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는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모님이 외출하신 것을 틈타 미뤄두었던 마법약 제조를 마치기 위해서였다.
시녀들에게 절대로 반나절 동안 들어오지 말라고 못을 박은 엘레나는 절대로 혼자 둘 수 없다던 듀랜트 경만 방 안으로 데리고 와 탁자 위에 한가득 재료를 펼쳐놓았다.
“이게 다 뭡니까 아가씨.”
“제가 뭘 좀 할 건데, 거기 필요한 재료예요.”
“위험한 일입니까?”
엘레나가 하도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해서인지 이제 듀랜트 경은 그 정도의 설명으로도 만족하고 받아들였다.
“많이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도?”
“아마도요?”
재료는 거의 준비되었지만 몇몇 재료가 빠지게 되었으니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섣부른 결과도출은 위험하기도 했고 말이다.
항상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야 한다는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엘레나는 최고의 상황보다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했다.
“기껏해야 방 하나가 폭발하는 정도?”
“당장 그만 두시죠.”
그 최악의 상황이 저 고지식한 기사님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엘레나는 생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농담이에요.”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듀랜트 경은 눈에 띄게 안도한 모습이었다.
기껏해야 한 방울 씩 섞을 건데 설마 방이 통째로 날아가지는 않겠지.
결국 엘레나는 스스로 실험의 안정성을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사실이야 어떻든 폭파시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
며칠 전 정원에서 가득 따온 포푸테나 잎들을 잘 말려 둔 엘레나는 주방에서 몰래 가져온 작은 칼로 잘게 다지기 시작했다. 돌로 빻는 것이 제일 빠르지만 방 안에 큰 돌멩이를 가져와 쾅쾅 내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 부스러질 것도 없이 고운 가루가 된 포푸테나 잎들을 손으로 비벼보며 엘레나는 이 정도면 됐다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포푸테나 가루를 물에만 섞어도 훌륭한 약이 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란디아 가의 정원에는 엘레나가 만들려고 한 약의 대부분의 재료가 갖춰져 있었다.
엘레나가 작은 병에 물과 가루를 넣고 흔들자 진한 노란빛을 띠는 액체가 완성되었다. 엘레나는 완성된 약을 제쳐두고 이번엔 나뭇가지를 썰며 또 다른 작업에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엘레나가 마지막으로 일레민 나무의 가지를 집어 들었다. 미약한 마력이 담긴 일레민 나무는 마무리 작업에 꼭 필요한 재료였다. 만약 그란디아 가의 이 나무가 정원에 없었다면 약을 만들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엘레나가 곧고 하얀 나뭇가지로 다 섞인 약을 휘젓자, 완성된 약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과거 엘리제가 만들던 것보단 못하겠지만 그럭저럭 효과는 있을 터였다.
엘레나는 영롱한 빛깔을 띠는 치료제를 햇빛에 비춰본 후 효과를 확인해보기 위해 옆에 놓인 칼을 잡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단면으로 팔 한쪽을 상처 내려고 했을 때 엘레나의 손은 듀랜트 경에게 붙잡혔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약효를 실험해 보려고요. 치료약을 만들었거든요.”
“제게 하시죠.”
몇 시간 동안 조용히 있던 듀랜트 경이 분출한 감정 때문에 순식간에 방 안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엘레나는 무섭게 노려보는 듀랜트 경의 눈을 마주하며 붙잡힌 손에 힘을 뺐다.
“듀랜트 경. 다치신 곳이 있나요?”
당연한 것처럼 엘레나의 손에서 칼을 가져가는 듀랜트 경에게 엘레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지금 만들겠습니다. 뼈가 보일 정도면 됩니까?”
엘레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아무래도 저 기사의 머릿속에는 엘레나의 이미지가 굉장히 이상하게 박혀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 약은 제가 책임져야죠. 안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칼 어서 주세요. 약간이면 되니까.”
하얀 엘레나의 손이 듀랜트 경의 손 안에 있는 칼을 회수하기 전에 듀랜트 경은 벌써 칼을 제 팔에 가져다대고 있었다.
“듀랜트 경!”
날카로운 금속에 닿은 면부터 새빨간 피가 새어나왔다. 엘레나가 놀란 마음에 듀랜트 경의 팔을 감싸 쥐었다.
“아가씨를 믿습니다.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셨어도 실망시키신 일은 없었으니까요.”
“듀랜트 경. 지금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은 거 알아요?”
“그러지 않으실 거잖습니까.”
엘레나는 뿌루퉁해져서 만들어진 치료약을 듀랜트 경의 팔에 조심스레 부었다. 똑똑 마법 약이 떨어지며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물어갔다. 날카로운 칼에 베어 벌어졌던 살이 붙고 엷은 자국만 남긴 채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엘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성공이니 다행이네요.”
만들어 낸 이상 효과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몸에 실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엘레나는 듀랜트 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실험 끝났으니까 주세요.”
듀랜트 경은 내밀어진 엘레나의 하얀 손을 한참 보다 칼을 넘겨주었다. 할 말이 많지만 참겠다는 표정이었다. 엘레나는 듀랜트 경에게 건네받은 짧은 칼을 두툼한 종이에 둘둘 싼 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앞으로 또 이러면 화낼 거예요. 제 실험은 오로지 제가 책임지게 해주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엘레나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듀랜트 경. 그럼 다음부턴 몰래 만들 거예요.”
“…….”
“저도 제 몸 아까운 건 알아요. 이젠 무턱대고 사고를 치진 않는다고요.”
정말로 그랬다. 엘레나는 이미 한 번 죽어봤으니까 자신의 몸이 아까운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며 후회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때문에 이번 생은 꼭 다르게 살아야지 매번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선 첫 번째로 돈을 많이 벌어둬야지.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엘레나는 치료약이 들어있는 병의 목을 잡고 뱅글뱅글 돌리며 싱긋 웃었다.
“듀랜트 경. 그럼 대신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듀랜트 경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마자 곧바로 엘레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는 역시 오늘도 집무실에서 잔뜩 쌓인 업무를 처리 중이신 아버지가 있었다. 반쯤 피로에 잠긴 아버지의 눈이 엘레나와 엘레나가 들고 있는 마법약 병을 향했다.
“엘레나 설명해보아라.”
“제가 만든 마법 약이예요. 아버지. 치료제라 일반 지금 유통되는 치료제보다 조금 더 좋은 효능을 가지고 있어요. 책을 보고 만든 것이고요.”
“루이사가 준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고?”
역시 아버지도 알고 계시는구나. 하지만 엘레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 치료제는 아주 기초적인 마법 약이었으므로 당연히 제조법이 실려 있겠지. 다만 부실한 제조법에 엘리제의 비법을 아주 조금 더 첨가했을 뿐이다.
“물론 제가 조금 변형했어요. 재료가 모두 없었거든요. 레아르드 황가의 꽃인 릴리안테를 어떻게 구하겠어요?”
“그래서 그 약으로 뭘 하고 싶으냐?”
“아버지께서 팔아주셨으면 해요. 장담하지만 충분히 상품가치가 있는 약이예요.”
엘레나가 듀랜트 경의 옆구리를 찌르자 반사적으로 동의의 말을 내뱉었다. 약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고 졸지에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된 듀랜트 경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잘한다는 듯 칭찬의 뜻을 듬뿍 담아 듀랜트 경을 응시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던 아버지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엘레나의 자신감은 치료제의 매출을 보며 나날이 상승되어갔다. 처음에 그란디아 영지 내에서만 판매하던 엘레나의 약은 점점 이웃 영지로 수도 쪽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았고 가격이 저렴했기에 더욱 더 팔기 좋은 물품이 된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그란디아 백작가의 위상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나의 치료제는 그란디아 영지 내에 있는 상단에서만 취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치료제의 제조법과 제조한 사람에 대해선 철저히 함구해 이뤄낸 결과이기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엘레나의 가장 큰 자산은 아직 남아 있었다. 엘레나는 비로소 과거의 지식들을 제대로 활용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엘레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이번에 상단을 통해 들여온 각종 재료들을 늘어놓았다.
다음엔 어떤 약을 만들어볼까?
엘레나의 변화할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러나 5년 후 엘레나는 그 결과를 예상치 못한 쪽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
15살의 엘레나 그란디아는 제국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꼽으라고 했을 때 가장 처음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게 자라났다.
눈송이 같이 새하얀 피부에, 황금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빛나고 맑은 호박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넋을 놓게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더욱 빛나게 하는 푸른색 머리카락은 엘레나 그란디아를 대표하는 외모적 특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엘레나는 긴장으로 몸이 굳어진 상태였다. 바람에 베일 것 같은 싸늘한 날씨의 어느 날이었다.
‘앞으로 10걸음 남짓.’
엘레나는 숨을 죽이며 침대 위에서 작게 들리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황태자비로 내정될 때부터 불안하더니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5년 동안 그란디아 백작 가 재산이 2배로 불어나자 엘레나 그란디아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게 되며 유명세를 탔다. 그런 엘레나의 뒤로 황태자비로 내정되었다는 소문도 줄기차게 따라다녔다.
아니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데 황태자비라니 말이 되냐고 면전에다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엘레나를 절대 궁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러냐고 앞에 주저앉아 징징거려보기도 했으나 무심하기가 돌 같은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진작 그 황태자비 따위는 다른 영애에게 주라며, 만인의 사랑을 받을 황태자씩이나 되어 그것도 하지 못하냐고 차버렸어야 했는데.
엘레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면 혼자서라도 황궁에 쳐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이든 사람이라면 지나쳐버릴 게 틀림없을 사락거리는 소리는 엘레나의 정신을 더욱 예민하게 일깨웠다. 엘레나의 방에 몰래 침범한 밤손님은 서서히 엘레나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 세 걸음.
“멈춰.”
순간 바닥이 진동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어린 엘레나가 심심함에 몸부림칠 때 방 안 가득 마법진을 그려둬서 습관적으로 내뱉고 말았다.
분명 마력이 없어 작동하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엘레나에게 다가오던 남자는 엘레나의 명령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발을 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남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엘레나는 품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내서 한숨섞인 말을 내뱉었다.
“암살자라니 이래서 유명해지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