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되돌아가다
태일러는 나를 계속 붙잡고 아빠보다 먼저 총총 뛰어갔다. 난 아무 생각 없이 이끌려갔다. 궁전에 들어가자마자, 아니, 태일러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수십개의 로봇들이었다. 그 사이를 걸어갈때의 기분이란! 마치,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냐, 신경쓰지마.]
태일러가 말했다. 내가 로봇들을 불편해 한다는 것을 눈치챈걸까? 그녀는 그때까지도 나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한층, 두 층, 계단을 올라가자 점점 숨이 가빠졌다. 반면 태일러는 요정처럼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태일러는 요정, 앨리샤는 천사. 난 역시 천사가 더 좋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태일러의 손에서 내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태일러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내가 좋아서 내 손을 잡고 있었겠어? 아무 생각 없던 거지. 그런데, 도대체 언제 이 계단이 끝나는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태일러가 말했다.
[여기가 내 방이야. 들어와!]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 또 놀라운 관경이 펼쳐졌다. 내가 놀란 얼굴로 굳어있자, 태일러가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어서!]
난 얼떨결에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방 구석에 있는 검은 색 털뭉치는.. 블로어, 아니 블랭카다! 블랭카도 내가 반가운지 나에게 달려왔다. 강아지처럼 내 얼굴을 핥으려는 블랭카를 간신히 떼어내고 나서야 그녀의 방이 얼마나 큰지 알았다. '그리팅고흐의 캡슐'보다도 큰 방에, 거대한 책장 4개와, 책꽂이가 딸린... 캡슐이 있었다. 아니, 아니, 음식 캡슐 말고. 수.. 뭐라 하더라? 아, 수먼 캡슐! 가격이 엄청날 텐데... 난 그녀에게 물었다.
[수먼 캡슐에서 자니?]
갑자기 그녀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빴다.
[왜 웃어?]
그녀는 계속 웃다가 호흡을 한 번 하고는 말했다.
[수먼 캡슐이 아니라, 수면 캡슐이야.]
내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다 큰 꽃게만큼이나 빨개졌을 것을 안다.
[그래, 물론 틀릴 수 있어. 왜냐하면 넌 분명히 프림프 외삼촌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니까. 5장에 나와있어. '수면 캡슐, 숙면 캡슐 나이트 캡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캡슐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본능인 잠을 돕기 위한 가장 고급적인 도구이다.' 라고 말이야.]
[그래, 읽어보지 않았어.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책 내용을 다 외우니?]
[그야 여러 번 읽었으니..]
그 애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난 그녀를 몰아세우며 말했다.
[제발 네가 그 책을 가장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
태일러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말했다.
[맞아, 그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야. 잠깐만 줘 볼래?]
그 애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제서야 생각났다. 내 자리에 책을 두고 온 것이다!
[두고 왔어!]
내가 소리치자 태일러도 소리쳤다.
[뭐라고?]
[책을 두고 왔어!]
[어디에!]
[내.. 내 자리에..]
난 말을 더듬었다. 나 혼자 '내 자리' 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익숙하지만 태일러 앞에서 더러운 바닥을 '내 자리'라고 말하자 약간 부끄러웠다. 아니지, 부끄러울 것 없지. 뭐가 부끄러워? 그 순간 난 깜짝 놀랐다.
[너 미쳤니?]
갑자기 태일러가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지금쯤 그 제이크라는 사람이 읽어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오, 이런..]
태일러는 어느새 울상이 되어 있었다.
[잭이야.. 제이크가 아니고...]
난 혼잣말하듯 답했다.
[어쨋든! 너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니? 그건 내 책이잖아!]
[그걸 내게 억지로 주고 간 건 너였어.]
난 ‘너’를 강조했다. 이건 사실이었다. 난 책을 보관해 주겠다고 한 적 없다. 그냥 멋대로 내 품에 안겨주고는 무책임이라고?
[그래, 그건.. 맞아. 그런데 그 제이크..]
[잭이라니까.]
[..잭이 그 책을 다 읽어보았다면!]
[상관없을걸.]
난 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태일러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네 일이 아니니까. 이건 내 일이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아주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이신 에르지아 행 파니칸 작가님께서 자신의 책인 ‘가장 행복한 여인, 나 에르지아가 말하는 상대 이해하기’에 적으셨지. 어.. 그 분은 2년 전 돌아가셨어. 젊은 나이에다, 아들도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강도가 집에 들어서 그렇대. 뉴스에도 나왔었어. 아들은 간신히 도망쳤지만 아마 곧 죽을 것이라고 했어. 난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아들도 분명 글을 잘 쓸테니까. 그의 글이라도 읽어야 마음이 달래지겠지. 2년 전이었지만 난 아직도 그날 내가 펑펑 울었던게 기억나.]
그래, 그렇구나. 에르지아라는 그 사람의 아들도 책을 쓴다고 한다면 잭 아저씨가 가만두지 않을걸? 아, 잭 아저씨에 대한 생각은 하지 말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너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거야. 이 일은 조금 다른 경우니까 말이야. 그건 당연한 사실이야! 에르지아 작가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걸?]
[그게 아니라...]
[또 뭐? 무슨 핑계를 대려고?]
핑계라니, 좀 기분 나빴다.
[어차피 잭은 책 따위 읽어보지 않을거야..]
[혹시 모르잖아! 사람이란 말이야, 혹시 모를 가능성 0.000001%만 있어도 대비를 해야한다고 우리 아빠가 말씀하셨어. 나 역시 그게 옳다고 생각해!]
[그는 충분히 탐욕스러워서 탐욕왕 프림프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걸.]
[목소리 좀 낮춰!]
[이게 왜 비밀이야?]
그녀는 나의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그가 내 비밀을 알게 되면.. 잠깐 본 걸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아빠 말씀이 있지만... 그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날 비웃을거야!]
음, 하나는 맞췄네. 그런데.. 잠깐!
[태일러, 걱정하지마. 그는 널 놀리지 않았잖아.]
[무슨 소리야?]
[아니, 놀리지 않을 거라고]
잭 아저씨는 분명 그 소리 수축기인가 무언가를 거꾸로 끼워서 우리 대화를 다 들었다고 했었다. 태일러는 여전히 침울해보였다.
[그래도 걱정이야.]
[또 뭐가?]
난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물었다.
[‘본능에 충실하라, 탐욕왕 프림프의 세 번째 책이자 금서’는 무지 구하기 힘들어. 내가 그 책을 가지고 있는 건 외삼촌도 몰라. 난 프림프 외삼촌의 첫 번째 책인 ‘메데이아의 후손들, 욕구가 당위를 앞질러버린 인간들이여!’라는 책을 아빠의 서가에서 찾고는 외삼촌의 책들에 빠져버렸어. 아빠는 두 번째 책인 ‘신사숙녀는 절대 읽어서는 안될 프림프의 본능 따라가는 법’을 읽다가... 쓰레기 같은 책이라며 책을 창 밖으로 던져버렸어. 아빠가 그렇게 화난 건 처음 봤지. 솔직히, 두 번째 책은 좀 파격적이었어.]
그녀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넌 지금 그 책을 잃어버릴까봐 걱정이라고?]
[어..솔직하게, 지이인짜 솔직하게 대답하면, 맞아. 그게 아주 걱정이야.]
[다시 가야겠지?]
난 잭 아저씨를 떠올리면서도 그녀에게 그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태일러가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바라면서. 나, 참 찌질하다.
[어...... 잠깐 고민 좀.]
태일러가 말했다.
[그래. 태일러, 아무래도 지금 다시 나가면 슈그라햄 씨.. 아니, 너희 아버지가 수상하게 여기실거야. 차라리 그 책을 다시 사!]
[내가 말했잖아, 무지 구하기 힘들다고. 그 책도 더기 마을에 있는 ‘금서 판매점’이라는 지하 서점에서 사온 거야.. 구스 마을에는 서점도 없는데다, 그 책은 그냥 서점에서는 잘 팔지 않아. 음.. 진짜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금서 판매점’에도 없었으면 그냥 포기할 생각이었어. 정말 다행.. 아니 불행히도 말이야, 있더라고!]
[그럼 다시 그곳에 가보는 건..]
태일러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그 으스스한데 다시 가라고? 어차피 나가는 건 똑같을텐데, 구스 광장에 가 보자!]
아, 결국은 또 이렇게 되는 구나... ‘너 혼자 다녀와’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책을 두고 온 건 나 아닌가? 그 책이 태일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두고 왔으니 , 태일러 말대로 책임을 져야지. 같이 가주기만 하고, 내 자리에서 가져오는 것은 태일러에게 하라고 해야겠다. 그럼 더 책임질 것도 없고, 잭 아저씨와도 대면하지 않느니 불편하지도 않을테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 그때 태일러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해? 빨리 가자! 넌 항상 멍을 때리더라. 그거 엄청 안 좋은 습관인거 아니? 내 생각에는, 내 생각일 뿐이지만, 멍청이라는 말이 멍 때리는 데서 온 것 같아. 멍 때리는 걸 보면, 좀 멍청해 보여. 어떤 사람들은 멍을 때리면 뇌를 쉴 수 있게 해준다고도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나보고 지금 멍청이라고?
[아니, ‘멍 때리기의 모든 것!’ 이라는 책에서는 그렇게 보이지만 멍 때리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거라고 나와있어.]
[그런 책도 있어?]
태일러가 나에게 물었다. 당연히 없지! 내가 방금 만든거야!
[어...있었던 것 같아.]
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나도 나중에 그 책을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
아니야, 아니야! 제발 그러지 마!
[어쨋든 우리 빨리 가야하지 않을까? 해가 저물고 있는 것 같은데.]
아..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다고? 태일러의 방에는 거대한 창문이 있어서 밖의 노을이 잘 보였다.
[노을 참 예쁘다..]
태일러가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붉은 빛이 감도는게 참 예뻐.]
난 태일러의 말에 나름 감성적으로 답해주었다.
[그거 아니? ‘반복되는 하루동안 변화하는 것들’이라는 책에 나와있는데, 노을은 말이야..]
[다시 책 얘기로 넘어가버렸으니 노을 감상은 그만하고 어서 가자.]
그녀는 약간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이내 답했다.
[우리, 번갈아가면서 가자고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이제 다시 내 차례인가? 가자!]
태일러는 커다란 방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