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엘레나는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방 안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엘레나는 이제 정말로 정원 산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듀랜트 경을 대동한 채였다.
서재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육아의 책임까지 떠맡게 된 듀랜트 경에게 미안했던 엘레나는 그 날 듀랜트 경에게 금화 하나를 내밀었었다. 그러자 듀랜트 경은 굳은 표정으로 엘레나가 내민 금화를 거절했다.
“아가씨, 그건 제 잘못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고 있어. 그래도 미안해. 사과의 뜻으로 선물 주고 싶었는데..”
엘레나는 지금 저택을 벗어날 수 없다. 당연히 물건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침울함에 엘레나가 웅얼거리며 말하자 그제야 엘레나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듀랜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시 엘레나의 손을 꼭 쥐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아가씨가 가진 것 중 하나를 주십시오.”
“이것도 내 용돈인데 안 돼?”
딱딱한 금화의 감촉이 느껴지자 엘레나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과거 엘리제의 세상은 대가와 책임이 확실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엘리제가 길거리에서 리오와 함께 도둑질을 하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다가, 마법사의 탑에 들어가고 3년 후 이뤄내고 깨달은 사실이었다.
본격적으로 마법사의 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며 자신의 사유재산이 무엇인지 알게 된 엘리제는 이후 자신의 행동엔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자 했다. 주요 상대방이 바로 엘리제의 옆에서 연구를 돕던 조수 하이너였다.
‘동정할 거면 돈으로 주세요.’
‘엘리제님, 금화 1개 정도면 일주일 동안 이어진 야근에 대해 충분한 보상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고급인력이니까요.’
딱딱한 관계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엘리제는 오히려 편했다. 자신이 사유재산을 소중하게 여겼던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이 당연하다 믿었다. 때문에 엘리제는 다른 사람이 요구하는 대가가 타당하다 생각한다면 그대로 해주는 편이었다.
이후 하이너에게 줄줄이 동생이 딸려있는 것을 알게 된 엘리제가 대가의 두 배를 지급해 주는 일도 잦았다. 그만큼 자신이 마음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버릇이 또 나왔네.’
엘레나는 주먹을 더욱 꼭 쥐었다. 주로 물질적인 것으로 대가를 주고받는 게 당연했던 엘리제가 바뀌게 된 계기는 리오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미안하다고. 전에 저 잔 가지고 싶어 하지 않았어? 이 정도면 똑같은 걸 살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용서해줄래?’
그 말을 들은 리오는 불같이 화를 냈었다. 엘리제는 리오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렇게 선을 긋는 것이 싫다고, 그것이 힘들면 자신에게만은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던 리오에게 맞서 엘레나는 그날 리오와 소리를 높이며 싸웠다.
꽉 막힌 고집불통이라느니 눈치 없는 멍청이라느니 한바탕 설전이 오가고 나서 결국 엘리제는 리오의 말을 들어주었다. 정확히 일주일 간 말을 하지 않고 삐친 티를 팍팍 내는 리오의 고집 때문이었다. 이후 리오가 유난히 질색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던 엘리제는 조수인 하이너를 제외하곤 불쑥불쑥 금화를 내미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 하나면 돼.’
‘알았어. 다신 안 그럴게.’
옛 생각이 떠오르자 엘레나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엘레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아있던 듀랜트 경은 어린 엘레나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고민하는 중인 것 같았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 뒤편에 남기신 쿠키면 될 것 같습니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까봐 입술을 꼭 깨물었다. 덩치 큰 남자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자신이 남긴 초코쿠키를 탐내는 모습은 굉장히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렸다.
“정말로 이거면 돼?”
엘레나는 뒤돌아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방 안에서 간식을 먹다 루이사에게 불려간 참이라 제법 많은 양의 쿠키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정말 이거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꽤 고급품이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가씨께서 먼저 미안하다고 해주셨으니까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듀랜트 경이 눈에 띠게 다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시름 덜었다는 듯 미소 짓는 모습에 엘레나의 뺨이 달아올랐다. 항상 딱딱한 표정이라 몰랐는데 듀랜트 경도 제법 미남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날카로운 인상이 미소를 짓는 순간 확 달라졌다. 마치 사람이 변하는 마법 같았다.
“듀랜트 경. 혹시 동생 있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그랬구나. 엘레나는 그림으로 그려낸 것 같은 미소를 뿌렸다. 그야 이렇게 달달한 과자를 듀랜트 경이 좋아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엘레나는 시녀를 불러 커다란 봉투를 가져오게 했다. 시녀를 내보낸 엘레나는 의아해하는 듀랜트의 호기심을 풀어주지 않고 사뿐사뿐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 밑에서 작은 상자를 끄집어냈다. 엘레나는 자랑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어 듀랜트에게 보여주었다.
상자의 안에 든 것은 엘레나가 그동안 숨겨두었던 과자였다. 엘레나는 그 상자에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번엔 침대 옆 모퉁이였다. 작은 틈 사이에서 여김 없이 숨겨져 있던 작은 상자가 나타났다. 그 외에 엘레나가 숨겨둔 과자는 식탁 밑에서도 서랍 안에서도 심지어 창문 밖에서도 나타났다.
저건 대체 언제 매달아 둔 거지라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듀랜트의 표정에 엘레나가 킥킥거렸다. 듀랜트가 그 모습을 멍하게 보는 사이 커다란 봉투에 과자를 가득 담은 엘레나는 굉장히 묵직해진 봉투를 듀랜트 경의 품에 안겨주었다.
“전부 먹어도 되는 겁니까?”
“응. 다 얼마 안 된 것들이야. 기억 안나?”
시녀들의 잔소리가 시작될 때면 엘레나는 꼭 쿠키가 먹고 싶다는 말로 적당한 시점에 말을 끊어냈다. 요구하는 종류도 다양해서 시녀들이 뒤로 하는 이야기가 많았기에 듀랜트도 엘레나의 심술에 대해 알았다. 이런 식으로 숨겨두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눈앞에 수북이 쌓인 쿠키들을 보며 그제야 듀랜트 경은 아가씨의 심술로 배달된 수많은 쿠키들의 행방에 대한 미스터리를 해결했다.
“물론 기억납니다, 아가씨.”
엘레나는 씩 웃으며 입가로 검지를 갖다 댔다. 듀랜트 경은 그런 엘레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함께 장난을 모의한 악동 같은 미소였다.
*
개인적인 사정으로 서재에 갈 이유가 없어진 엘레나는 이제 멍하게 정원에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산책을 즐겨하게 되었지만 조그만 몸을 이끌고 한정되어 있는 곳을 다니는 것에 질려버렸다. 대신 엘레나는 그동안 지나쳐버렸던 식물들에 대한 관찰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동안 자세히 살피지 않아 몰랐지만 그란디아 가의 정원은 공들인 티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100년 전에 조각조각 갈라져 있던 나라 덕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각종식물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엘레나는 새삼 레아르드 제국이 통일된 하나의 제국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위드모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아, 찾았다.”
엘레나는 정원 한가운데 자리한 백색의 일레민 나무 밑에 퍼져 앉았다. 위드모어에서만 자라는 일레민 나무가 이 정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엘레나는 꼭 일레민 나무를 찾았다. 위드모어에 있는 마법사의 탑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뿌리와 줄기, 가지가 모두 하얀색인 일레민 나무는 독특하게 푸른색의 잎이 맺히는 나무였다. 어느 마법사가 개량에 성공한 품종이었다는데 감히 나무라고 부를 수 없는 아름다움에 위드모어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겠다는 이유로 마법사의 탑 주변에 일레민 나무를 가득 심었다.
어떤 이름모를 멍청이 짓이었지만 덕분에 일레민 나무로 둘러싸이게 된 마법사의 탑은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수많은 귀족들이 위드모어를 찾아 일레민 나무를 배양받길 원했으나 다른 곳에 심은 일레민 나무는 잘 자라지 못했다고 했다. 나만은 꼭 성공시키겠다는 귀족들의 어쭙잖은 도전의식과 높은 수요 덕분에 한 때는 일레민 나무의 묘목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었지.
그런데 100년 후 변방의 그란디아 가의 정원에서도 일레민 나무를 볼 수 있는 걸 보면 아마 어떤 귀족이 정말로 일레민 나무를 키워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성인 한 사람이 들어가도 끄떡없을 것 같은 그늘을 만들어 내려면 키워내는 데 족히 30년은 걸렸을 테니 방법이 알려진 건 대략 35년에서 50년 정도가 아닐까. 이 나무가 첫 번째 성공사례는 아닐테니 말이다.
나무 그늘 밑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낸 엘레나는 눈에 보이는 나무들을 하나씩 둘러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나무를 심어두었던 것에는 그란디아 백작의 지시가 있었겠지.
엘레나는 아름답게 가꾸어진 나무를 하나하나 돌아보며 머릿속으로 저 나무의 뿌리로는 어떤 마법 약을 만들고 그 마법 약의 효과는 무엇이며, 하는 식으로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되뇌고 있었다.
다행히 그러는 동안 엘레나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정원이 넓다는 것이 엘레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당분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나중에 다시 서재에 방문했을 때 감시가 소홀해질 것이다.
“……한가요?”
“부인의 생각에는…….”
그렇게 정원을 거닐던 엘레나가 곧고 단단하게 자란 세티아비 나무를 감탄하며 보고 있을 때, 멀리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티아비 나무를 툭툭 두드려 나중에 보기로 한 엘레나는 호기심에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화사한 금색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하자 엘레나가 제자리에 뚝 멈춰 섰다.
갑자기 웬 소란인가 했더니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루이사가 정원에서 티파티를 하는 모양이었다. 루이사의 티파티라고 해봤자 초대된 사람이 많지 않아 티파티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딸인 자신이 단 한 번의 언질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랬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일에 상처받을 아이가 아니었던 엘레나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엘레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들려오기 전 까지는.
“아가씨는 통 어린아이 같지 않아요. 너무 조숙해서 오히려 걱정이 될 지경이에요.”
엘레나의 유모인 에바의 목소리였다. 어디를 갔나 했더니 루이사의 부름을 받았었구나. 그나저나 조숙하다고? 에바가 엘레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다. 나름 노력한다고 했는데 역시 오랜 시간을 옆에 머물러 정확한 관찰이 가능했나 보다.
“얌전해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가요?”
루이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레나는 숨을 죽이며 몸을 낮췄다. 엘레나의 육감이 저 대화는 꼭 들어둬야 한다고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뒤에 있을 듀랜트 경은 기사니 들키지 않겠지.
“마님, 아가씨는 정도가 심한 편이세요. 책만 쥐어주면 몇 시간이고 계속 앉아서 책을 보신다니까요. 가끔 행동하는 걸 보면 안심이 될 때도 있지만 저 나이 때는 뛰어노는 편이 더 좋을 거예요.”
“꼭 그래야 하나요?”
생각보다 루이사는 엘레나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고용인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숙덕거릴 때만 제제를 가할 생각인가.
“하지만 또 이든 도련님처럼..”
“그만.”
엘레나는 아쉬움에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정보를 얻기 힘들어서야 이 집에서 무사히 살 수 있을까. 분명 오라버니와 루이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고민하던 엘레나는 리오의 문제를 해결한 후 오라버니라는 이든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심심할 일이 없이 바빠질 것 같았다.
“그럼, 또래 아이들을 불러들이면 나아질까요?”
루이사에게 느껴지는 꺼림칙함에 대한 단서를 찾은 엘레나가 자리를 뜨려고 했을 때 엘레나에게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루이사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진심인가? 또래는 무슨. 또래친구를 만들어주겠다는 뜻으로 여자아이를 불러들이면 분명 보모가 될 것이 분명했다. 5살짜리 아이들을 생각하자 엘레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맙소사, 절대 안 돼. 엘레나는 훔쳐들은 대화 이후 어떻게 하면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수께끼 풀이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