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탑에서 온 마법사는 저번에 왔던 콜린 브라운 남작을 포함해 세 명이었다. 마법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가 소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난 엘레나에 의해 갑자기 쫓겨났던지라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일이었다.
엘레나는 곁눈질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깐깐해 보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응접실에 들어서서 가운데 놓인 소파 앞에 섰다. 세 마법사는 엘레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란디아 영애. 이전에 찾아뵈었던 브라운 남작입니다. 이쪽은 에밀 남작, 그리고 저 분은 밀리온 백작님이십니다.”
그래도 두 번째로 보는 브라운 남작이 나머지 사람들을 소개해왔다. 엘레나는 밀리온 백작이라는 사람을 빤히 보았다. 남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밀리온 백작은 냉철한 인상이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계속 엘레나를 힐끗거렸다.
대체 왜 저래?
시선을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는 게 충분히 수상쩍었으나 엘레나는 모르는 척 미소를 띄웠다.
“다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엘레나 그란디아예요. 바쁘실 텐데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간단한 인사 후 엘레나는 뒤에 서 있던 노아를 앞에 세웠다.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답게 간간이 노아에게도 시선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예요. 마법사 분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밀리온 백작이 입을 떼자 이어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자리에 앉았다. 노아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데려와 놓고 내보내야 했다면 그보다 더한 참사가 없었을 것이다.
엘레나는 얼굴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미소를 굳이 지우지 않으며 예의상 질문을 던졌다. 여기까지 오는데 불편함이 없으셨는지, 귀한 시간을 빼앗은 게 아닌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들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말이 오가고 난 뒤 엘레나는 본심을 슬그머니 꺼냈다. 솔직히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건 너무 속이 보이지 않나.
엘레나가 방긋방긋 웃으며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계산을 하는 동안 노아는 얌전히 있어야한다는 엘레나의 말을 듣고 옆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제가 여러분들을 모시게 된 이유는 로이스 후작님의 영지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예요.”
“……네?”
브라운 남작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에밀 남작은 말을 잃었다. 유일하게 반문을 한 밀리온 백작도 충격에 빠져 있다가 겨우 입을 연 듯 했다.
“정확히 죽음의 숲이라 불리는 드욘 지방에 관심이 생겼어요.”
엘레나는 잠시 옆에 있던 노아가 움찔하자 눈길을 주었다.
노아는 또 왜 이러지?
마법사들이 말을 잃은 사이 엘레나는 노아의 안색을 살폈다. 드욘에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나? 그러고 보면 오렌도 로이스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였었지. 엘레나는 오렌을 불러 로이스와 연관이 있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뚤어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아니 왜 그런 곳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거긴 정신이 이상한..”
에밀 남작이 입을 열자 옆에 있던 브라운 남작이 급하게 에밀 남작의 팔을 붙들었다. 엘레나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제법 순화된 말이었지만 브라운 남작의 표정엔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이상한 영애라니까요’라는 뜻이 가득 담겨 있었다.
“들어가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드욘 지방에 대한 정보를 주신다면 저도 원하시는 정보를 드리도록 하죠. 물론 정신 나간 모험가들이 입에 올리는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요.”
엘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제 할 말을 끝마쳤다.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나 정신 나간 모험가 취급 하는 건 상당히 기분이 나빴지만 일단 넘어가자. 여기서 싸우면 다 망하는 거다.
엘레나는 스스로 자신은 고명한 학자였다며 최면을 걸었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니까 아주 터무니없는 자기암시는 아니었다. 엘레나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안 잠시 우왕좌왕하던 마법사 셋은 저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더니, 엘레나를 다시 협상테이블로 끌어왔다.
“그란디아 영애, 원하시는 정보가 뭡니까?”
엘레나는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지금부터는 결코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
“드욘 숲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올 수 있는 방법이요.”
그렇게 되면 절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을 테니까. 당황해서 굳어가는 두 마법사들과 달리 밀리온 백작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로이스님께 먼저 보고를 드려야하니 잠시만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밀리온 백작이 낮게 주문을 읊조리더니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마법으로 이동 할 수 있는 거였어? 자연스럽게 엘레나는 다른 두 명의 마법사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대체 왜 마차를 타고 오신 거예요?”
“저희는 아직 할 수 없습니다.”
“…….”
엘레나의 눈빛이 안쓰럽게 바뀌었다. 여기 남은 두 사람은 수습이었구나. 엘레나는 동정심에 앞에 놓인 다과를 마법사들의 앞쪽으로 밀어주었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두 마법사가 흠칫했다.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마탑은 많이 바쁜가요?”
“네. 그런 셈입니다.”
엘리제로 마탑에 있을 당시 수습 마법사들은 선배들의 심부름꾼이나 다름없었다. 작게는 간단한 청소부터 연구 도우미까지. 알차게 수습들을 부려먹었던 엘레나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사실 마법사 입장에서 보면 웃기기도 했을 것이다. 마력이라곤 없는 엘리제가 수습이라고 하나 마법사들을 부려먹고 있으니. 그러나 엘리제의 뒤에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바로 리오였다.
넘치는 마력으로 수습 없이 바로 마력운용을 하기 시작한 리오는 일손이 부족하다는 엘리제에게 몇몇 수습 마법사들을 잡아서 보내주었다. 유용한 인력이 생긴 엘리제는 굳이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후 엘리제를 거쳐 가는 마법사들의 소문에 의해 엘리제는 가장 기피해야 할 선배가 되었다. 마법사가 아니어서든 살인적인 일의 양 때문이든 말이다. 물론 리오라는 훌륭한 낚싯대가 있었던 엘리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착실히 일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습 마법사들은 엘리제였다면 탐스러운 먹잇감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는 다 소용없는 일이라 오히려 엘레나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늦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엘레나는 두 사람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배들의 온갖 잔심부름들로 바쁜 수습들 아닌가. 아마 처음에 브라운 남작 혼자 그란디아 가를 방문했던 것도 심부름의 일환이었겠지. 별달리 어려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뭐 더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네?”
“바쁘실 텐데 체력이라도 비축해둬야죠.”
“…….”
아무런 말이 없었음에도 엘레나의 귀엔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이 울려대는 듯 했다. 표정이 굳은 두 남작은 엘레나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어색하게 다과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띤 엘레나는 조용히 시식을 재촉했다.
“이거면 괜찮습니다.”
브라운 남작은 에밀 남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편하게 있으라는 엘레나의 말은 그다지 소용이 없었는지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금방 지루해진 엘레나는 옆에 앉아 다과를 집어먹고 있는 노아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났다.
“늦었습니다, 그란디아 영애.”
“백작님? 어떻게 됐나요?”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잠들 뻔한 순간 나타난 밀리온 백작이 반가워 엘레나는 흐트러진 몸을 다시 곧추세웠다. 백작은 한손가득 이상한 꾸러미를 가지고 있었다.
“뭐든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신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위를 묻는 엘레나의 앞에 밀리온 백작은 가져온 꾸러미를 펼쳐 물품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두꺼운 종이에 마법진이 그려진 스크롤이 두 장과 호박색 원석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하나가 나타났다.
저건 마법진을 보니 이동마법 스크롤인데 목걸이는 뭐지? 엘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놓인 목걸이를 살폈다.
“이 목걸이는 뭔가요?”
“실드가 새겨진 목걸이입니다.”
찬찬히 훑어봐도 원석이 예쁘다는 것밖에 모르겠다. 자신의 눈동자 색과 꼭 닮아서 그런지 더 눈길이 가는 것 같았다.
“실드 마법이 새겨져 있다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한 마법물품입니다. 드래곤이 떼로 몰려오지 않는 이상 영애를 지켜드릴겁니다.”
엘레나는 픽 웃으며 목걸이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그 정도로 강력해 보이지는 않은데. 그런 것도 가능해졌나.
이런 건 처음 본다. 조그마한 펜던트 어디에 마법을 새긴 걸까?
과거 엘리제가 만든 마법도구들은 대개 마력석을 넣으면 작동하는 원리로 만들어졌다. 이미 걸어둔 마법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마력석은 비싼 대신 생활의 윤택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이런 뭐지? 마력석도 아닌 것 같은데.
“백작님, 이 목걸이에 걸린 마법을 실험해주시겠어요? 동행자들이 안전주의자들이라서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예요.”
처음 보는 형태인 만큼 의구심이 들었다. 정체를 묻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으나 지금 여기서 질문을 한다면 엘레나의 범상치 않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이스님이 직접 새겨주신 것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그 아르카이안 로이스가? 엘레나는 놀랐지만 겉으로는 덤덤한 척하며 목걸이를 내밀었다.
“그러니 더 직접 확인하고 싶어지네요.”
결국 제일 경력이 짧은 브라운 남작이 목걸이를 걸게 되었다.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걸 보니 안쓰러웠지만 엘레나는 철저히 방관자의 입장을 지켰다. 저택의 뒤편으로 자리를 옮긴 마법사들은 땅에 커다란 마법진을 그렸다. 저택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실드 마법이었다.
마법진 안에서 치러진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밀리온 백작과 에밀 남작이 퍼부은 공격 속에서 브라운 남작이 멀쩡하게 살아나오는 장면을 직접 본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엘레나는 그들에게 흔쾌히 마법약의 제조법들을 남겨주었다. 정리한다고 고생 좀 했었지.
물론 그 사이에 몰래 오렌이 가져온 지도를 끼워두는 걸 잊지 않았다. 패를 다 꺼내놓기 전에 원하는 걸 받았으니 돌려주는 게 맞았다. 나중에 자료 틈에 섞여 있는 걸 보면 마탑의 지도도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드욘 지방은 어떤 곳인가요?”
“사람을 현혹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곳입니다.”
“…….”
밀리온 백작 일행을 배웅하며 엘레나가 한 질문에 백작은 그렇게 대답했다. 무사히 다녀오라고 해놓고 저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애초에 목걸이라 1인용인 것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궁금하니 어쩔 수 없지.’
간절한 게 죄였다. 역시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정 위험해 보인다 싶으면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다음에 만나면 부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요.”
마지막으로 마차를 타며 건넨 밀리온 백작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오라느니 무사하라느니 하는 인사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불안감을 조성하는 앞의 말보다는 훨씬 나았다. 엘레나는 한껏 예의를 차리며 밀리온 백작 일행을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