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조명이 바닥을 향해 강렬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보기에도 돈을 엄청 들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황금빛으로 도배된 내궁에서는 한창 레아르드 제국의 황태자 제이스 레아르드의 탄신 기념 사교파티가 진행 중이었다.
시끌벅적한 곳에서 용케 자리를 피해 한 쪽 구석에 서있던 엘레나는 이 보람도 없을 자리를 굳이 지켜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파티의 주인공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엘레나는 그 다음 스케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몰래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탈출에 성공해도 나중에 아빠인 그란디아 백작에게 사실이 알려지면 엘레나는 제법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자리를 질색하는 엘레나는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사교계의 화려한 이면엔 대개 그 아름다움에 홀려 추잡한 것들도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함께 가실까요?”
그래, 바로 지금과 같이 말이다.
엘레나는 자신에게 수작을 부리는 이름도 모를 남자의 손을 쳐냈다. 고고하게 고개를 들고 너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을 가득 담아 엘레나는 살짝 웃었다.
“죄송해요, 저는 이미 일행이 있답니다.”
흔한 핑계였으나 그만큼 잘 먹히는 핑계이기도 했다. 보통은 엘레나가 이런 핑계를 대면 스스로 자신감을 잃고 나가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왔다.
“아까부터 혼자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
이런 젠장. 엘레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다시 손을 내미는 것으로 봐선 엘레나의 성격을 모르거나, 엘레나가 쳤던 수많은 사건을 모르거나, 엘레나의 집안을 모르는 세 가지 중 하나의 경우 같았다.
결론은 하나같이 다 멍청이라는 소리였다. 지체 없이 자리를 떠났어야 했는데 괜히 황태자의 얼굴이라도 보겠다며 미적대다 일이 어그러졌다.
“곤란하네요.”
엘레나는 솔직하게 나가기로 했다. 알아듣지 못하면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것만으로 떨어져나가기만 한다면.
“시간을 내주신다면 영애를 즐겁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능글맞은 말이었으나 뜻밖의 말에 거절의 의사를 드러내려 하던 엘레나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유들유들하게 웃는 얼굴에 흥미가 생겼다. 어차피 이 파티는 따분하기 그지없었으니 재밌는 일 하나라도 건져 가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영식의 말을 먼저 들어보고 싶네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으시죠?”
상대방은 엘레나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관없을 테니 겉으로만 존중의 뜻을 담았다. 흥미가 없다면 곱게 보내주지 않겠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한 엘레나는 가식적으로 한쪽 손으로 부채를 펼쳐들어 얼굴의 반을 슬쩍 가렸다. 기꺼이 들어 줄 테니 어디한번 말해보라는 신호였다. 자리를 옮기자고 하면 가차 없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다행히 영식은 그리 눈치가 바닥이 아니었던 듯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는 네온 듀베르라고 합니다, 레이디. 혹시 들어보셨나요?”
차마 면전에 대고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엘레나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그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네온 듀베르는 뒷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제니아 아카데미를 졸업한 듀베르 자작입니다.”
엘레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창피하지만이라고 시작되는 자기자랑이 이어졌다. 서론이 제법 길었지만 제법 참을 만 했다. 열심히 설명하는 네온 듀베르의 태도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엘레나는 제니아 아카데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제법 명망이 높았고 싹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교육시켜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는 아카데미엔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명망이 높은 만큼 학비도 어마어마했다. 능력이 있으면 물론 그만큼 학비는 면제되어 평민도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었다. 일종의 투자인 셈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땅을 파서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 말은 기부금을 받거나 부정입학이 존재한다는 소리와 같았다. 엘레나는 눈앞의 영식이 돈을 퍼부어주고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저렇게 멍청해 보여서야 제 머리로 입학시험을 치러낼 리 없었다.
얼마 전 자신이 듀베르 가와 제법 큰 거래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 가설에 힘을 더해 주었다. 알려진 것 보다 재산이 제법 있었지 아마?
“헌데, 제가 몸담고 있었던 제니아 아카데미에는 재밌는 소문이 돌고 있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자랑에 엘레나의 눈빛에 점점 한심함이 담겨가기 시작하자 다행스럽게도 네온 듀베르의 말이 바뀌었다.
“…….”
아카데미의 소문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애써 미소 짓고 있던 엘레나의 입매가 서서히 굳어갔다. 하지만 엘레나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한 네온은 잔뜩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기나긴 서론을 엘레나가 별다른 제제 없이 다 들어주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오데이른 가문의 엘리제에 대해서 아십니까, 영애?”
고요히 생각에 빠진 엘레나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네온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엘레나에게만 전해준다는 듯 바싹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훌륭한 업적을 가지고 제국의 마법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건 물론 아시겠지요? 그런데 그 유명한 마법학자 엘리제 오데이른이 지독하게 못생긴 여자였다고 하더군요.”
“…….”
“지금 살아있었다면 온 대륙을 통틀어 최고의 추녀였을 거라고 합니다. 게다가 성격까지 매우 괴팍했다니 놀랍지 않나요?”
실없는 농담과 진실을 섞어 늘어놓는 네온의 잡담은 뜻밖에도 엘레나의 시선을 잡아두는 데 성공했다. 엘레나의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네온이 스스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미소를 한껏 지었다.
“레이디?”
그다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엘레나를 앞에 두고 주절주절 떠들어댄 네온은 곧 반응을 보일 엘레나를 기다렸다. 대개는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혹은 말도 안 돼요, 제국 최고의 마법학자는 훌륭하신 분이예요라는 뻔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엘리제 오데이른의 진실처럼 흥미 있는 가십거리는 대화소재로 굉장히 좋았기에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엘레나는 네온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호박색 눈동자를 반으로 접으며 생긋 웃더니 한쪽 발을 살짝 들고 그대로 몸을 틀어 서 있던 네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다리 한 쪽에 힘이 풀리며 당황한 네온이 상체를 숙이자 곧바로 몸을 돌려 반대쪽까지 확실히.
화려하고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몸놀림이었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끙끙대는 네온을 뒤로하고 엘레나는 그제야 속이 풀린다는 듯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떴다.
청초한 얼굴에 부드럽게 휘감기는 푸른 머리칼과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제국의 꽃 엘레나는 그렇게 오늘도 한 남자를 짓밟으며 연회장을 떠났다.
*
마법학자 엘리제 오데이른. 보통 마법학자라고 말하면 마법사 아니야? 라는 질문이 돌아올 정도로 희귀한 직업이었으나, 엘리제 이후 그 인식은 서서히 바뀌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제 오데이른은 마력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기존의 마법사들이 생각하지 못한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마법의 수식을 뒤틀고 바꾸어나갔다. 덕분에 엘리제 뒤로는 항상 갓 초보를 벗어난 마법사들이 줄줄 따라다녔다. 제발 수식 좀 간편하게 만들어 달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물론 엘리제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그런 건 너희가 알아서 해야지, 나는 바빠.’
‘또 실험실을 폭발시키려고요?’
‘그래. 다음엔 네 실험실이 얼마 만에 폭발할 지 맞춰볼래?’
엘리제의 존재는 마법사의 탑에서 독보적이었다. 퉁명스러운 성격과 못생긴 외모로도 독보적이었지만, 마력이 있는 마법사만 들어갈 수 있다는 탑에서 마력이 없는 사람은 엘리제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제는 마력이 있는 마법사를 전혀 다른 존재라고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제는 마법에 푹 빠져 들었다.
마탑에서 엘리제가 주로 만들어내는 물건들은 마력이 없는 일반인이 쓸 수 있는 마구들이었다. 마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엘리제가 만들어낸 마법물품들을 보고 열광했다.
마법사의 탑에서 일반인과 마법사의 격차를 줄여주는 그녀의 존재를 고깝게 여길 수도 있었으나, 엘리제는 마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내놓아 마법사들을 조용히 만들었다. 뿐만이 아니라 엘리제의 뒷배경에는 당시의 대마법사였던 카르나 로이스의 입김이 존재한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러나 그 유명한 엘리제 오데이른의 외모는 현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초상화 한 점 남아있을 법도 한데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탓이었다. 엘리제가 바꾸었다는 수많은 수식과 마법도구들도 극히 일부분만 남아 있었다. 공식적인 기록이 모두 불에 타거나 도난당한 탓이었다.
덕분에 엘리제 오데이른의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정사에는 기록된 것이 얼마 없었고 야사에 드문드문 ‘못생겼다’라고 설명된 것을 보면 그리 신빙성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흔한 가십거리로 입에 오르내릴 뿐인 사실. 그러나 엘레나는 네온의 말에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바로 엘리제 오데이른을 알고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그게 바로 나다 이 자식아!”
높은 구두의 끝에서 작은 돌멩이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곧바로 바닥으로 추락해 데굴데굴 굴러갔지만 엘리제의 기분은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풀이였다.
100년 전 제국 최고의 학자 엘리제 오데이른은 어찌된 영문인지 엘레나 그란디아로 환생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엘레나는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를테면 엘리제 오데이른이 아기가 되는 꿈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엘리제의 시간은 늘 같은 장면만을 보여주었고, 엘레나의 시간은 다른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을 깨달은 이후 엘레나는 인정했다. 이제 엘리제 오데이른은 없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의 몸으로 엘레나는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동료 마법학자가 가끔 이야기하던 환생론에 의하면 과거의 생, 즉 전생의 기억은 없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 타당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엘리제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엔 분명 공백이 존재했음에도 자신이 엘리제 오데이른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엘리제 오데이른의 죽기 직전의 기억이나 죽음에 관한 기억은 아무리 떠올려 봐도 머리만 아팠을 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 엘리제의 전성기 시절의 기억뿐이었다. 분명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엘리제 오데이른은 추녀였고, 성격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것이었다.
‘괴팍하고 못생긴 년의 발길질 맛 좀 보라지!’
엘레나는 차마 뱉어내지 못한 욕을 속으로 삼키며 또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을 저주했다. 아카데미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조짐이 좋지 않더라니 역시 괜히 들었다.
“그러게 내가 오데이른의 팬이란 걸 먼저 알았어야지.”
엘레나는 혼잣말을 하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사교계에 데뷔할 때도 똑같은 이유로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후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머릿속으로 소문을 퍼뜨릴 예산을 측정했다. 어차피 돈이야 썩어 넘치도록 많았으니 전생의 자신의 욕이라도 좀 덜 듣고 살아야겠다.
속으로 하는 생각이야 어떻든 지금 엘레나의 모습은 전생에서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지난 15년간 엘레나로 살며 익혀나간 것이었다. 태양같이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에 부드럽게 물결치는 듯한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엘레나 그란디아.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최근 거물이 된 아버지의 영향에 더해 황태자비로 이름이 오르내리기까지 하자 엘레나는 단숨에 주목받는 가문의 영애가 되었다.
하지만 그 관심이 달갑지 않았던 엘레나는 이런 귀찮은 상황에 말려들 때마다 황태자의 멱살을 붙잡고 탈탈 털고 싶었다. 분명 엘레나 자신의 탓도 있음에도 분노의 화살을 돌릴 곳이 필요했던 엘레나는 진지하게 황태자 제이스에게 암살자라도 보내야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