마음이 없어.”
“…….”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엘레나는 리오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마탑에서 함께 살다시피 할 때부터 리오에겐 엘리제가 하나뿐인 가족이자 친구였고, 엘리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사실은 시간이 지났다해도 없어지지 않는 불변의 진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계속 그런 시간들이 쌓여갔다면 다른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다.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상관없어?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엘레나는 반사적으로 드는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만약 자신이 리오의 마음을 받아준 상태였더라면 리오가 저렇게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레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리오의 기억은 멀쩡할 테니까.
“그래 상관없어. 내가 알던 리오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엘레나에게 있는 엘리제의 기억 속 리오는 달라지지 않는다. 리오의 고백 이후 엘레나는 리오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리오는 엘레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온전히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만약 리오와 마음을 나눈 사이였다면, 자신도 리오의 일에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해봤자 얼마나 했겠어? 그런 생각이 아예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리오를 믿었고, 또 믿고 싶었다.
“그렇다면…….”
“잠깐, 그 전에 앞으론 그런 미친 짓에 절대 마법 쓰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게 미친 짓이야?”
엘레나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리오가 그렇게 되물어왔다. 엘레나가 리오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알았어.”
알아들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리오가 더 이상의 이상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엘레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럼 엘, 대답 해줬으면 좋겠는데.”
“뭘?”
“내가 한 고백에 대해.”
아, 그런 게 있었지. 다른 복잡한 생각을 하느라 상대적으로 밀려난 일이었다. 어느새 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갑자기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엘레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라고 해야 하지? 며칠 동안 왜 저 고백의 답에 대해선 생각해 두지 않았지?
“아니면 다시 할까?”
“응?”
엘레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리오는 긴 손가락으로 엘레나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엘레나의 눈에 미소 짓는 리오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리오는 엘레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이 상황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을 때 리오는 엘레나의 콧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엘, 널 좋아해. 너도 내가 싫지 않은 거지?”
“…….”
어쩐지 리오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엘레나는 리오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애정표현을 할 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리오가 싫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이성간에 좋아한다라는 의미로 리오를 생각해 본 적이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엘레나는 짧은 시간 내에 납득할 수 있을만한 결론이 나오길 원했다.
“말해봐, 다음은 입술이야.”
고민에 빠진 엘레나를 보던 리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뻔뻔하게 뒷말을 붙였다.
“뭐…….”
리오의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의 시간을 허비한 엘레나는 황당함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엘레나의 숨이 모조리 집어삼켜진 것 같았다. 엘레나의 입술 위에 닿아있는 부드러운 입술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리오는 제 잘난 얼굴을 뽐내며 엘레나의 얼굴선을 섬세한 인형 다루듯 조심스레 받쳐 들고 있었다. 길게 뻗은 은빛 속눈썹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리오의 손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기막힌 간극이 엘레나를 깨닫게 했다. 리오가 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과 자신도 그런 리오의 모습을 좋아한다는 것. 엘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고 리오의 목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