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대며 일어난 지하는 어안이 벙벙했다. 바로 옆에서 병사들이 칼과 창을 부딪치며 싸우고 있던 것. 피비린내 가득한 곳곳에서 비명과 함께 병사들이 쓰러졌다.
(지하) ‘으으악! 여기가 어디야?’
칼을 맞은 노란 갑옷의 입은 병사가 옆에 툭 고꾸라졌다.
(병사1) 날래 안 싸우고 뭐하네!?
(지하) 예?
얼굴에 피를 뒤집어 쓴 병사 하나가 지하를 향해 소리쳤다. 자신과 같은 갑옷인 것으로 봐서 한편인 듯 했다. 나름 역사에 관심이 많아 지식이 많다 자부하던 지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중국말을 하는 노란 갑옷의 병사들, 사막과 같은 전장. 게다가 북한말을 쓰고 있는 우리 편이라면...
발해야, 고구려야?
이야야야야-!
노란 갑옷의 병사 하나가 창을 겨누고 지하를 향해 달려왔다. 맨손의 지하는 어쩔 줄을 몰라 뒷걸음질 치다 이미 쓰러져 있던 시체에 발이 걸려 널브러지고 말았다.
(지하) 안 돼~!
창이 지하를 찌르기 직전 같은 편의 다른 병사가 재빠르게 중국 병사 옆구리를 베었다. 창은 아슬아슬하게 지하의 얼굴 옆을 스쳤고 중국 병사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다 쓰러졌다.
(병사2) 이거이 여간 어리보기가 아니구만기래.
늘 하던 일을 마쳤다는 듯, 도와준 병사는 바닥에서 누군가의 병장기였을 칼을 들어 지하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칼을 움켜쥐고 일어나니 노란색의 병사들을 저만치 물러가고 있었다. 퇴각-
(장수1) 당나라 아새끼들 도망간다우!
(병사들) 우아아아-!
말을 타고 창을 길게 꼬나 잡은 장수의 외침에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울렸다.
잠깐, 당나라면... 삼국시대의 고구려구나!
멀리 후퇴하는 당나라군을 바라보며 한껏 기개를 올린 고구려군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장수 1) 시신은 나중서커 하고 병장기 먼저 날래 성안으로 옮기라우.
(병사들) 예-.
(지하) ‘휴우, 다행히 추격은 안하나보다. 그나저나 수영이랑 인연 있는 전생이라더니 어디 있는거야?’
지하의 뒤편에는 떡 하니 서 있는 성의 입구에는 성산산성이라고 쓰여 있었다. 운동도 아닌 전투를 치르고 난 뒤임에도 고구려 병사들은 피곤함을 이겨내며 일사분란하게 일을 시작했다.
지하도 눈치껏 병사들 틈에 끼여서 칼이며 창들을 줍기 시작했다.
(병사 2) 이보라우, 어리보기. 냉중도 그딴식으로 하다간 바로 황천행이야.
(지하) 네, 주의하겠습니다.
(병사 3) 너 말투가 왜 그런? 이거이 신라 첩자 아임메?
신라 첩자라니- 지하는 아는 역사 지식을 총동원했다. 고구려가 분명 서울을 먹은 적도 있으니...
(지하) 아녜요. 저 한강 쪽에서 왔어요.
(병사 2) 한강? 아리수 말하는거네?
서울 수돗물 아리수. 그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거구나. 쩝...
(지하) 맞아요. 아리수요.
(병사 1) 남평양에서 온 거이 맞구만 기래. 신라 아새끼들은 이런 말 안쓴다기카네.
두둔해 주는 병사 덕에 무난히 넘어간 지하는 한아름 병장기를 들고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한 병사나 그들을 맞이하는 백성들이나 기쁨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오늘 살아남은 것에 다행이라 여길 뿐.
성안 지리를 모르는 지하는 당연히 한 발짝 뒤에서 다른 병사들이 가는 곳을 따라야만 했다. 알아서 잘 하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지시하는 목소리가 갑자기 뒤편에 들렸다.
(장수 2) 그 창고는 깍 찼으니께 동문으로 옮기라우.
(지하) 아이씨- 무거워 죽겠는데, 동문은 또 어디야?
우당탕탕 !!!
짜증남에 무심코 목소리 난 곳을 쳐다본 지하는 들고 있던 병장기를 모조리 떨어트렸다. 한 무리의 장수 속에서도 가장 화려한 갑옷을 입은 사람. 수영이가 그 곳에 있었다.
수영이가 척척 다가와 뚫어지게 지하를 쳐다본다. 날 알아보는 건가?
수영은 퉁명스럽게 툭 던진다.
(수영) 아적도 안 먹었네? 비실대지 말고 날래 움직이라우.
이런, 못알아 본다.
(지하) 수영아- 나야 지하.
분위기 파악 못하고 너무 반가워 자신도 모르게 수영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뒤 돌아 가던 장수들이 일제히 돌아 봤고 병사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장수 2) 이런 간나새끼, 대가이에 칼이라도 맞았네? 오데 대장군님께 헛소리를 해대네!?
보필하는 장수의 호령에 지하는 간이 콩알 만 해졌다
(지하) 죄송합니다. 제가 뭘 잘 몰라서.
(수영) 잠깐, 너 이래 말투가 수상하누만.
얼굴은 그대로 예쁘기 만한 수영이건만, 대체 넌 전생에 뭐였던 거야?
지하는 아까와 같은 변명을 했다.
(지하) 제가 한강 아니, 아리수 쪽에서 와서 그렇습니다.
(수영) 거카는 신라랑 싸우기도 바쁜데 어드래 여기까지 완? 야, 이거 일단 잡아 쳐 넣으라우.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함께 있던 병사들은 감히 대장군의 말에 감싸주지 못하고 오랏줄에 묶여가는 지하를 바라만 볼 뿐이다.
철컹-
질질 끌려간 지하는 이름대로 지하 감옥에 갇혔다. 손에 묶은 오라는 풀어줬으나 흙이 그대로 들어난 찬 맨바닥에 궁둥이를 대고 앉아 있으니 갑자기 처량감이 몰려왔다.
(지하) ‘사랑은 고사하고 수영이 손에 죽게 생겼네.’
감옥 어디를 둘러봐도 지키는 사람도 없고, 달리 하옥되어 있는 사람도 없이 나무창만 굳건히 닫혀 있어 어디 물 한 모금 달라고도 못할 처지다.
(지하) ‘수영이가 대장군이라고 했나? 무슨 여자가 장군이 되었지. 그것도 되게 높은것 같은데, 난 그냥 병졸이고.’
성의 이름을 확인하고 감옥에 들어오기 전까지 주변을 잘 살피던 지하는 이제 자신의 전생이 어떤 상태인지 완전히 파악했었다.
(지하) ‘600년 후반쯤 되려나. 당나라 놈들이 쳐들어와서 여기가 지금 완전 최전선이네. 삼신할매도 하필이면 전쟁 한복판으로 보내다니. 이런 상태면 견우와 직녀도 헤어지겠다. 그나저나 진짜 이제 어떻게 해~그냥 확 포기해버릴까.’
속이 끓건 말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하는 그저 시간만 보내니 마침내 밤이 되었다.
(지하) 으- 목말라. 여기요! 아무도 없어요!?
지하 감옥은 몹시도 먼지가 잘 일어나는데다 몇 시간째 물 한잔 못 마신 지하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의 말을 들은 것인지 갑자기 감옥 입구 쪽이 환해지며 저벅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든 지간에 반가웠던 지하가 벌떡 일어나고 보니 수영이 혼자 횃불을 들고 내려와 앞에 섰다.
(지하) ‘아, 뭐라 하지? 또 수영아라고 했다간 목이 날아갈 것 같은데’
수영은 잠시 지하를 보다 무심히 물 한바가지를 건넸다.
(수영) 마시라우.
목이 탄 지하는 일단 마시고 보려는데 바가지가 감옥 창살 틈 보다 커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주둥이를 최대한 틈으로 내미니 수영이 부어주기는 하는데 마시는 건지 세수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걸 보던 수영은 그 꼴이 우스웠는지 가볍게 미소를 뗬다.
수영의 미소 덕분일까? 지하도 물에 한껏 젖은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돌연 수영의 얼굴이 엄숙해졌다.
(수영) 너이래 솔직히 말하라우. 정체가 뭐네?
평안도 사투리의 수영도 예쁘다. 인상을 쓰며 창살 가까이 얼굴을 들이미는 수영을 보며 지하는 잠시 얼없는 생각을 했다. 아마 평생 동안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한 건 처음이지?
감옥 안이기는 하지만...
(지하) 그게 제가 나라를 지키고자, 특히 당나라 놈들을 꼭 쳐부수고 싶어서 일부러 왔습니다.
짱구를 최대로 굴렸다. 사랑이고 뭐고 일단 감옥에서는 나가고 봐야지.
(수영) 아니, 그딴거이 중한게 아니라 내 이름을 네가 어드르케 아네?
(지하)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수영) 내 이름은 가족밖에 모르는데, 평양서 올아방이 보낸?
올아방? 오라버니? 에라이- 모르겠다.
(지하) 네, 오라버니께서 보내셨습니다. ...몰래...
(수영) 역시 길쿠만 기래. 뭣 때문에?
(지하) 그게... 지켜드리라고 호위무사로 왔습니다.
수영은 피식 숨을 쉬며 말했다.
(수영) 고조 올아방도 참! 일 없다니께 기카도. 일단 나오라우.
그렇게 감옥을 나와 함께 수영이 묶는 거처로 갔다. 전쟁통이기도 하거니와 투박한 특색의 고구려답게 수영의 방은 꾸밈 없이 딱 필요한 것들만 있었다.
여기가 꿈에 그리던 수영이의 방! 상상 속에서 얼마나 많이 가봤던가! 뭐... 고구려 시대이기는 하지만 말야.
감격해 서 있는 지하에게 수영이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수영) 뭘 멀건히 서 있네?
하루 종일 쓰고 있던 투구 탓에 몹시도 가려운 듯 선머슴처럼 벅벅 긁어댔다.
(수영) 거이 남평양 놈들이래 원래 그리 턱무하네? 너이가 올아방이 보내면 보냈지. 와 내 이름을 막 불러싸?
잠시 마음이 놓였던 지하가 찔끔 거리며 현실을 파악했다. 아, 맞다 얘 대장군이라고 했지.
(지하) 죄송합니다. 대장군님.
(수영) 기카고 대막리지를 오라버니라고 하질 않나. 니가 나네?
(지하) 네, 대막리지라고 하겠습니다. 아악- 대막리지!??!
대답을 하던 지하가 막리지라는 말에 갑자기 비명을 지르자 수영은 갑옷을 벗다 멈추고 놀래 쳐다봤다.
(수영) 진짜 대가이에 칼 맞았네? 와 갑자기 지랄이야.
(지하) 그...대막리지라고 하시면... 혹시... 연개...
(수영) 연개소문. 내가 그 누이 연개수영. 정신 차리라우 간나야.
지금 생에선 그 무섭다는 고구려의 맹장 연개소문이 수영의 오빠라니...
아- 젠장 내가 여기서 죽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