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이 들었던 엘레나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피곤해.
묵직하게 늘어진 몸이 뻣뻣하게 움직였다. 아, 더 자고 싶다.
“아가씨? 아가씨! 아직 주무세요?”
“……아니, 일어났어.”
낮게 잠긴 목소리가 엘레나에게서 흘러나왔다. 엘레나는 다시 눈을 감은 채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럼 들어갈게요.”
“응.”
엘레나는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치우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니, 아니 잠깐만! 잠깐만 그대로 있어!”
침대 위엔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얘가 왜 여기 있어?
잠시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오가 침대 위에 있다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엘레나는 침착하게 숫자를 셋까지 센 뒤 발로 차서 리오를 침대 밖으로 밀어버렸다. 맹세컨대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방 안에서 난 요란한 소리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안 돼, 제발. 엘레나는 다급하게 문 쪽으로 뛰어갔다.
“악! 나가요 절대 들어오지 마!”
필사적으로 문을 사수한 것도 소용이 없었다. 망했다. 이미 문은 열려버렸고 방문 앞에는 에바와 듀랜트 경, 오렌까지 모두 다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엘레나의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엘레나는 두 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려버렸다.
몰라, 다 못 보겠어.
“아가씨?”
“……미안해요. 나, 사고 친 것 같아요.”
“괜찮아, 내가 다 수습할게.”
어느 새 다가온 리오가 엘레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정상이 아닌 전개에 엘레나는 남모르게 리오의 발을 꾹 밟았다. 내면의 폭력성을 실험하는 것도 아니고 얘는 대체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아르카이안 로이스?”
“…….”
“…….”
엘레나는 이 침묵이 무서웠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엘레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서 꺼져.”
조그맣게 말했지만 리오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오가 하는 행동은 여전히 예상 밖이었다. 리오는 엘레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엘레나를 안아들었다.
“어?”
서늘한 바람이 공중에 들린 엘레나의 치맛단 아래로 들어왔다. 창문은 또 언제 열었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 혼란스러웠다. 예상범위를 벗어난 아침의 일들은 엘레나의 뇌를 과부하 상태로 만들었다. 굉장히 민망한 자세라는 것 또한 한 몫을 했다.
“리오! 아니 로이스 후작님. 돌았… 내려주세요.”
“당장 내려주시죠.”
엘레나의 발버둥에 그때까지 멍하게 있던 듀랜트 경이 움직였다. 문제가 있다면 리오가 더 빨랐다는 거다.
“엘, 잠깐 나가서 열 좀 식히고 오지 않을래?”
이 미친놈이 대체 왜이래. 싫다고, 싫어! 아까 꺼지라고 했던 거 못 들었어?
“밖에서 할 말이 있는데 싫으면 혼자 갈게.”
“…….”
엘레나는 살벌한 눈초리로 리오를 노려보았다. 저건 분명히 따라갈 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리오는 엘레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같이 갈 거지?”
“나쁜 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는지 오렌이 엘레나에게 물었다. 이상하게 눈을 마주치는 게 힘들었다.
“아가씨, 로이스와 어떻게 아시는 사이입니까?”
“아… 그거 꿈속! 꿈속에서 봤어요.”
엘레나의 헛소리에 왜인지 오렌은 리오를 파렴치한을 보듯이 보고 있었다. 옆에 서있던 듀랜트 경도 마찬가지였다.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에바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인 것 같았다. 저거 위험한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리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대충 상황정리는 끝난 것 같군요. 우린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만 갈까요, 엘레나?”
“뭐… 야 잠깐, 잠깐만.”
리오는 보는 사람의 속이 뒤집힐 만큼 얄밉게 웃으며 엘레나를 끌어안고 창문을 넘었다. 졸지에 리오에게 바짝 매달린 엘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다녀와서 세 사람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다. 엘레나는 괜히 민망한 얼굴을 리오의 품에 파묻었다.
“다 왔어. 눈 떠도 돼.”
리오가 엘레나를 내려놓은 곳은 넓은 공터였다. 어제 리오의 갑작스런 방문에 그나마 옷은 갖춰 입은 상태라 다행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내가 미쳐! 나 이제 집에 어떻게 들어가라고, 아니 가서 뭐라고 하지?”
“결혼할 사람이라고 해.”
“그래 그러면 되겠… 뭐라고?”
안절부절 못하던 엘레나는 뒤늦게 리오의 말을 해석한 뒤 얼굴을 찌푸렸다. 얘가 결혼의 정의는 알고 있는 거 맞지?
“평판이 걱정되는 거 아냐?”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저를 그렇게 데려오셨어요?”
엘레나는 리오의 말을 비딱하게 받아쳤다.
“응, 나는 책임져 줄 수 있거든.”
세상에 르니아 여신님. 왜 제게 마력을 주시지 않으셨나요? 저 마법사에게 파이어볼 한 방만 날릴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은데.
“일레민 가지, 루베인 풀, 데시아 열매의 즙.”
“폭발 마법약이네.”
“그래 너에게 간절하게 던지고 싶은 약이야.”
리오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엘레나는 무슨 말을 해도 웃는 리오에게 뚱한 얼굴로 “그래서 할 말이란 게 뭔데?”라고 물었다.
“자, 선물이야.”
리오가 뜬금없이 건네준 것은 작은 마법주머니였다. 슬쩍 안을 열어본 엘레나는 손을 넣고 걸리는 것을 아무거나 잡아 빼냈다. 첫 번째로 엘레나의 손에 들려 올라온 것은 동그란 금화였다. 현재 레아르드 제국에서 사용되는 사자문양이 찍힌.
금화를 쥔 엘레나의 손이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안에 다시 금화를 떨어뜨린 엘레나가 주머니를 휘젓자 두 번째는 구하기 쉽지 않은 요정가루가 나왔다. 역시 리오는 엘레나를 너무 잘 알았다.
“이런 걸로 넘어갈 거야?”
“부족해? 부족하면 마탑을 통째로 줄게.”
“그건 필요 없어.”
어차피 가져봤자 돌아가는 꼴을 보면 답답해 병이나 나겠지. 엘레나는 마법 주머니 쪽으로 관심을 돌리며 물었다.
“왜 어젯밤에 안줬는데?”
“네가 잔다고 했잖아.”
리오는 뭐가 문제냐는 듯 엘레나를 보고 있었다. 길게 설명하기 싫었던 엘레나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하, 말을 말자.”
그러자 리오의 손이 엘레나의 앞에 내밀어졌다. 엘레나는 리오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럼 갈까?”
“여기가 어딘데?”
“저 쪽이 위드모어야.”
엘레나는 리오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울컥했다. 안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삼키기 위해 엘레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
“궁금하지 않았어?”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곳. 엘레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가 서 있는 곳은 낯익은 곳이었다.
가끔 리오와 마법약의 효과를 보러 나왔을 때 종종 이곳에 왔었다. 넓은 부지와 듬성듬성하게 서 있는 나무,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멀리 서 있는 금빛의 마탑도 여전히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엘, 나와 같이 가지 않을래?”
“어디로?”
“마탑으로. 너는 백작 가에 있는 게 좋아?”
엘레나가 조금 더 어렸을 때 물었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아.”
“…….”
리오의 말처럼 궁금하긴 했었다. 마탑은 어떻게 변했고 또 얼마나 자신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빛바랜 추억이라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긴 했었다. 그러나 이미 엘레나가 된 지금 마탑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럼 백작 가에선 뭘 할 건데?”
“그냥 그걸 해볼까 해.”
“뭘?”
“이제 돈도 찾았으니까, 돈지랄.”
엘레나는 품 안의 열쇠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심심한 나날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마법열쇠를 들어 올리는 엘레나의 얼굴엔 설렘이 한껏 묻어났다.
“…그런 걸 왜 해?”
리오, 아직 인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구나. 돈과 권력이 최고야. 거기에 사치까지 더하면 더할 나위 없지. 하지만 엘레나의 말을 들은 리오는 픽 웃으며 엘레나의 머리를 잔뜩 흩뜨려놓았다.
“꼬마아가씨, 조금만 기다려. 나중에 원 없이 하게 해 줄게.”
“네가 왜? 그보다 무슨 꼬마란 거야. 난 15살이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픽 웃는 리오를 엘레나가 노려보았다. 저거 비웃는 거지? 비웃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비웃지… 뭐야? 야! 너 그거 왜 가져가는 거야?”
가까이 다가온 리오가 엘레나의 손에서 마법열쇠를 빼갔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열쇠를 빼앗긴 엘레나가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내놔!”라고 손을 뻗어봤자 엘레나보다 훨씬 키가 큰 리오의 손에 닿지 않았다.
“의도가 너무 불순하잖아. 당분간 돈은 마법주머니 안에 있는 것만 써.”
“내 의도가 뭐가 어때서? 이제 좀 사치스럽게 살아보겠다는데 왜? 전엔 일만하고 즐기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는데…….”
엘레나의 말에 순식간에 리오의 안색이 변했다. 그제야 말실수를 깨달은 엘레나가 슬쩍 리오의 눈길을 피했다. 홀로 엘레나를 기다린 리오, 여전히 엘레나를 찾아오는 리오.
엘레나는 리오의 심정이 어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리오가 엘레나를 편하게 대한다고 해서 지난 일이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굳어버린 리오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리오.”
“응.”
그러나 엘레나는 물어야 했다. 답을 알고 있는 건 리오 뿐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묻고 싶었다. 자신의 마지막이 어땠었고 왜 죽어버렸는지를.
“리오, 100년 전에 나는 왜 죽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나.”
그 순간, 엘레나가 본 것은 무섭게 일그러진 리오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