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의 시야가 뿌옇게 물들었다. 마치 아득한 꿈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자욱한 안개가 낀 듯 잔뜩 흐려진 광경 속에서 눈에 힘을 줘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앞은 여전히 뿌옇기만 했고, 덕분에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엘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처음 꾼 자각몽이 이따위라니.
‘아무것도 안 보이네.’
실의에 빠진 엘레나의 귓가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엘레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느 틈에 자그마한 키를 가진 아이가 엘레나의 옆에 서 있었다.
‘엘리제.’
자신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붉은 눈을 본 엘레나는 그제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 왠지 모르게 울컥한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오.’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자 눈 깜박할 새 어른의 키로 바뀐 리오가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만난 리오를 놓치기 싫었던 엘레나는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네 모습이 제대로 안 보여.’
‘당연하지. 꿈이니까.’
언제는 리오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이 있었을까? 리오는 언제나 엘리제에게 말했다. 네 생각이 모두 옳고 당연하다고. 엘리제는 그 덕분에 추한 얼굴을 가지고도 모래성 같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던 자존감을 지켜낼 수 있었다.
‘리오. 너는 살아있어?’
엘리제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비록 모습도 신분도 달라지긴 했지만 엘레나는 자신이 엘리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까? 그래서 엘레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언젠가 환생한 리오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았을까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엘레나는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에. 엘레나는 전생에 딱 하나 밖에 없었던 친구이자 전우였던 리오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 엘레나의 마음이 꿈속에 리오를 불러들인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죽어버린 후 리오는 어떻게 됐을까? 엘레나는 무덤가에 잠들어있는 리오의 앞에 가게 된다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엘레나는 가능한 희망적인 상황을 꿈꿨다. 만약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도 대마법사가 되어 마법사의 탑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다 갔을 거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한 걸 왜 물어.’
리오가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여긴 엘레나의 꿈이 맞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뿌연 시야 속에서 엘레나는 안심했다는 듯이 픽 웃었다. 꿈속이니까. 그러니까 살아있는 리오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엘레나는 가끔 이런 것도 좋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었어, 리오.’
리오는 단 하나밖에 없었던 친구였다. 리오에게도 엘리제에게도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 아니 같이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았으니 전우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편협한 인간관계라고 서로를 놀리던 일이 아득한 과거인 것 같았다. 실제로 100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차마 행복했어? 라고 묻지 못한 엘레나가 리오의 얼굴로 추정되는 곳을 보며 머뭇거리자 다시 한 번 따뜻한 손이 엘레나를 다독였다.
‘곧 만나게 될 거야.’
‘곧?’
의아함은 길지 않았다. 엘레나의 물음을 끝으로 시야가 일그러지며 리오의 손이 떨어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리오!’
이대로 꿈이 끝나버릴 것만 같아 엘레나가 급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조금만 기다려.’
엘레나의 이마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엘레나는 혼란스러움에 이마로 손을 가져다댔다. 당연하게도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나의 엘리제.’
리오의 마지막말은 웅웅거리는 소리 탓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리오의 말은 엘레나 자신이 받아들인 의미와는 달라야 했으니까.
*
옅게 남은 꿈의 잔상에 엘레나는 눈을 뜨고도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생각에 잠겼다. 무의식이었나. 리오가 보고 싶었던 건 맞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나의 엘리제라는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엘레나는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내가 리오를 좋아했었나?’
엘리제의 기억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오와의 관계는 그냥 동료이자 가족 같은 면이 있었다. 마법사의 탑에서 함께 지내며 남매 같다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었는데. 엘레나는 괜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하룻밤의 의미없는 꿈이겠지. 그러나 연이어 나타나는 리오의 그림자는 엘레나를 더욱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또 꿨어.”
어젯밤 꿈속에 또 리오가 나타났다. 반가운 것도 한두 번이지 일주일 째 나타나는 리오의 모습에 엘레나는 갑갑함만 더해갔다. 예지몽같은 것을 믿지 않는 편이었지만 엘레나는 계속 연이어 자신의 꿈속에 리오가 나오자 슬슬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들리지 않을 목소리임을 알고 있다. 대답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계속 꿈속에 등장하니 기대하게 된다. 혹시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리오!’
‘엘.’
또인가 싶었던 엘레나는 리오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눈을 크게 떴다. 일주일 만에 달라진 호칭이었다. 이따금씩 리오는 엘리제를 엘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리오에게 꼭 이상한 일이 생기는 통에 엘리제는 리오가 엘이라고 부르면 절로 주변을 경계하게 되었다. 스승님께 혼이 난다거나 아니면 마법사의 탑 일부가 폭발한다거나, 위드모어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거나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오의 표정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뿌옇게만 보이는 리오의 표정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꼭 내가 ……줄게.’
‘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여전히 두루뭉술한 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리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엘레나의 꿈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리오가 사라지면 꿈 속에서 쫓겨나듯 현실로 돌아오는 엘레나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오, 성질나! 엘레나는 주먹을 쥐고 이불을 퍽퍽 쳐댔다. 전생에 학자였던 엘레나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나오면 답답해졌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었다. 이렇게 원인을 밝혀낼 수 없는 문제는 더더욱 그랬다. 결국 엘레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마법사의 탑에 찾아가 봐야하나?”
아직 꿈을 다루고 연구하는 마법사가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리베리오에 대해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꿈은 그 다음에 해결할 일이다. 리오에 대해 알아보면 왜 자신의 꿈에 리오가 계속 나타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리오가 그대로 스승님 밑에서 살아있었다면 분명 대마법사의 이름을 잇는 로이스가 되었을 것이다. 스승님인 카르나 로이스가 4대 로이스였으니 5대를 찾아보면 되겠지.
‘리오 알고 있지? 나는 한 번 마음을 먹으면 꼭 알아내야 해.’
이제 리오에 대해 알아볼 마음이 생긴 엘레나는 몸을 일으켜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옷장을 열어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은 엘레나는 문을 벌컥 열고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잠깐 자신이 귀족가문의 고명딸이라는 것을 잊은 엘레나는 당연히 붙잡혔다. 방 밖을 나서 열 걸음도 채 옮기기 전의 일이었다.
“레나, 어딜 가느냐?”
“…….”
엘레나를 붙잡은 사람은 엘레나와 똑같은 푸른 머리를 가진 아버지 에셀로드 그란디아 백작이었다. 중후한 멋을 풍기는 에셀로드는 엘레나의 안전에 대해 유독 예민한 태도였다.
얼마 전 에셀로드의 앞에서 호기심을 핑계 삼아 집 안의 마법물품을 건드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현관 옆에 쓰레기처럼 방치해 둬서 마법물품인지 모르나 싶어 손을 댔는데 하필 그게 침입자용 함정이었지.
옛날엔 주로 서로를 놀라게 하던 장난감 취급을 받던 마법물품이라 그 속에서 창이 튀어나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엘레나의 위로 쏟아지는 창을 검으로 쳐서 멀리 날려 보낸 후 에셀로드는 말없이 엘레나를 빤히 보기만 했다.
괜히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와 신기해요.”라고 했다가 한 시간 동안 아버지와 단 둘이 숨 막히던 티타임을 가졌던 것을 엘레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이후 에셀로드는 조심해라는 한 마디를 남겼을 뿐이었지만, 엘레나는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 때문에 내심 찔리는 면이 있었던 엘레나는 곤란함에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며 배시시 웃어버렸다. 아무리 당당하게 말을 한다 해도 표면적인 엘레나의 나이는 아직 5살이었다.
대마법사 리베리오 로이스에 대해 알고 싶어서 나가는 길이었다고 하면 어떤 식으로 말이 되돌아올지 몰랐다. 그 일을 해결하는 상상을 하니 머리가 아파졌다. 왜 집에는 마법역사서가 없을까. 이번 생은 무조건 편하게 호위호식하며 살고 싶었던 엘레나는 잠시 호기심을 덮어두는 것을 택했다.
“정원에요, 아버지.”
“같이 가도록 하지.”
에셀로드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전생에 제대로 된 부정을 느껴볼 일이 없었던 엘레나는 여전히 에셀로드가 어색하기만 했다. 차라리 에셀로드가 마법사였다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엘레나가 아는 바로 에셀로드는 기사의 작위만을 가지고 있는 지방 귀족이었다. 수도 세니스까지 마차를 타고 가면 4시간이 걸릴 변방에 이동 게이트도 하나 없다는 그야말로 시골에 가까운 영지가 바로 그란디아 백작령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엘레나는 충격을 받았다. 엘리제의 생 대부분을 도심 한가운데서 보냈기 때문이냐면 전혀 아니었다. 엘레나가 충격 받은 원인은 이동 게이트의 개수 때문이었다.
왜 100년이나 지났는데 게이트 수는 거의 그대로인 것일까. 대륙 지도를 보며 기억하는 곳을 족족 짚어내고 남은 이동 게이트의 개수를 세어보니 열 손가락이 모자라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전부 뭘 한 거지? 죄다 월급도둑들이었나?
“레나, 앞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듀랜트 경에게 말을 해라.”
생각에 빠졌던 레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온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엘레나는 앞서가는 아버지를 보며 되물었다.
“듀랜트 경이요?”
“오늘 네 앞으로 보내줄 테니 잊지 말거라.”
“…….”
자유로운 혹은 은밀한 외출 생활이 이제 끝이 났다는 사실을 엘레나는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표정 연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건데. 아까 당황한 것이 그대로 보여졌나보다.
아버지는 엘레나의 생각보다 굉장히 예민한 편이었다.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나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툭 얹어졌다.
“네 엄마가 걱정할 테니 너도 조심하거라.”
“……네.”
엘레나는 옅게 한숨을 흘렸다. 어머니가 걱정한다니. 엘레나는 잠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내색을 하시는 분이셨던가. 뭐 부부간의 일을 다 알 수는 없으니 아버지는 다르겠지. 적어도 이번 생에서의 아버지는 애처가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