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수영과 도지하의 말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300기의 기병을 이끌었다.
말이라고는 처음 타 보는 지하지만 어차피 지가 달리는 것도 아니고, 무리 지어 가니 특별한 기술을 부릴 것도 없다.
(지하) ‘흐윽, 수영아 네가 직접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수영) 갈라지라우!
나열된 포차에 백미터 까지 접근하자 수영이 높이 손을 들며 약속한 지시를 했다. 이에 왼편의 기병은 수영이, 오른편의 기병은 다른 장수가 지휘하는데 고구려군의 신속하고도 기민한 움직임에 당나라군은 제대로 반응 하지도 못했다.
(수영) 쏘라우!
피잉- 피잉-
포차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보병이 앞으로 나오기도 전에 이미 고구려 기병은 첫 번째 포차에 불화살을 날렸다. 연이어 기름이 담긴 작은 항아리를 던지니 나무로 제작된 포차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칼은 빼어들고 있는 지하지만 아무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삼신할매의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이야 예상치 못한 전술에 당황한 당나라군이지만 곧 보병들이 앞으로 나올 것이다.
물론 그들이 기병에 위협적인 창이나 활로 무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하는 부디 아무 일 없이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지하) ‘정말 씩씩하기도 하네.’
여자의 몸으로 일사분란하게 군대를 지휘하는 수영을 보며 지하는 감탄을 했다. 이제 수영은 다시 고구려군을 중앙으로 이동시키며 차례로 포차에 불화살을 날리고 있다.
(수영) 닌 왜 화살 안 날리네!
(지하) 전 칼 밖에 없는데요.
(수영) 아이고, 이 겅깡한 놈.
한손이 급한 판에 자신의 옆에 찰싹 붙어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지하에게 욕을 해댔다.
어차피 지하는 겅깡한놈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만...
양 갈래로 갈라져 불 시위를 날려대니 포차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됐다. 작전은 성공한 듯 하다.
그때, 고구려군이 중앙으로 합류하기 직전 드디어 당나라 보병이 기병을 저지하기 위해 칼을 빼어들고 뛰쳐나왔다.
우와와와-!
칼에 경무장을 한 보병이 기마대를 상대한다는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보유한 최강의 공성병기인 포차를 모조리 잃기 직전이 되자 보다 못한 당나라의 장수가 돌격 명령을 내린 것.
당나라군은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데 고구려군은 기름 동이를 가지고 있던 병사들만 칼을 차고 있던 상태였다.
(수영) 기름은 그만 던지고 맞서라우!
포차에 충분히 기름은 뿌려진 상태다. 수영의 명을 받은 기병들은 기름 동이 대신 칼을 빼어들고 보병들과 부딪혔다.
말에 치이고 칼에 맞고 당군이 줄줄이 쓰러져 고구려군이 절대적 우위의 전투지만 점점 밀려오는 적이 너무 많다.
게다가 눈 먼 칼에 맞아 고구려군도 하나 둘 쓰러지니 마침내 수영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바로 그때.
(지하) 대장군님 뒤에!
수영의 뒤편에 어느새 도달한 적군이 칼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데 지하가 칼을 휘둘러 쳐냈다. 챙 거리는 쇳소리가 나며 주춤한 적군 뒤에 몇 명이 더 몰려 수영과 지하를 포위했다. 수영은 방향을 바꿔 불화살을 당나라군에게 쏘아 대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지하) ‘나도 싸워야 해, 내가 지켜야 해!’
애초에 기마술 따위는 알지 못하는 지하다. 검술이라고 뭐 다르겠냐만은 그래도 말위에서 제대로 못 움직이는 것 보다는 낫다. 이에 내려서 칼을 고쳐 잡으니 당장에 4명의 칼이 그를 겨눈다.
용케 첫 번째 칼을 피한 지하는 죽지 않게끔 칼등으로 공격한 놈의 머리를 쳤다. 머리를 쳐 맞자 충격으로 넘어지면서 지하에게 엉겨 붙어 버렸는데 요행히도 그의 몸이 방패가 되어 다른 적군의 연이은 공격을 막아내었다.
지하는 당황하며 순식간에 자기편으로부터 칼을 맞은 당나라 병사를 밀쳤다.
(지하) 어, 어! 이거 내가 죽인 거 아냐!
(수영) 썅, 지금 뭔 소리하네!?
혹시나 삼신할매가 일려준 규칙을 어긴 것이 될까봐 허둥대는 지하의 등 뒤로 수영이 연달아 활을 날려 남은 적군을 쓰러트렸다.
(수영) 헛소리 하지 말고 날래 타라우! 왜 말에서는 쳐 내려간?
닦달에 지하가 보니 이미 양 갈래로 흩어졌던 고구려군이 합쳐져 성으로 돌아가 수영과 지하만 남아 있었다.
수영아...너, 나 기다려 준거냐...?
감동도 잠시, 자신을 당나라군보다 더 무섭게 째려보는 수영을 보고 잽싸게 말에 올라탔다.
이제 후퇴의 시간이다. 번개처럼 들이쳤던 고구려군은 썰물 빠지듯 성으로 말을 달렸다. 돌아오는 그들을 환영하듯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지하)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지하는 성문을 얼마 안 남겨두고 뒤를 보아 전투의 결과를 보았다.
(지하) ‘하하! 이놈들 꼴 좋다. 어떠냐, 내 작전이!’
순간 활활 불타는 포차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한 체구에 화려한 갑옷, 누가 봐도 당군 최고의 지휘관인 듯한 중년의 무장이었다. 거리가 멀고 뛰는 말 위에서 보는지라 분명 하지는 않지만 지하는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지하) ‘...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마침내 수영과 지하가 성문을 통과 하면서 닫히자 성안은 환영 나온 군병과 백성들이 지르는 환호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와-와와-아 !
말에서 내려 성루에 올라 전과를 확인하니 30대 가량의 포차는 모조리 불에 타, 그저 장작더미가 되고 있었다. 반면 고구려군은 대부분 살아 돌아 왔으니 겨우 300의 기병으로 이룬 놀라운 전과였다.
대장군 만세-! 고구려 만세-!
포격의 공포를 제대로 맞본 백성들은 포차를 박살내는 자신들의 군대를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감을 느꼈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성내를 수영이 가라앉혔다.
(수영) 언제 또 저것들이 공격할지 모른다. 무너진 성벽이나 보수하라우.
대장군의 지시에 따라 백성들과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성루에서 수영이 지하를 불렀다.
(수영) 네가 보기에 어떤? 저것들이 바로 밀고 들어올 것 같네?
수영이가 나의 견해를 물어 보다니. 아무래도 방금 작전의 대성공으로 보는 눈이 다소 달라진 것 같다.
(지하) 아닙니다. 포차를 믿고 가볍게 무장을 바꾼 터라 다시 재무장 하는데만 시간이 제법 걸릴 것입니다.
소싯적 주구장창 봤던 삼국지가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전쟁 한번 안 겪은 지하는 제법이나 능숙하게 전황을 파악하고 말했다. 이래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수영) 기러쿠만기래...
그렇게 아침의 전투가 마무리 되어 갔다.
성안은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이들의 분주함과 함께 뒤늦은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시작된 당나라군의 공격으로 해가 중천에 뜬 이제야 첫 끼니를 먹으려는 참이다.
(지하) ‘장교가 이래서 좋구만. 흐흐’
신분은 병졸에 불과 하지만 어쩌다 연개수영의 호위무사가 되어 뒤를 졸졸 따라다니니 허드렛일은 전혀 하지 않고 차려져 나오는 밥상을 받는 지하다.
식사는 간소했다. 주먹밥에 약간의 채소를 넣고 끓인 희멀건 국물. 그래도 배가 워낙 고팠던 지하는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생각해보면 갑작스레 맞이한 전생에 워낙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 거의 20시간째 아무것도 안 먹었던 지하였다.
(수영) 이보라우, 니 오데가서 잠 좀 자야 되지 안?
밥을 다 먹은 지하에게 말했다.
(지하) 괜찮습니다. 호위 무사인데 항상 대장군님 지켜드려야죠.
(수영) 왼 개소리 집어치우고 가서 자빠져 자라우. 기카야 냉중에 밤새 문 지킬 거 아이네?
(지하) 아, 네...
사실 밤을 꼬박 샌데다 전투까지 치르고 난 지하는 몹시도 졸렸다.
(지하) ‘설마 당나라군이 성안까지 들어와 수영이를 건들지는 못하겠지?’
수영을 벗어나 잠시 눈 붙일 장소를 찾고 있는데 전일 처음 자신을 도와주었던 병사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 1) 이보라우- 어리보기.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삼삼오오 모여 조용히 부르는 그들을 보자 지하는 괜히 반가웠다. 그래도 전생으로 와 처음 만난 이들이니 말이다. 반갑게 인사하며 가는데 급히 안쪽으로 지하를 끌어 들였다.
(병사 2) 이야- 감옥에서 뒤져나갈줄 알았더만 어드르케 살아 댕기네?
(병사 1) 아까 못 봤네? 포차 까부술 때 대장군하고 같이 있더만.
(지하) 하하, 어떻게 일이 잘돼서 대장군님 호위하고 있어요.
(병사 2) 운도 좋구나야. 아무튼 이렇게 다시 봐서 반갑구만기래.
셋은 아침에 벌어졌던 전투를 이야기 하며 그 작전이 지하가 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더욱 놀랐다.
(병사 1) 남평양서 왔다카길래 겅깡갱이인줄 알았더만 여간이 아니구만기래~
(지하) 별것도 아닌데요 뭘. 아, 그런데 겅깡이 무슨 뜻이에요?
(병사 1) 겅깡? 뭐라 카야 하네... 실 없이 멍텅한거이 겅깡이지비.
(지하) 윽... 그런 뜻이었군요.
전생으로 와 수영에게 들은 말은 대부분 욕인 듯하다.
(병사 2) 대장군님 잘 지키라우. 정혼자도 있는데 여서 구신되면 쓰간?
(지하) 그쵸. 잘 지켜야죠. 아- 뭐라구요!?
(병사 2) 아이, 깜짝이야 갑자기 소래는 지르고 난리네?
(지하) 수영이, 아니 대장군님한테 정혼자...가 있어요...?
그냥 좋았다. 사랑해 라는 듣지 않아도, 아니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해도.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던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시간들이 지하에겐 그저 행복이었다. 몇 년이 걸려서라도 이번엔 할 수 있겠다 했는데
그녀에게 이미 정혼자가 있다니...
(병사 1) 그라믄 저 얼굴에 남자가 없겠네? 아마 대막리지께서 직접 골랐을끼니, 이번 전쟁만 끝나면 바로 시집 가겠지비.
이미... 물 건너 간 거 아닌가... 정혼자가 있다는데 삼신할매는 날 왜 이 시대로 보냈을까...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