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승합차 안에서 하얀빛이 번쩍였다. 순간, 동료에게 죽는 것만큼 멍청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 데비히츠는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흡!!”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창문에 발을 딛고 세게 밀었다. 발끝이 반시계방향으로 튕겨져 올라가지면서 반원의 궤적을 그렸다. 동시에 차량 안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벼락 치는 소리가 고막을 때리면서 창문이 박살났다.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도로를 수놓았다. 번갯불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맞은편 건물에 닿았고, 요란하게 빛을 내뿜던 건물이 한순간에 암전되었다.
거리에 외마디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몸을 움츠러든 채 천둥이 친 줄 알고 멀뚱멀뚱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데비히츠는 하늘과 땅이 자리바꿈한 물구나무 자세로 잠깐 멈추어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가 번개소리에 하울릿들도 주춤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몸을 튕겨 천장 위에 자리 잡았다.
흑표범과 해골, 어느 쪽도 달려들지 못하고 대치했다. 휑하게 뚫린 창문에서 차량 주인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내리는 법도 모르냐, 모라이엠!!”
아래쪽 상황이 상상되어서 데비히츠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것을 자신들을 향한 비웃음이라고 오해한 하울릿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이후로도 수차례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주위가 번쩍였다. 번갯불에 맞은 하울릿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쓰러졌고, 살갗이 타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승합차를 쫓던 하울릿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목표를 잃은 번개는 차량의 창문들을 죄다 부숴가며 애꿎은 거리의 건물을 공격했다. 간판을 환하게 밝히던 불빛도, 네온사인 불빛도 모두 빛을 잃었다. 커다란 빌딩은 전체 층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를 반복하면서 기괴하게 깜박거렸다. 비명소리가 점점 커졌고, 사람들은 하늘이 아닌 번갯불이 날아오는 승합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좀 꺼져라!”
데비히츠가 끝내 차량 위에 올라탄 하울릿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그러나 승합차를 따라오는 녀석들이 문제였다. 랑의 번개 덕분에 숫자가 꽤 줄었지만 그래도 몇 놈이 끈질기게 쫓아오고 있었다.
데비히츠는 지체 없이 등으로 손을 뻗어 흰색 창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로브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서 갈비뼈 하나를 똑 부러뜨렸다. 그 갈비뼈를 창의 중간 부분에 갖다 대고 활을 쏘려는 자세를 취하자, 창은 순식간에 활로 변했다.
* * *
“흑흑, 창문이 열린단 말이야……. 왜 죄다 부수는 건데…….”
오므로는 운전대를 잡은 채 눈물을 좍좍 흘렸다.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는 모두 뻥 뚫려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리온을 비롯해 현우와 주영, 마토는 눈물 나는 추위에 몸을 덜덜 떨었고, 오므로와 모라이엠은 추위를 모르는 생물처럼 평온했다.
승합차를 쫓던 하울릿들은 속도를 줄여 차량 후미를 쫓아왔다. 랑은 그 사실을 모른 채 계속 양 옆으로 번개를 날렸다. 번갯불이 번쩍일 때마다 시야가 뿌옇게 변해서 현우와 주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뒤늦게 하울릿의 위치를 파악한 랑이 몸을 돌렸다.
“안 돼! 트렁크만은 제발!”
간절한 오므로의 외침이 통한 걸까. 랑의 엉덩이에 모여들었던 번갯불이 피식 하는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귀를 틀어막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현우와 주영, 마토이 눈을 끔뻑였다. 랑은 몸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왜 저래?”
마토가 중얼거렸다. 반딧불은 위이잉 날아서 모라이엠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빛을 반짝이면서 무슨 신호를 보내는가 싶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힘을 다한 거야.”
몸을 젖혀서 뒤쪽 상황을 살피던 리온이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일행 너머의 차량 후미를 바라보았다.
“차주인 오므로에게는 다행이지만, 우리에겐 불행이군. 트렁크를 날려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들의 발목을 잡아야 했는데.”
오므로가 그게 말이냐는 표정으로 리온을 쳐다보았고, 그는 뭐 뾰족한 수가 없지 않느냐는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 트렁크 쪽 창문에서 흰색 물체가 휙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울릿들이 하나 둘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 * *
“후…….”
데비히츠는 잠시 숨을 멈추고, 활시위에서 손을 뗐다.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날아간 갈비뼈는 정확히 하울릿의 몸에 꽂혔다. 그녀는 똑같은 방식으로 갈비뼈 서너 개를 더 부러뜨려서 화살을 쏘았다. 맹수들의 움직임은 날랬지만 쏘는 족족 백발백중이었다.
어디선가 맹수의 포효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하울릿들은 서서히 승합차에서 멀어져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졌다.
“흐음…….”
그녀는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는 걸음을 돌렸다.
선루프를 통해 내려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차가 뒤집힐 것처럼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데비히츠는 차량에서 나가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에 쥐고 있던 뼈창을 천장에 꽂아 넣고 버텼다.
* * *
“역시 데비히츠야!”
오므로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핸들을 쾅쾅 내려찍었다.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핸들이 부서지고 휘어졌지만 그는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주먹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 맹수의 포효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고요한 겨울날의 밤공기조차 부르르 떨게 만드는 울부짖음이었다. 하울릿들은 거칠게 숨소리를 내더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승합차에서 멀어졌고, 이내 골목길로 사라졌다.
“멀어져 간다…….”
흑표범들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리온이 중얼거렸다. 모라이엠은 고작 집안일을 끝낸 듯한, 약간 나른한 표정으로 뒷좌석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현우와 주영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가 뒤늦게 하울릿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멋쩍어하며 자리를 잡았다.
“으으, 너무 추워…….”
주영은 팔짱을 꽉 끼고서 덜덜 떨었다. 창문이란 창문이 죄다 깨져서 세찬 바람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현우와 마토도 어떻게든 바람을 피해보겠다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모라이엠.”
리온은 백미러를 보면서 뒷좌석에 평온하게 앉아 있는 모라이엠을 찾았다.
소녀는 나무지팡이를 꺼내 허공에 대고 원 모양으로 한 바퀴 휘두르고, 부드럽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공중에 둥그런 모양의 비눗방울이 만들어졌다.
몽글몽글한 비눗방울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더니 텅 비어있는 창틀에 날아갔다. 순식간에 모든 창틀에서 무지갯빛이 감도는 투명한 막이 씌어졌고, 창문이 다시 생겨난 것처럼 바람이 멎었다.
주영은 감탄하며 손을 뻗었다. 푸딩을 만지는 듯한 탱글탱글한 촉감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투명한 막이 손바닥 모양으로 주우욱 늘어났다. 깜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손을 떼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마토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하면서 장난을 쳤다.
오므로는 여전히 흥분에 겨워 고성을 질렀다. 백미러가 있음에도 그는 굳이 고개를 뒤로 돌려서 재잘거렸다.
“저게 바로 데비히츠의 갈비뼈라고! 하여간 대단한 종족이야, 척추로도 모자라서 갈비뼈를 무기로 사용하다니. 하울릿들 도망갈 때 녀석들 궁둥이 봤어? 캬하하하!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 좀 봐. 랑의 숭고한 엉덩이에 비하면 녀석들은 비곗덩어리라고 볼 수 있지.”
현우와 주영은 마토보다 말 많은 생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서로 눈길을 교환하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뒤뚱대면서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니까 아주 10년 묵은 체중이 쑤욱 내려가는 느낌이군! 푸하하하! 데비히치는 역시…….”
오므로가 거칠게 코너를 돌았다. 갑자기 소름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흰색 창이 천장을 쑥 뚫고나왔다.
“히이이익!!”
오므로는 호탕하게 웃다 말고 눈앞에 흰색 창이 아른거리자 영문 모를 욕지거리들을 쏟아냈다. 늘어졌던 긴장감은 여러 사람과 이종족들의 비명소리에 다시 바짝 조여졌다가 풀어졌다.
텅 빈 밤의 도로, 승합차가 뒤뚱거리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 * *
차가 멈추었다. 오므로는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 뽑은 자신의 애마가 넝마가 되었다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툭 건들기만 해도 왈칵 울음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여긴...?”
주영이 창문 같은 투명한 막에 얼굴을 바짝 대고서 중얼거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창밖으로 하천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청계천 아냐?”
주영의 의심을 넘겨받아 현우가 대답했다. 마토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청계천.”
보조석에 앉아 있는 리온이 안전벨트를 다급히 풀면서 말했다. 데비히츠와 모라이엠도 뒷좌석에서 튕기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왜 청계천으로 온 거예요?”
현우는 그들의 행동에 덩달아 조급해하며 물었다.
“서울에서 실루엔노틀로 가려면 이곳밖에 없거든.”
리온이 우쭐거리는 어투로 말하면서 문을 벌컥 열었다. 덜컹하고 무엇인가 빠지는 소리가 나더니 문짝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요란한 쇳소리는 소음에 가까웠다.
“…….”
리온은 문을 여는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차가 넝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오므로는 끝내 보고야 말았다. 차는 차인데, 더 이상 차가 아니라는 것을.
“...일부러 그런 건 아냐, 친구.”
리온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문짝을 발판 삼아 밟으며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데비히츠가 나름 조심히 문을 연다고 열었지만, 뒷좌석의 문짝도 여지없이 나가 떨어졌다. 허무한 표정으로 휑한 보조석 문을 쳐다보던 오므로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똑같았다.
“...이것도 일부러 그런 건 아냐, 하하하!”
데비히츠는 푼수 같은 웃음을 흘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래도 그녀는 오므로를 생각해서 문짝을 밟지 않고 훌쩍 뛰어서 내렸지만, 모라이엠은 리온처럼 문짝을 밟고 내렸다. 뛰어서 내리기에는 소녀의 다리가 너무나 짧았다. 현우와 주영은 오므로의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문짝을 밟고 내렸다.
한밤중의 청계천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천이 흐르는 야트막한 소리와 멀리서 자동차들이 텅 빈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밤하늘은 공해와 미세먼지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았고,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달이 희미하게 보였다.
“히야……. 이제 이거를 자동차라고 부를 수 있을까?”
데비히츠는 승합차의 외형을 보면서 감탄했다. 어느새 비눗방울이 사라져 창틀만 남아있는 창문,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짝들. 자동차의 천장은 벌집처럼 숭숭 뚫리고 군데군데 달의 크레이터처럼 움푹 패여 있었다.
해골의 옆에 서서 무료한 표정으로 승합차를 바라보던 모라이엠이 작게 말했다.
“응.”
“굴러가질 않는데?”
“자동차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본질은 변하지 않아도 의미가 변질되었잖아. 자동차라는 게 무엇인가를 실어 나르는 걸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데…….”
데비히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게 둘이 무엇인가 이상한 주제로 심오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리온은 청계천의 어두운 곳을 경계했고, 마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차량의 문을 신기하다는 듯이 만지작거렸다.
“오 마이 갓…….”
오므로는 일행에게 다가와 중얼거렸다. 그의 어깨에는 현우가 처음 이종족들을 봤을 때 같이 있던 머리 헝클어진 사내가 메어져 있었다. 그 사내는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현우는 그 사내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몰랐다. 다만 승합차의 트렁크가 열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줄곧 그곳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에 뽑았는데…….”
오므로는 사내를 바닥에 내려놓고 승합차의 겉모습을 보면서 울먹였다.
“어쩔 수 없잖아. 잊어.”
데비히츠는 어깨를 다독이려고 했으나……. 오므로의 키가 너무 작아 머리를 다독였다. 그는 문득 천장을 벌집처럼 만든 장본인이 그녀라는 것이 생각나 인상을 팍 구겼다.
“오므로, 근데 자동차가 굴러가야지만 자동차냐?”
데비히츠가 뜬금없이 물었다.
“갑자기 뭔 소리야?”
“그러니까, 이 말이야. 지금 이거를 자동차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 이게 자동차지, 뭐야?”
“굴러가질 않잖아.”
둘은 ‘과연 굴러가야지만 자동차인가?’라는 엉뚱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현우야”
주영이 작게 소곤거렸다. 그녀는 다른 이종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실루엔노틀이 뭐야?”
현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도 실루엔노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분명 어제 새벽에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사람들...? 아니, 이상한 생명체들은 도대체 뭔지…….”
이종족들을 스윽 훑어본 주영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현우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들을 쳐다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이 이종족들은 실루엔노틀이라는 다른 세계에서 왔대. 그……. 나를 구하러 왔다고 하더라.”
“너를 구한다고?”
“우리를 쫓아오던 흑표범들 있잖아? 녀석들은 그림자를 잡아먹는 종족이래. 그래서 그들로부터 실루엔노틀이라는 세계?로 나를 데려가는 게 목적이라고 하던데.”
“다행이 치매는 아닌가 보군.”
어느새 리온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틀린 게 있어.”
“뭐가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지 모르겠군. 녀석들은 쉐도어의 그림자를 잡아먹지, 일반 인간의 그림자는 잡아먹지 않는다고.”
처음 들어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주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우는 ‘그걸 왜 또 말하느냐’는 표정으로 리온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 여자애는 하울릿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리온이 답답함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제가 분명히 봤다니까요. 주영이가 녀석들한테 공격당하는 걸.”
현우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치킨집에서 하울릿에게 팔뚝을 물린 주영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후……. 그러니까 그건 내가 만들어낸…….”
괴상한 소리가 리온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모두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걸레짝이 된 승합차가 낮은 비탈길을 쿵쿵 튀기면서 굴러가고 있었다. 오므로가 밀었는지 그는 손을 탁탁 털면서 이유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승합차는 그대로 비탈길을 내려가 청계천에 처박혔다. 짤막한 굉음이 한밤의 고즈넉한 침묵을 깨뜨렸다. 하천이 워낙 얕아서 옆으로 쓰러진 승합차의 모습이 수면 위로 보였다. 잠시 후, 주위는 다시 긴 침묵에 잠들었다.
리온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표정으로 동료들을 나무랐다. 그들 중 데비히츠와 모라이엠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고, 오므로는 승리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겼어, 리온! 굴러갔으니까 저건 자동차가 맞아! 하하하! 자, 데비히츠, 지금도 자동차가 아니라고 우겨보시지?”
“음……. 그래, 지금은 진짜 자동차가 아니군.”
데비히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녀를 약 올리던 오므로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데비히츠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곱씹고 있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너 이 자식!”
오므로는 펄쩍 뒤며 돌주먹을 휘둘렀다. 데비히츠는 여유롭게 도망가면서 외쳤다.
“캬하하하!! 골덴 종족은 정말이지 대단한 종족이야! 머리도 돌로 되어있다니!”
“잡히면 가만 안 둬! 오냐, 잘 됐다. 바올리언스 대학교에서 자제가 부족하다고 했는데, 네 뼈다귀를 전부 분해해서 교육용 자제로 기부해버리겠어!”
쿵쿵쿵!
덜그럭덜그럭!
둘은 종족 특유의 걸음 소리를 내면서 비탈길을 내려가 청계천 다리 밑의 그늘진 곳으로 사라졌다. 주영은 돌덩어리와 해골이 장난치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가 막혔다.
“저 녀석들은 도저히 긴장감이 없단 말이야. 후……. 어디까지 말했지? 아, 거기까지 말했군. 하울릿들이 이 여자애를 공격한 것을 현우 네가 봤다고 했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내가 만들어낸…….”
이번에는 비명소리가 리온의 말을 가로막았다.
“젠장, 말 좀 하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둠 속에서 오므로와 데비히츠의 비명소리와 그들이 뛰면서 생기는 소리 이외에도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네 발 달린 짐승이 달려오는 듯한 인기척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리 밑의 어두운 곳을 향했다. 비명소리가 가까워지는 가 싶더니 다리 밑에서 데비히츠와 오므로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뒤에 둘이 나타났던 어둠 속에서 하울릿들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도망가!”
데비히츠와 오므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탈길에 있는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하울릿들 중 몇몇은 둘을 쫓아 계단을 올라왔고, 몇몇은 비탈길을 훌쩍 뛰어 올라왔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규칙도, 방향도 없었다.
“제길, 뛰어!”
리온의 말이 신호가 되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그들이 죽기 살기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리온은 바닥에 뉘어져 있는 사내를 허둥지둥 업고 달려갔다.
현우는 휘청거리며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들의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미량서점, 데미서점, 푸른서점.
“헌책방 거리?”
주영이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영업이 끝난 헌책방들 중 딱 한 곳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리온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로 모라이엠, 현우, 주영 순서대로 따라 들어갔다. 낡은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먼지 냄새가 확 풍겼다.
“당신들 뭐야?”
책방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다 말고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몸이 회색으로 변하면서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대로변 쪽 벽과 문도 홀연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