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전 대륙은 전쟁의 화마가 꺼지지 않는 땅이었다. 대륙의 끝 바다와 인접한 곳에 있던 사니티라 국도 해상권을 손에 쥐고 레니아 국과 다른 나라의 전쟁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륙 중앙에 있던 레니아 국이 특유의 거친 성정으로 대륙을 휘어잡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대륙 통일을 외쳐대는 레니아 국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주변 소국들은 모두 연합의 이름하에 맞서 싸웠다. 그 전쟁에 사니티라 왕, 레프 사니티라의 셋째 아들인 케인 사니티라도 참전했다. 그러나 케인은 지휘부에서 여자들을 희롱하며 시간만 때우고 공만 받아먹는 전형적인 난봉꾼이었다.
어느 날 케인은 전쟁터에 끌려온 한 이름도 없는 하녀를 짓밟았다. 그 여자는 케인의 막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케인 사니티라에게 강제로 짓밟히고 버려진 여자는 후에 그 일로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케인의 눈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케인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자들 중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끈질기게 살아온 여자는 3개월 후 케인이 레니아 군에게 쫓겨 사니티라로 귀환할 때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뒤늦게 여자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케인은 자신이 짓밟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여자를 첨탑에 가두었다.
쓸모없는 것을 처리하는 쓰레기장에 가까웠던 첨탑에서 여자는 자신을 닮은 여자아이를 낳고 산후열로 죽어버렸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인 케인은 없는 게 나은 지경이니 어린 여자아이에게 돌아온 것은 차디찬 외면뿐이었다. 이용가치가 없을 정도로 못생긴 탓에 소녀는 난봉꾼인 아비가 발정이 나서 얼굴도 보지 않고 안았던 하녀의 천박한 핏줄이 되었다. 소녀는 당연하게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이 태어난 케인의 사생아들 중 예쁘장한 아이들은 이름을 받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자아이라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 때마다 첨탑은 어미의 울부짖는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없어 단 하나의 울타리도 가질 수 없었던 소녀는 오히려 분풀이 대상이 되어 첨탑 안에서 조롱과 멸시, 학대와 함께 자라났다.
ㅡ 재수 없게 못생긴 계집년.
그것이 소녀의 긴 이름이었다. 첨탑에 갇혀 사니티라 왕가의 사생아 중 가장 쓸모없는 존재로 살길 11년. 사니티라 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왕의 폭정과 무리한 전쟁에 의한 결과였다.
ㅡ 전쟁이야 전쟁! 이젠 끝났어!
ㅡ 다 죽을 거야. 불타고 사라질 거야. 하하하하하!
절망이 가득한 소란스러운 첨탑에서 소녀와 함께 있던 여자들은 이상증세를 일으켰다. 오래 갇혀있어 미쳐버린 여자들의 뒤로 소녀는 작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불타는 궁을 보며 소녀가 한 생각은 딱 하나였다.
‘여기서 탈출할 수 있겠구나.’
소녀는 비뚜름하게 웃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도 오늘이면 어떤 식으로든 끝날 것 같았다. 소녀의 표정을 보고 격분한 여자가 소녀를 구타하기 시작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곧 기회가 올 테니까.
무자비한 폭력을 피해 잔뜩 웅크린 소녀의 귀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에서 들리는 비명에 여자들이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ㅡ 어서 문을 열어줘!
ㅡ 도망가야 해! 어서 열어!
‘멍청하긴. 생각이 있으면 문으로는 도망가지 말아야지.’
소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첨탑 내부에는 숨을 곳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찾아야 한다. 소녀는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식량박스들을 급히 쌓은 소녀는 그 위에 위태롭게 올라섰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창틀에 발을 걸치고 가까스로 올라서는데 성공한 소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첨탑의 뒤편엔 병사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삐걱대는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소녀의 뺨을 때렸다. 이건 살기 위해서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 창밖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버텨. 버텨내야 해. 그래야 살아나갈 수 있어.’
첨탑의 높이는 높았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바닥을 내려다 보며 소녀는 두려움보다 해방감을 느꼈다. 살아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순간 드는 생각은 그것 하나 뿐이었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아래에 있는 풀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ㅡ 윽. 아파.
구르듯이 떨어진 소녀는 팔다리를 벌리고 누워 처음 바깥세상을 보았다. 소녀의 위로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은 자유 그 자체였다.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단 하나의 생각이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성공이다.
소녀는 그 자리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정말 저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왔다. 팔다리를 움직여보니 아프긴 해도 그리 무리 없이 움직여졌다.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독하게 재수가 없었던 인생이었는데 이번 한번의 일로 소녀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몸을 일으켰다. 몸 이곳 저곳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이곳에서 벗어나야했다. 매캐한 연기냄새가 나자 소녀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었다. 그런 소녀의 뒤로 묵직한 것이 툭툭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소녀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ㅡ 엘리제 공주님!
몸을 숨기며 탈출하는 도중에 보게 된 천사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밝게 빛나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는 멀리서 봐도 소녀의 눈에 박혀들었다. 엘리제 공주님은 마치 불타는 궁 안에 갇힌 요정 같았다.
ㅡ 이쪽으로 오십시오!
소녀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황급히 대피하는 공주님을 보았다. 같은 공주라도 확연히 다른 처지였다. 소녀는 몰래 엘리제 공주 일행의 뒤를 따랐다. 외곽에 있는 첨탑과 별궁과는 달리 본궁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사니티라의 궁은 이렇게 생겼었구나.’
소녀의 눈에 담긴 궁은 탈출한 첨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각종 조각과 문양들이 빼곡히 들어찬 궁으로 들어가는 공주님의 뒷모습은 소녀가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차가운 진실을 알려주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성은 어디를 보아도 소녀와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뒤돌아선 소녀는 어지러운 궁 안에서 몸을 숨겨가며 빠져나왔다. 그 길로 소녀는 피난민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추레한 소녀의 행색은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ㅡ 얘, 너는 어디로 가니?
ㅡ 모르겠어요.
목적지 없이 사람들 틈에 떠밀리던 소녀에게 한 여인은 레니아국의 수도 세니스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전쟁도 없고 지금 가장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라고. 특별히 갈 곳이 없었던 소녀는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정했다.
ㅡ 이 더러운 꼬마 계집이!
그러나 아무런 짐이 없었던 소녀는 피난민들의 물건을 훔치다 무리에서 쫓겨났다. 작은 왕궁 내전에 휩쓸려 희망이 없는 나라에서 고아인 소녀가 살아남는 방법은 이제 오로지 도망뿐이었다.
인적이 드문 산을 타며 병사가 보이면 숨고 몸을 잔뜩 웅크리며 때 묻은 옷을 입고 몇 달을 헤맸는지 모른다. 소녀는 이름 모를 풀과 나무열매를 뜯어먹어가며 피난민 무리의 뒤를 부지런히 쫓았다. 다른 길 따위는 모르는 것처럼.
사니티라의 국경을 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때마침 일어난 분란 때문에 소녀는 국경을 넘어 오니로 국에 올 수 있었다. 천운이었다. 그러나 그 천운은 늘 따라주는 것이 아니었다.
ㅡ 이 년! 드디어 잡았다!
첨탑에 갇혀 있을 땐 몰랐지만 소녀는 제법 날랜 편이었다. 횟수를 셀 수 없는 도둑질로 연명하던 소녀는 결국 머리채가 붙잡혀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또 죽을 만큼 맞겠구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소녀의 입안에 흙모래가 가득 씹혔다. 벌써 한 쪽 뺨은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ㅡ 너 같은 년들이 잔뜩 몰려와서 장사가 안 돼! 어쩔 거야! 빌어먹지도 못하게 못생긴 년이 들어와서 빵이나 훔쳐 먹고!
비가 내리지 않아 물도 마시지 못하고 굶기를 며칠 째. 힘이 없었던 소녀는 무방비하게 폭력에 노출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훔치자마자 입에 넣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소녀는 묵묵히 남자의 매질을 견뎌냈다.
그 때 반대편에서 높은 비명이 들려왔다.
ㅡ 도둑이야!
다급한 음성에 소녀에게 폭행을 퍼붓던 남자는 발을 올리다말고 달려갔다. 잔뜩 지저분해진 행색의 어린 아이가 빵을 한가득 훔쳐서 달아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은색 머리카락이 소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자신을 향한 관심이 옅어지자 소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주인이 없는 가게에서 물건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녀는 며칠째 뒷골목을 차례대로 뒤진 끝에 은발의 소년을 찾아냈다. 온 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딱지와 붉은 눈동자가 소년을 섬뜩해보이게 했다. 그러나 좀도둑이었던 소녀에게 소년은 천사 같았다.
시린 달빛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은발에 핏빛과도 같은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소녀는 깨달았다.
ㅡ 너도 혼자야?
의지할 곳 없는 곳에서 더 작아보이던 소년에게 소녀는 먼저 말을 건네고 꿋꿋이 무시하는 소년의 옆을 지켰다. 왜인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소녀는 소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함께 행동했다.
ㅡ 나는 레니아의 수도 세니스에 갈 거야.
함께 훔친 빵을 뜯어먹던 소녀는 이젠 제법 자연스럽게 소년에게 말을 붙였다. 때묻은 얼굴이 천진난만했다.
ㅡ 거긴 왜?
처음 듣는 반응이었다. 소년의 물음에 소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ㅡ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들었거든. 전쟁도 없고.
비명소리와 불타는 냄새, 피비린내에 질려버린 소녀는 그냥 고향땅을 잊을 수 있을 만큼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평화롭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ㅡ 같이 갈래?
ㅡ 그래.
의외의 대답에 소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소년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지만 소녀는 기뻤다. 또래 아이와 친해진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