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제니아 아카데미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잖아. 100년이나 지났는데 그런 소문은 사라지지도 않나봐?”
엘레나는 난간위에서 두 발을 까닥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높은 구두는 아래에 벗어둔 채였다.
“재밌는 소문이라고 생각했나보지.”
“나는 재미없어.”
무슨 소문이든지 당사자는 재미없는 법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리오는 뚱해진 엘레나의 옆으로 와 앉았다. 뭘 했는지 차가웠던 공기가 갑자기 기분 좋을 정도로 따스하게 바뀌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었어?”
“저기 앞에서 귀족 영애들이 떠들던데?”
“그래?”
엘레나의 말을 들은 리오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 했다. 치장 때문에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댔던 엘레나는 결국 한 손 가득 쿠키를 집어 들었다. 쿠키를 토도독 베어 먹는 소리가 나자 리오가 엘레나를 보며 말했다.
“엘, 만약에 네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었다면 어떻게 할 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영애들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리오는 갑자기 뜬금없는 걸 물어왔다. 엘리제의 험담을 들었다고 해서 해가 된 건 아닌데 말이다.
“대답해봐, 어떻게 할 건지.”
“음, 그냥 별 생각 안 드는데.”
감히 누가. 이런 생각이 엘레나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엘레나는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도 없다는 듯,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분야였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응?”
엘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리오의 잘난 얼굴은 순식간에 엘레나의 목덜미 쪽으로 다가왔다. 너무 가까웠다. 확 좁혀진 거리에 놀란 엘레나가 잠시 움찔했다. 몸을 젖혀 피해보려 했으나 엘레나의 등 뒤는 허공이었다.
뒤로 몸을 뺄 수 없는 공간에서 리오는 천천히 엘레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엘레나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따끔한 감각이 느껴지자 엘레나는 놀라 발버둥 쳤다.
“뭐, 뭐하는 짓이야!”
“역시 보복하는구나.”
그건 반사적으로 놀라서 다리를 들어 올린 거거든? 걷어차인 네 잘못이지. 엘레나는 잠시 리오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어쨌든 누가 더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나 리오 둘 다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날 때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리오의 말은 항상 엘레나도 모두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행이다.”
엘레나를 제 품에 끌어안은 리오는 그렇게 말했다. 진작 리오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한 엘레나는 달아오른 얼굴로 리오의 품 안에서 한숨을 쉬었다. 사실 엘레나는 만약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제 손으로 박살내줄 능력이 있었다. 그 사실을 리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엘, 이제 적당히 돌아가자.”
“나 춤도 못 췄어.”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손을 내민 리오를 향해 코웃음 쳤던 엘레나는 이후 자신을 혼자 버려두지 않는 리오 덕분에 스텝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나랑 추자고 했잖아. 네 솜씨론 다른 사람과 절대 못 춰.”
“……알았으니까 일단 놔줘.”
두 사람만 있는 테라스에서도 홀 안의 음악은 들려왔다. 한 걸음 물러선 리오가 엘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첫 춤의 영광을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엘레나는 리오를 내려다보며 손을 올려놓았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온 엘레나가 리오의 호흡에 맞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훨씬 괜찮아진 것 아니야?”
“방금 또 밟힐 뻔 했는데.”
리오의 말에 엘레나는 발밑을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 봐도 돼. 고개 들어 엘.”
“밟힐 뻔 했다며.”
“안 밟힐 자신 있으니까 괜찮아.”
리오의 단언에 엘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뻔뻔한 얼굴로 올려다 본 리오는 자신감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좋아, 그럼 마음 놓고 춘다?”
“그래.”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엘레나는 리오의 리드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달빛이 내린 그날 밤과 마찬가지로 리오와 함께 추는 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점점 자신감이 붙은 엘레나의 스텝도 과감해졌다.
“그런데 리오.”
“응.”
“내 목걸이 말이야.”
“지금 하고 있는 거?”
문득 깨달은 사실에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하고 있는 목걸이도 리오의 선물이었다.
“아니, 이거 말고 드욘 숲에 들어갈 때 밀리온 백작을 통해 준 목걸이 말이야.”
“그게 왜?”
“실드 마법이 새겨져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한 거야?”
몸을 한 바퀴 돌린 리오는 엘레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엘레나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력석 중에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돌연변이가 있어. 거기다 새긴 거야.”
그런 흥미로운 게 있었으면 진작 알려주지. 엘레나는 과거 괜히 마법사들을 욕했던 게 미안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천천히 살펴봐야겠다. 한쪽 발을 뒤로 뺀 엘레나는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다.
“돌연변이는 어떻게 알아보는데?”
“판별할 수 있는 마법이 있어.”
“그래?”
마법은 엘레나의 전문분야가 아니었던 만큼 그 정도의 설명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을 조명삼아 두 사람은 계속해서 부드럽게 다리를 놀렸다. 어느새 몸을 밀착시키며 이어나가는 춤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다음에 보여줘.”
“물론이지.”
음악이 끝난 후 답지 않게 마지막에 정중한 인사까지 한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것도 재밌네.”
“나도 그래.”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낯선 경험이 오히려 신기하고 설렜다. 한참을 테라스에 머물던 엘레나는 어느새 밤하늘에 달이 비스듬하게 자리를 옮기자 몸을 움직였다. 잔잔하고 평온한 밤이었다.
“그만 돌아가자.”
엘레나는 리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홀 안은 시끌벅적했다. 간간히 두 사람을 따라오는 눈들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제법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꺅!”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홀의 중간쯤을 가로질렀을 때 엘레나의 귀에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엘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냥 어떤 영애가 와인을 쏟은 모양이야.”
“여기서 그렇게 자세히 보여?”
“음, 대충은?”
엘레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대마법사는 또 다른가? 엘레나는 그냥 돌아가자는 리오를 붙잡고 괜히 근처를 기웃거렸다. 수습하는 시종들 틈 사이로 붉게 물든 드레스가 언뜻 보였다. 저 정도면 와인 한 잔이 아닌 것 같은데. 엘레나가 시선을 고정하는 사이에도 수습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느라 엘레나는 자신을 빤히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그란디아 영애?”
“……에르난 백작님?”
잠시 기억을 더듬던 엘레나는 검은 머리칼을 보고 비로소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렸다. 혼란을 틈타 엘레나에게 말을 건 남자는 그란디아 백작가에 자주 방문하는 손님 아이딘 에르난 백작이었다.
“사교계 데뷔를 앞두고 초대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군요.”
“저도 여기서 백작님을 뵐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 음, 이쪽은 로이스 후작님이세요.”
엘레나는 미소를 띤 채 옆에 있던 리오를 소개했다. 아이딘은 잠시 놀란 듯 하더니 리오를 향해 인사했다.
“영광입니다. 로이스 후작님.”
리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이냐는 엘레나의 시선은 깔끔히 무시한 채였다.
“그란디아 영애, 한 곡 청해도 될까요?”
“음, 네. 그래요.”
반가운 얼굴로 웃고 있는 아이딘은 엘레나가 벌이는 사업의 훌륭한 조력자였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김에 한껏 향상된 춤 솜씨를 실험해봐야겠다. 완벽하다는 걸 리오에게 보여주면 옆에서 절절매는 것도 덜하겠지.
약간 굳어진 표정의 리오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눈짓한 엘레나가 아이딘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엘레나는 리오에게 한쪽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댄스 홀로 들어선 엘레나는 발끝에 신경을 집중하며 천천히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데뷔를 축하드린다는 말도 못 드렸군요.”
“네? 아, 괜찮아요.”
살갑게 이야기를 하며 춤을 출 실력이 안 되는 엘레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성실히 대꾸를 하며 춤을 추면 분명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이후에도 아이딘은 몇 번인가 엘레나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이미 자신의 발에 정신이 팔린 엘레나는 적당히 웃으며 상황을 넘겨버렸다.
“영광이었습니다, 그란디아 영애.”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백작님.”
춤이 끝난 뒤 비로소 엘레나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뿌듯한 마음에 엘레나는 리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오는 엘레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봤지?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잘하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가까이서 본 리오는 왠지 뚱한 표정이었다. 뭐야, 실수라도 하길 바란 건가? 놀려주려고?
“왜 유감이야?”
“그래, 유감이야. 그것도 많이.”
갑자기 웬 심통인지 알 수 없었던 엘레나는 리오의 손을 붙잡고 잡아끌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엘레나의 뒤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 깨져나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반사적으로 돌아보려고 하자 리오가 엘레나를 품에 당겨 안았다.
“리오? 무슨 일이야?”
“샹들리에가 떨어졌어.”
놀란 엘레나가 리오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주었다.
“보지 마.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야.”
“누가 다쳤어?”
“글쎄, 네가 알면 별로 안 좋을 텐데.”
리오의 말을 알아들은 엘레나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리오의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사고에 휘말린 사람이 적어도 엘레나가 아는 사람이라는 것.
“돌아가자 엘.”
“……그래.”
누구인지 볼 수 있을까 싶어 슬쩍 몸을 틀었던 엘레나는 자신의 몸으로 엘레나의 뒤를 가린 리오덕분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무엇이든 볼 생각도 하지 말라는 리오의 행동.
그래서 엘레나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이 파티장에서 일어난 사고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엘레나는 문득 와인을 뒤집어 쓴 영애의 치맛자락을 떠올렸다. 밝은 노란색 위에 쏟아진 붉은 와인의 모습이 선명했다. 엘레나는 굳은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돌아오는 마차 안은 숨 막히는 침묵이 가득했다. 언제 함께 손을 잡고 웃으며 춤을 추었냐는 듯 리오는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었다. 마차는 한참을 달려 그란디아 백작 가의 앞에 멈추었다. 그러자 리오가 먼저 밖으로 나가 엘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고 있어야 할 게 있어 엘.”
그것이 긴 침묵 끝 리오의 첫 마디였다.
“그게 뭔데?”
바닥에 내려온 엘레나는 리오를 보며 물었다.
“내가, 널 좋아해.”
“…….”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그럼에도 내칠 수 없었던 건 리오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마탑에서 같이 살 때부터 쭉 너를 좋아했어.”
엘레나는 이 사실이 모두 꿈결마냥 멍했다. 리오가 다가와 엘레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자 엘레나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노골적인 스킨십에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던 엘레나는 멍하게 굳어버렸다.
“내가 왜 너를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해?”
말문이 막혔다. 로이스가 되어 오래 산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로이스가 되었다면. 리오가 하는 말이 모두 맞았다. 그제야 리오가 했던 이상한 말들의 아귀가 맞춰지는 것 같았다.
리오는 엘리제가 다시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레아르드 제국을 살핀다는 여신 르니아는 리오에게 무언가 대가를 받고, 직접적인 간섭을 하면 안 된다는 조건과 함께 엘리제를 다시 살려주었다.
리오가 대가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엘레나는 리오가 한 짓이 정상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세력이 커진 레아르드, 마찬가지로 세력이 커진 르니아 여신의 신전들. 그 이면에 리오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엘레나의 온 몸을 덮쳐왔다.
“모른 척 하지 마. 이제 더 이상 기다리는 건 안 할 거야.”
엘레나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과거 리오와 나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사이였던 걸까. 되짚어보면 리오는 엘레나에게 거침없이 다가왔다. 그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라서, 반가운 친구라서라는 이유를 붙였던 엘레나와는 처음부터 달랐다. 엘레나는 무거워진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그래.”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고요한 리오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에르난 백작님은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