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는 언젠가 말했었다. 만약 엘리제가 마탑을 나가게 된다면 그 땐 자신도 함께일 것이라고.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리오는 마탑에 홀로 남아 로이스가 되어 있었다.
아르카이안 로이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지금 리오가 스스로를 이안이라고 일컫는 게 자연스럽다는 사실이었다.
“리.. 아니 이안.”
“응. 엘레나.”
왜 저렇게 쉬울까. 적응하지 못한 엘레나와 달리 리오의 입에서 나오는 엘레나라는 이름은 매끄러웠다.
“이안.”
“응.”
“이안.”
여러 번 불러도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엘레나는 미약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말해.”
“내가 뭘 찾으러 왔는지 알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리오는 엘레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한눈에 엘레나를 알아본 것도, 여기에 찾아올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그동안 살아 있었으면서 왜 안 찾아왔어?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미안해.”
서운함 때문에 화가 나는지 리오가 자신을 놀린 것 같아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리오에게 어떤 설명을 듣기까지 엘레나는 리오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엘리제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
리오를 추궁하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엘레나로 태어난 이후 가장 크게 감정표출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너라는 걸 알고 있었어.”
슬금슬금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다. 더 이상 물으면 안 될 것 같으면서도 엘리제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는데?”
“계속 너를 기다렸으니까.”
“…….”
리오는 엘레나의 손을 꽉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엘레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왜? 내가 다시 태어날 걸 알고 있었어?”
“그래.”
엘레나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그럼 왜 이제서야 나타난건데?”라는 날카로운 말에 리오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어. 직접 찾아갈 수 없었으니까.”
“왜?”
머릿속이 복잡했다. 말도 안되는 일이 한꺼번에 모두 터져버린 것 같았다.
“르니아와 약속했거든.”
“무슨 소리야?”
“그건 나중에, 나중에 다 말해줄게.”
지금의 리오는 과거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또 달랐다. 원래 이세상 사람이 아닌듯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더 심했다. 번지르르한 옷에 단정한 매무새는 리오의 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저래 뵈도 후작님이라 이거지.
그러나 번지르르한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게 리오의 표정은 어딘가 간절해보였다. 마치 이대로 덮어두기를 바란다는
표정. 하지만 엘레나는 더 이상의 수수께끼 놀이를 사양하고 싶었다. 이제 로이스가 되어버린 리오를 보며 엘레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잘 있어 이안. 더는 볼 일 없겠네.”
“엘!”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그럼에도 놓을 수 없었다. 리오는 엘리제에게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늘 함께 살아가는 전우였으니까. 엘레나는 이안의 손을 뿌리치고 집 안쪽으로 들어섰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금고 열쇠는 찾아가야지. 엘레나는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미안해 잘못했어. 안 본다고만 하지 마. 다 내가 잘못했어.”
리오가 뒤에서 엘레나를 끌어안았다. 상기된 리오의 체온이 등 뒤에 닿았다. 낯선 접촉에 엘레나가 멈칫했다. 뭐야 이건?
“놔주세요, 로이스 후작님.”
싸늘한 엘레나의 목소리에 리오가 급하게 말했다.
“르니아가 내건 조건이었어. 너에게 직접적으로 간섭하면 안된다고. 그렇지 않으면 널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엿같은 조건이 아니었다면 벌써 널 찾아갔을 거야, 엘.”
리오를 뿌리치려던 엘레나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저게 여신님께 할 말인가. 엘레나도 신앙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리오는 더했다.
엘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긴 리오는 옛날부터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간섭한 거야?”
“응.”
엘레나의 한숨이 한층 더 깊어졌다. 리오의 말을 분석하면 결론은 딱 하나였다. 르니아 여신이 엘레나를 다시 살렸고 리오는 르니와와 무슨 거래를 했다는 것. 그게 무엇인지는 지금 죽어도 말해주지 않겠지.
르니아 때문에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간섭했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엘레나의 머리를 식혀주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리오의 품에서 나와 리오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은 마치 진의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날 왜 기다렸어?”
“너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없었어.”
남이 들으면 이상하게 여겨질 말이었지만 엘레나는 리오를 충분히 이해했다.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고 해도 그랬을 것이다. 갑자기 리오가 사라지고 엘리제 혼자 마탑에 남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쩌면 서서히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럼 저 마법은 언제 걸어 놓은 거야?”
엘레나는 불퉁한 얼굴로 리오에게 따져 물었다. 리오가 공들여 만들어 놓은 환영을 보고 곧바로 리오를 봐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기다리고 있을 거면 그런 건 왜 만들어가지고 사람을 놀라게 하냐고.
“오래전에. 네가 보고 싶어서 하나 둘 만들었어.”
저런 게 또 있다고? 왠지 모르겠지만 소름이 돋았다. 원래 리오는 이렇게 솔직한 감정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리오를 보는 엘레나가 담담한 것처럼 리오도 그랬었다. 적어도 엘리제의 기억은 그랬다.
“알았으니까 그런 느끼한 말은 집어치우고 원래 리오로 돌아와.”
한층 진정이 된 엘레나는 어느새 탁자를 사이에 두고 리오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혼자 로이스가 되어 살아남은 리오는 오랜 시간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리오의 이야기 대부분은 엘리제와 관련이 있었다. 엘리제가 죽은 뒤 엘리제가 아끼던 것은 어떻게 되었는지, 연관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오데이른 백작가는 잘 살고 있어.”
“그래? 앨버스는 어땠어?”
“잘 살았어. 걔도 독한 데가 있었거든.”
미미하게 찌푸려지는 리오의 얼굴을 보며 엘레나는 픽 웃었다. 리오와 앨버스는 끝까지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리오는 마치 엘레나를 통해 과거 속의 엘리제를 보는 것 같았다. 뭐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어쩔 수 없나.
“리오.”
“이제 이안이라니까.”
“입에 안 붙는 걸 어쩌란 말이야?”
퉁명스러운 엘레나의 말에 리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쨌든 리오, 나 이만 가봐야 해. 밖에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
리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뭐 못할 말이라도 했나? 엘레나는 잘게 일렁이는 리오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엘, 꼭 가야해?”
“응, 나는 이제 엘레나 그란디아니까. 돌아가야지. 널 다시 만나서 기뻤어, 리오.”
이곳은 이제 엘레나의 집이 아니었다. 리오에게서 금고 열쇠를 받은 엘레나는 몸을 일으켰다. 리오와 대화를 하느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엘레나는 잠시 잊었던 듀랜트 경과 오렌에게 미안해졌다.
설마 밖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 생각에 잠긴 엘레나는 리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걸까. 엘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리오를 보았다. 리오는 겸연쩍은 듯 웃더니 엘레나의 눈을 한손으로 덮었다. 리오의 손이 엘레나에게 뜨거운 체온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네가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 조만간 내가 찾아갈게.”
갑자기 시야가 가려져 불만스러웠던 엘레나는 자신을 찾아오겠다는 리오의 말에 솔깃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외출을 하려면 눈을 피해야 할 사람이 많았던 만큼 리오의 제안은 엘레나에게 반가운 것이었다.
“그럼, 숲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리고 잠시 후, 따뜻한 체온이 떨어져나간 엘레나의 눈 위가 서늘해졌다. 엘레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한쪽 구석에 미묘한 균열과 일그러진 숲이 보였다. 바로 앞에서는 숲의 그림자가 가득 엘레나를 덮쳐왔다. 그제야 엘레나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숲의 경계 바로 안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지, 이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은?”
분명 먼저 돌아가겠다고 한 건 엘레나였다. 그런데 마법으로 내보낸 건 리오였다. 너무 친절한 배려 탓에 엘레나는 리오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곱씹을 여유도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곧바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대신 괜히 주변을 서성거리던 엘레나는 리오와 했던 이야기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르니아 여신은 엘레나를 살려주었다. 또, 리오는 엘리제가 엘레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리오는 100년을 기다렸다는 말이 된다.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 했으면서 100년을 기다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뭔가 찜찜했다.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엘레나가 기억하는 리오와의 관계는 친구나 전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죽기 전까지 기억의 공백이 있다는 게 이렇게 불편했던 적이 있었던가. 엘레나는 아무리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잡아보려 애썼다. 그리고 동시에 지독한 두통이 찾아왔다.
“아, 젠장. 머리까지 도와주질 않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은 엘레나는 일단 숲의 입구로 돌아가기로 했다. 엘레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현재 상황을 생각했다. 새로운 삶을 얻은 엘레나 그란디아, 그리고…….
엘레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리오 이 나쁜 새끼, 그럼 처음부터 꿈속에서 장난질 친 건 일부러 즐긴 거 아냐?
잔뜩 찌푸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뿌옇게 흐려진 오두막집은 이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엘레나는 아까 리오와 재회의 기쁨을 나눈 것도 잊은 채 다시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