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쫓아내요!”
결국 브라운 남작은 불같이 화를 내는 엘레나의 지시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다. 브라운 남작의 말을 들은 엘레나는 그야말로 펄펄 뛰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소실? 그 방대한 자료가 소실됐다고 모두? 엘레나는 이해하기도 싫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쩔쩔매는 브라운 남작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귀족영애고 뭐고 이성을 잃으니 과거 엘리제의 괴팍한 성격이 나오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그대로 응접실 문을 박차고 나가 치맛단을 두 손으로 끌어올린 채 자신의 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모조리 지켜보던 브라운 남작은 대문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갈 때까지 자신이 왜 쫓겨나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업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태워먹었다는데 화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무사할 거라고 생각한 자료들이었는데 뒤늦게 거한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엘레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그럼 마탑에서는 대체 무엇으로 연구를 하고 실험을 하는 거지? 방에 도착한 엘레나는 언젠가 루이사가 건네준 두꺼운 마법 책을 찾기 위해 책장을 훑었다.
서재에 들락거리느라 개인 책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 엘레나는 금방 찾고자 하는 책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두툼한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목차를 펼쳐든 엘레나는 손가락 끝을 종이에 가져다 대고 글자를 따라 훑어 내렸다.
<11장 마법 약 - 마법 약의 효능과 제조법에 관하여>
찾았다.
페이지 수를 확인한 엘레나는 두꺼운 책을 반으로 갈라 몇 페이지를 더 넘기기 시작했다. 마법 약 만드는 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기에 굳이 제조법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이런 참사를 불러들였다.
두꺼운 책은 으레 앞부분만 보다 질려버리니 필요한 것만 찾아봤던 일을 엘레나는 뒤늦게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괜히 소설책을 본다고 서재로 가지 말고 이것부터 읽어볼 걸. 엘레나는 기본 회복 마법 약 페이지를 보는 순간 헛웃음만 흘렸다.
‘무슨 전설의 마법 약도 아니고.’
분명 기밀 사항도 아닐 텐데 위드모어에 있는 어린아이들도 만들어댔던 마법 약의 제조법이 없었다. 마법 약의 효과와 색은 글과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었지만 제조법은 뒷장을 넘겨봐도 앞장을 넘겨봐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앞장에 마법 주문과 수식이 있는 걸 보면 마법서가 맞는 것 같은데 엘레나가 펼친 페이지는 책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게 대체 뭐야.”
당연히 들어가야 할 제법 구하기 힘든 마법재료 옆에는 괄호 표시를 해 둔 채 추정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엘레나는 그것을 보고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리 소실되었다고 해도 이정도로 자료가 없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만 했다. 알음알음 전해져 내려온 사실들도 있었을 텐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러면 이 책은 왜 두꺼운 거야? 전부 알맹이는 없고 빈껍데기 같은 사실들뿐인데.
엘레나는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만든 마법 약을 보고 마탑에서 달려온 이유가 있었구나. 농도를 옅게 하려고 일부러 물을 타서 싸게 많이 팔았던 약이었는데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대로 팔았다면 아마 난리가 났겠지. 귀족영애고 뭐고 마탑에서 우르르 몰려와 그대로 납치했을지도 모른다. 제법 신빙성 있는 추측에 질려버린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랬다면 다시 마법사의 탑에 가서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하게 되었을 것이다. 문득 이유를 따지러 찾아갈까도 생각해보았으나 미래를 그려보니 그리 희망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마탑에 붙잡혀 눌러 앉게 될 확률이 컸다.
그건 싫다.
그렇게 마법사의 탑에 가게 된다면 과거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 같았다. 그건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돌아가 봤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보고 싶은 사람도 없으니까. 그 시점에서 엘레나는 깔끔하게 마법사의 탑을 잊기로 했다.
그냥 돈이나 찾자. 엘레나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엘리제 오데이른이 남겨둔 수많은 재산들은 주인을 잃고 그대로 잠들어 있을 것이다. 리오가 무사히 있다고 말했으니까. 아마 그렇겠지.
‘난 왜 그렇게 리오의 말을 의심 없이 믿고 있지?’
꿈일 뿐이었는데 엘레나의 앞에 나타나는 리오는 유독 생생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을 잊게 된다던데 엘레나로 리오의 꿈을 꾸는 동안 엘레나는 리오의 잔상을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아니면 이미 잊었는데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걸까. 리오의 생각만 하면 묘하게 대화가 통한다는 느낌에 혼란만 가중되었다.
모르겠다. 일단 금고열쇠를 찾아보면 알겠지.
리오가 자신이 만들어낸 꿈일 뿐인지 아닌지는 그 때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더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고 머리만 아프니까. 생각하기를 포기한 엘레나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 너머에 서있는 사람은 그란디아 가의 집사 제롬이었다.
“또 마탑에서 온 건 아니죠?”
엘레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깐깐한 인상의 제롬은 그런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닙니다. 오렌이라 전해달라더군요.”
밑에서 엘레나가 벌인 소란을 제롬도 들은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매무새를 손봤다. 제자리에서 숨을 크게 들이킨 엘레나는 올라간 치맛단을 내리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엘레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는 사람이네요. 제가 가 볼게요.”
밖으로 나서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보던 제롬은 한두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여상한 얼굴로 집무실로 돌아갔다.
*
“오렌?”
“돌아왔습니다.”
아까와 같은 응접실이었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엘레나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오렌이 돌아왔다는 것은 일이 잘 풀렸다는 뜻이었다. 침울해져 있을 때 맞은 좋은 소식이 반가웠다. 눈으로 살피니 오렌은 특별한 부상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무사히 성공했나보네요.”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동생도..”
“이 누나야?”
“누나?”
오렌의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적갈색 눈동자가 오렌과 똑같아서 엘레나는 금방 아이의 정체를 추측해냈다. 동생을 데려왔나 보구나.
“죄송합니다. 아가씨를 꼭 뵙고 싶다고 해서..”
“괜찮아요. 그보다 동생의 거처는 정해뒀나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오렌의 동생은 아무리 잘 봐도 8살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엘레나는 웃으며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엘레나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누나. 머리카락이 엄청 길었나봐요.”
“응? 아 그거? 누나는 마법사라서 금방 자라.”
“와 신기해요. 저도 보여줄 수 있어요?”
구김살 없이 호기심만을 드러내는 아이를 보며 엘레나는 과거 위드모어에 있었을 때를 떠올렸다. 제니아 아카데미에 잠깐 다니다가 꽉 막힌 교수와 싸우고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때려치우고 왔을 때 16살 엘리제의 뒤를 따른 아이가 있었다.
들어가기도 힘든 제니아 아카데미에 7살에 들어가 신동 앨버스. 앨버스는 신동 소리를 들으며 7살에 입학했지만 3개월만에 자퇴를 하며 자퇴생 최연소 기록 또한 갈아치웠다. 엘리제와 함께 교수와 싸우고 자퇴를 했기에 더욱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었다. 게다가 평민이라는 앨버스의 신분은 각종 유언비어를 부채질했다.
그러나 앨버스는 엘리제의 양자가 되며 인생역전에 성공했다. 양자로 입적시킨 엘리제가 앨버스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대는 귀족들과 거래를 하지 않음으로써 전부 닥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앨버스는 착실히 엘리제의 뒤를 따라 마법학자의 길을 걸었다. 마력이라곤 없었던 자신과 달리 미약하나마 마력을 가지고 있었던 앨버스는 엘리제 사후 오데이른 백작의 뒤를 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엘레나는 오데이른 가문에 대해서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는 과거로 놔둘 생각이었지만 몇 시간 전 일어난 마법 약 사건 이후 엘레나는 잘 풀리고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
엘레나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적갈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물었다.
“이름이 뭐니?”
“노아예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동자에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오렌의 동생은 영특해 보였다.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엘레나의 마음에 들었다.
“괜찮으면 우리 집에 있지 않을래?”
“아가씨.”
엘레나를 허물없이 대하는 동생 덕분에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오렌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노아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충분히 많이 해주셨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린 엘레나가 이내 싱긋 웃었다.
“그럼 하나만 부탁할까요?”
“네?”
엘레나는 오렌의 말을 그냥 빈말로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쪽에서 싫다면 적절한 구실을 만들면 되는 거다. 어린 동생과 여기저기 전전하느니 그란디아 가에 붙여두는 게 더 안전하겠지. 저렇게 보여도 오렌은 길드 하나를 박살내고 나온 상황이 아닌가.
“제국 지도를 좀 구해다주세요.”
“그거야 쉽게 구할 수 있을..”
“100년 전 것으로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단정 짓던 오렌은 엘레나의 뒷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좀 어렵겠죠? 그러니 구해오면 보답으로 여기서 안전하게 살게 해드릴게요. 동생과 같이.”
엘레나는 안전하게라는 말을 특히 강조하며 상큼하게 웃었다.
*
오렌이 돌아온 뒤로 밤손님은 엘레나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암살 길드 하나가 망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은연중에 본보기가 된 것 같았다. 엘레나는 적절하게 소문을 조정했다. 그란디아 백작 가를 건드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명망 높은 가문은 아니지만 어쨌든 귀족이긴 하니 그럴듯한 소문이 되었다.
분명 소문의 진원지를 알고 있을 아버지도 입을 다문 걸 보면 그리 손해 보는 소문은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말로 가문의 치안이 한층 강화되었으니까.
어쨌든 좋은 쪽으로 변화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실과는 별개로 요즘 엘레나는 한껏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듀랜트 경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듀랜트 경. 아직 화났어요?”
“아닙니다.”
듀랜트 경을 반 강제로 불러 앉힌 엘레나는 아직 표정이 없는 저 기사를 어떻게 달래줘야하나 고민했다. 이번 생은 무조건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꼬여만 가고 바쁘기만 한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었어요. 암살자가 왔다고 하면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잘 해결됐잖아요.”
소문의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되었다. 무슨 일이건 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크고 작은 연쇄작용이 따라오기 마련이지만, 엘레나는 그 소문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독이 될 줄은 몰랐다.
“믿지 못하신 겁니까?”
한참 후 듀랜트 경은 딱 한 문장만을 뱉어냈다. 듀랜트 경의 담담함이 오히려 엘레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듀랜트 경의 말이 정곡을 찔러왔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것 같아요. 듀랜트 경은 아버지의 기사지 제 기사가 아니니까. 미안해요. 그래서 솔직히 털어놓는 거예요. 더 이상 거짓말 하고 싶지는 않네요.”
엘레나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을 택했다. 몇 년 동안 제법 좋은 관계를 유지한 정 때문이기도 했고 미안한 감정 때문이기도 했다.
“……제 주인은 여기 온 순간부터 아가씨였습니다.”
듀랜트 경의 말에 엘레나의 말문이 막혔다. 엘레나는 저 눈이 낯익었다. 올곧고 믿음이 가득한 눈.
그토록 동경했지만 절대 자신은 가질 수 없었던 눈빛이었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엘레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과한 믿음이요 애정이었다.
“듀랜트 경.”
“받아주십시오.”
아직 이렇게 못났기만 한데 어떻게 저런 눈빛으로 나를 볼 수 있는걸까?
“계속 나를 믿을 건가요? 이렇게 못났는데?”
“제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이십니다.”
“듀랜트 경. 그러면 나중에 결혼 못할 거예요. 두 번째로 예쁘다고 해 줘요.”
엘레나는 듀랜트 경의 말을 능글맞게 받아쳤다.
내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듀랜트 경이 달리 보였다. 각종 기행을 일삼아도 온전히 엘레나로 봐주는 사람. 엘레나는 듀랜트 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은 리오 이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과거와 달랐다. 엘레나는 생긋 웃었다. 엘레나로 살게 해주는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듀랜트 경의 입술이 엘레나의 손등에 닿았다.
“고마워요 듀랜트 경. 내 사람이라고 말해줘서.”
“당연한 일입니다.”
엘레나 그란디아라는 이름을 가진 뒤 엘리제는 과거와 달라지고 있었다. 엘레나의 세상은 엘리제와 달리 밝고 희망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엘레나는 만족했다. 비로소 엘레나의 세상이 온전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