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이후 듀랜트 경이 엘레나를 찾아왔다. “괜찮습니다.”라는 입버릇을 가지고 있는 듀랜트는 엘레나가 아무리 쫓아내보려 해도 방 밖을 비우는 법이 없었다.
단호한 빛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결국 단독 행동을 깔끔하게 포기한 엘레나는 대신 다른 쪽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발이 묶여버린 엘레나의 공략대상은 바로 유모였다.
이용할 생각을 앞세우니 좀 찜찜하긴 했지만 흔히 부모는 자식이 천재성을 나타내면 더 흥분하는 법이 아니던가. 엘레나는 유모가 자신의 아군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보고 싶다는 말로 유모인 에바를 불러들인 엘레나는 슬쩍 말을 던졌다.
“에바. 에바는 마력에 대해 알아?”
“아가씨, 그런 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책에서 봤어. 세상엔 마력을 가진 마법사가 있다고.”
어머라며 감탄사를 내뱉던 에바는 이미 엘레나의 의도대로 잔뜩 들뜬 얼굴로 웃고 있었다. 기특하다는 뜻을 숨기지 않는 에바를 보며 엘레나는 방긋 웃었다. 최대한 천진난만하게 보여야 했다.
“나는 마력이 없어?”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엘레나는 멈추지 않았다. 마력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제 안에서 마력의 존재를 찾아보려 해도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손을 움직일 수 있을 때부터 꼼지락거리며 마법진을 그려봤으니까.
그 때의 좌절감은 엘레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 마력도 없는 몸뚱이라니!라며 욕했던 것도 똑똑히 말이다.
“글쎄요, 마력이 있다면 마법사님을 불러서 알아봐야 할 거예요. 아가씨 나이에는 아직 잘 알 수 없구요. 나중에 조금 더 자라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엘레나는 에바의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력은 자연에서 받는 힘, 그렇기에 마력을 담을 수 있는 마법사는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마력을 느끼고 사용한다. 특히 교육받은 후 자신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성인 마법사보다 어린 아이들이 더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렇기에 마력을 가진 어린아이의 주변엔 이상한 일이 생긴다.
하얀 빛이 주변에 둥둥 떠다닌다거나 신체의 일부분이 빛난다거나, 아니면 빛으로 이루어진 이형의 존재들이 나타난다고 들었다. 리오의 경우엔 붉은 빛의 불꽃들이 가득했었다고 했었지.
어쨌든 마력이 있다면 모를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사람마다 발현 시기는 다르지만 대개 5살 전후에 반응이 나타나기에 엘레나는 이미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아마 에바는 알고 있을 것이다. 엘레나의 몸에는 단 한 줌의 마력도 없다는 것을.
그러나 엘레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에바의 반응이 미묘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란디아 백작가에서는 마법사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마법도구가 굉장히 줄어들어서 마법사들의 위상도 함께 줄어든 것일까? 그렇다면 저번에 엘레나가 사고를 쳤을 때 이것은 마법도구이니 주의하라는 말을 들었을 법도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엘레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인 에셀로드는 마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렸다. 에바도 그런 집안의 분위기를 알고 있기에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기다려보라고.
“마법사 보고 싶어. 궁금해.”
사정이 그렇다는 건 대충 예상이 가능했지만 엘레나는 호기심이 가장 먼저 앞서는 사람이었다. 꼭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작은 손으로 에바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엘레나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에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법사가 안 되면 책이라도 빌려줘.”
“…….”
“그것도 안 돼?”
밖에서 뛰어 노는 것보다 책이 더 좋다는 아이를 유모는 기특함 반 걱정 반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잔뜩 기대하는 아이에게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엘레나는 거리낌 없이 그 점을 악용했다.
“응? 나도 보고 싶어.”
결국 엘레나는 에바에게서 최대한 노력해보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인 자신이라면 몰라도 유모의 말은 귀담아 들어주겠지. 엘레나는 밝은 미래를 꿈꾸며 방긋방긋 웃었다.
*
그 날 이후 엘레나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매일 밤 꿈속에서는 리오를 만나고 낮이 되면 듀랜트 경과 함께 본채의 서재로 향했다. 엘레나는 서재에서 듀랜트에게 자유로운 시간을 요구했다. 듀랜트 경이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면 불편해서 책을 읽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를 붙였다.
듀랜트는 서재에서 위험요소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지 엘레나의 곁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엘레나는 듀랜트 몰래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볼 수 있었다.
듀랜트는 엘레나가 동화를 읽는 줄로만 알고 있겠지만 엘레나는 동화책 안쪽에 다른 소설책을 끼워 넣고 빠른 속도로 읽어가고 있었다. 엘리제로 살 땐 복잡한 수식이 가득 적혀있거나 쓸데없이 두꺼운 책밖에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마치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생각보다 소설도 재미있었다. 엘레나가 요즘 한창 빠져있는 소설은 스릴러였다. 어린아이가 읽기엔 잔혹한 묘사들이 실감나게 되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엘레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 내용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엘레나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머, 지금 아가씨 뭘 보시는 거예요?”
“……글자 봐.”
“네?”
하필 기괴한 삽화가 들어있는 페이지를 보고 있을 때 들이닥친 서재담당 시녀의 기겁한 얼굴이 엘레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하게 잡아 뗄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아직 5살인 엘레나가 스릴러 소설을 이해할 리가 없으니까.
그나저나 듀랜트 경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곁눈질로 굳어버린 듀랜트 경을 본 엘레나는 용돈이라고 받았던 금화로 재앙을 맞은 기사를 위해 선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엘레나가 당연히 그림책을 보는 줄 알았던 시녀는 곧장 엘레나의 어머니에게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서재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레나는 어머니인 루이사 그란디아의 부름을 받았다. 엘레나는 루이사의 방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마주보고 앉아 불편한 기색을 애써 지웠다. 아버지 다음엔 어머니인걸까.
“엘레나. 혹시 아까 읽던 책 기억나니?”
엘레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잡아떼기로 한 엘레나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함이 묻어났다. 엘레나는 아버지와 숨 막히는 티타임을 보낸 이후 연기연습에 매진했다. 일단 순진무구한 표정을 위주로.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루이사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엘레나는 어머니인 루이사가 불편했다. 지난 생에서 평생 존재하지도 않았던 어머니는 엘레나에게 갑자기 나타난 직장상사에 더 가까웠다.
루이사가 유약하고 소극적인 성격이라 엘레나와 마주치는 일이 적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조용하고 얌전하게 사고치지 않고 지내면 한 달에 몇 번 볼까말까 한 관계. 덕분에 엘레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이렇게 루이사와 마주칠 때마다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엘레나는 분홍색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루이사의 반응을 기다렸다. 옅은 색의 찻물이 일렁였다. 시간이 지나고 점점 답답해진 엘레나가 고개를 들자 루이사의 날카로운 녹색 눈동자가 엘레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책을 왜 읽고 있었니?”
“표지가 예뻐서요.”
엘레나가 즉시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엘레나에겐 변명거리가 있었다. 스릴러 소설답지 않게 알록달록한 표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다행스러웠다. 엘레나가 대답을 내놓은 뒤에도 루이사는 조목조목 다른 질문을 내놓았다. 어떤 점이 예뻤니? 다른 책은 예쁘지 않았니? 위쪽에 있는 책들은 본 적이 있니? 라는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엘레나는 루이사에게 쫓기는 느낌을 받았다.
“손에 닿지 않는 책은 어떻게 할 셈이었니?”
“……안 읽으려고 했어요.”
망했다. 루이사의 질문공세에 휘말려 버린 엘레나가 굳은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엘레나는 루이사의 질문이 처음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루이사가 엘레나를 5살짜리 아이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면 문제가 없겠구나. 레나, 엄마는 네가 무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이사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엘레나는 어머니가 피곤하니 돌아가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루이사와 입씨름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잔뜩 휘말려 버렸지만.
엘레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표하고 루이사에게서 등을 돌렸다. 가능하면 다시 마주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한 척 했지만 사실 피곤한 건 엘레나 쪽이었다.
보통의 딸이라면 어머니에게서 친밀감을 느낀다고 하던데 엘레나는 루이사에게서 전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엘레나와 단 하나도 닮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박색 눈동자와 푸른 머리칼을 가진 엘레나와 녹색 눈동자와 옅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루이사는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아도 모녀사이임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전혀 닮지 않았다. 설마 계모인가?
“휴.”
그걸 따져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말수가 없는 에셀로드보다 조곤조곤 따지고 드는 루이사가 더욱 불편했던 엘레나는 차라리 루이사가 계모이기를 바랐다.
그나저나 무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엘레나가 루이사에게 그런 충고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게 5살 꼬마아이에게 할 말이었을까? 진심으로? 설마 집을 나갔다는 오라버니 때문인가? 엘레나는 날이 갈수록 복잡한 문제만 떠안게 되는 것 같아 머리가 아팠다. 이번 생은 정말로 편하게 지내다 가고 싶었는데.
엘레나는 타박타박 자신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오른 사실에 그 자리에서 뚝 멈춰섰다. 왜 여태껏 이렇게 시간을 낭비했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엘레나는 곧장 본채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루이사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서재 정리를 대대적으로 할 모양이니 그 사이에 책 한 권이라도 건져야했다.
그러나 엘레나가 서재에 도착한 뒤 보게 된 광경은 수많은 시종들이 책 더미를 옮기는 모습이었다. 쌓아올린 책들의 탑 가운데에서 낙심한 엘레나가 두 어깨를 축 떨어트렸다. 이후 엘레나의 손에 닿는 높이의 책들이 모두 아이들을
위한 그림 동화책으로 바뀌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