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men Puella Epilogue
1. 작별
아르키메시아 최북단 해역에서 북북동 방향에 있던 레드럭 해적단의 본거지는 엘리의 활약으로 초토화되었다.
다행히 납치된 사람들과 루리, 렌티오스까지도 멀쩡한 것을 보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엘리가 날뛴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과정으로 미로토러스의 성과 섬 일대가 초토화되었는지 모르겠다.
루리의 말을 빌리자면, “WQT때 그 검이 말했던 종국선언(終國宣言)이 어떤 의미인지 똑똑히 보았어요.”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해적들의 칼을 맞고 쓰러진 다음에 벌어진 엘리의 학살과 잔혹함을 말하자면, 미로토러스가 보여준 것은 그녀에 비해 세발의 피도 안 된단다.
미로토러스는 그녀가 예고한대로 아주 철저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고 한다. 그 마인의 입에서 ‘제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하지만…….
만약 다른 해적들이 해적질을 하게 된 것이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미로토러스의 세뇌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몇몇은, 만약에 세뇌나 협박, 혹은 어떠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렌티오스나 루리처럼 해적을 안했을 지도 모르는데 과연 그들까지 학살한 엘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레드럭 해적단이 죽어 마땅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은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많은 부하들이 미로토러스와 함께 납치한 여성들을 겁탈했다고 한다.
하지만 얘기했듯 렌티오스나 루리처럼 협박과 세뇌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가항력적으로 해적이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까지 복수의 칼날에 휘둘린 건 정말 옳은 일이었을까…….
내가 죽음을 결심해 엘리를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이미 이런 식으로 될 거란 것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마도사 한 명이 5대 해적단 중 하나를 쓸어버린 엄청난 사건에 대해, 마족과 해적 관련 퇴치 및 범죄 관리와 수사, 처벌을 담당하는 기관인 ‘LUBI’에서 내린 결론은 무죄였다.
엘리가 보증하는 인물인 나는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죄가 되었다.
그리고 렌티오스와 루리 역시 이 일로 조사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루리는, 세뇌로 인한 불가항력이었던 점과 그녀가 관여된 일에 대해서 피해가 크지 않았던 점, 엘리가 보증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반면 렌티오스는 레드럭이 선장이던 시절에 선원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징역 2년.
‘어차피 옐드라실로 돌아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였으니 상관없어! 이곳에서 죗값을 치르고 나오면 조금은 인식이 달라지겠지! 케켓!’
투르피스 족 역시 인간보다 두 배는 오래 사는 종족이라고 하니 2년 정도는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닐지도 모른다.
‘루리!’
‘렌티오스…….’
‘내 꿈은 네 무대를 만드는 거야! 미로토러스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지만 반드시 기다리고 있으라구!’
그가 유치장으로 들어가던 날 헤어지면서 한 말이었다.
‘꼭 건강하게 나와야해, 렌티오스……!’
‘렌티오스 군……, 정말 고마워.’
루리가 녀석을 안고 토닥여주었고, 그녀의 어머니 테레이엘 씨 역시 렌티오스에게 감사의 표시로 인사를 마쳤다.
그렇게 우리는 렌티오스와 작별을 하고 소서리아의 집으로 돌아왔다.
5년 만에 일상으로 돌아온 루리와 테레이엘 씨는 옐드라실에 돌아가서 거주할 만한 곳을 수소문했고, 적당한 곳을 찾을 때까지 잠시 소서리아에 있기로 하여 같이 지냈다.
―참, 나브 부인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는 없지.
렌티오스와 작별한 날, 랄프 아저씨와 함께 테라로사로 떠난 나브 부인이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고 세르만 아저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랄프 아저씨는 테라로사에서 세르만 아저씨와 만나 오랜 회포를 풀고 유골 앞에서 추모도 마쳤다고 했다.
――그렇게 작전명 ‘가족 구하기’가 있던 날부터 3주 정도가 지났다.
“자아――, 오늘 저녁은 레드링 스프와 빵이에요. 후훗, 제 필살기라고나 할까요.”
테레이엘 씨가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었다.
“오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레드링 스프구나――!”
“네! 유하 님, 엄마의 레드링 스프는 오르초마을에서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최고의 스프라구요?”
보통의 스프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살짝 황금처럼 빛나는 색깔이 식욕을 돋우었다.
‘과육으로 만든 스프라니, 달아서 별로이지 않을까.’라며 걱정하던 속마음은 수저로 스프를 한 입 입에 담아 넣자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마, 맛있어! 생각보다 달지 않네! 오히려 고소한 맛이 훨씬 많고 간이 적당히 배어있으면서 단맛은 감칠맛을 돋우는 수준에서 스프의 맛을 환상적으로 살려주고 있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맛있다!
빵과 함께 곁들여 먹거나 빵을 찍어먹으면 환상적인 콤비네이션이 탄생할 정도다!
―오오, 이것은……?!
가본 적은 없지만 마치 옐드라실의 꼭대기 위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느낌!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아래의 구름에 풍덩 빠지고 싶을 정도로 텐션을 업 시켜주고 식욕을 환상적으로 끌어올린다!
그럼에도 빵과 함께 곁들여 먹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져서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잘 먹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물론이고 두 모녀도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이 스프는 시간마저도 순식간에 초월하는 맛이 있다.
“자, 그럼, 치워볼까나.”
“앗, 놔두세요, 유하 님. 저랑 루리가 치울게요.”
다 먹은 접시들을 설거지대에 옮기려는데 테레이엘 씨가 극구 나를 말렸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말리지 않았더라도 일단은 멈추었을 지도 모른다. 이유는――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음? 누구지? 이 저녁시간에 올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랄프 아저씨인가?”
“제가 나가 볼게요!”
루리가 현관 쪽으로 나가면서 “누구세요―?”라고 외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현관 앞에서 멈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보고는 일단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끼이이.
“아, 실례합니다. 앙고리아인 두 명이 옐드라실로 이주할 곳을 찾는다고 하길래……. 응?”
“어……?”
우리들의 집에 찾아온 사람은 앙고리아인. 키가 훤칠한 남성이며,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어깨에는 활을 메고 있었다.
그 사람이 루리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너 설마, 푸엘루리엘이니……?”
“아아……!”
그의 물음을 듣고 루리 역시 머리카락이 쭈뼛 솟을 정도로 놀라고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내 뒤로 숨었다.
“엥? 루리? 왜 그러는 거야?”
“흐잉…….”
루리는 창피한지 얼굴을 내 등에 파묻고는 빼꼼 눈만 내밀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창피해하자 테레이엘 씨도 부엌에서 나와서 현관 쪽을 보았다.
“아, 설마 테레이엘 씨?!”
“제 딸을 아시나요?”
“네! 물론이죠! 부부께서 레드럭 해적단에 납치되신 이후에 잠깐 푸엘루리엘을 맡아서 돌봐준 적이 있는데……, 이렇게 계신 것을 보니 무사히 구출되셨나보군요!”
그가 현관 앞에 서서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나는 손님을 마냥 집 앞에 세워둘 수 없어서 그가 루리 모녀와 거실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차를 한잔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그는 내게서 받은 차를 응접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으흠, 저는 옐드라실 치안군 근지(根地)부 소속의 치안병 소대장 ‘미실레이’라고 합니다.”
“저랑 제 딸은 잘 아시는 것 같으니, 이 분은 저를 구해준 모험가 중 한 분, ‘이유하’ 님이라고 합니다. 이 집의 주인이기도 하시고…….”
테레이엘 씨가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나를 그에게 소개시켜주었고, 나와 그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간 있었던 일들과 루리가 옐드라실 간지(幹地)의 아케리 마을에서 지내면서 활과 싸움을 배웠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말 죄송해요……,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떠나버려서……. 갈 곳 없던 저를 아케리 마을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셨는데…….”
“아니야, 신경 쓰지 말렴. 이렇게 어머니라도 무사히 구할 수 있었으니 정말 다행이다. 네블리엘 씨는……, 정말 유감이구나.”
그가 안타까워하며 두 모녀를 위로했다. 루리 역시 눈썹이 조금 안쓰럽게 구부러졌지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괜찮니?”
그의 물음에 루리는 옅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을 거예요. 아빠도 제가 항상 웃기를 바랄 거구요. 그리고…….”
제법 단호하게 대답한 루리가 말끝에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이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수줍게 붉어지며 옅었던 미소가 조금 환해졌다.
그녀의 미소에 화답을 하기 위해 나도 싱긋 웃음을 지어주었고 내 화답을 받은 루리가 눈웃음과 함께 행복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면서 그녀가 미실레이 씨에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제겐 아직 못 이룬 꿈이 있으니까요.”
* * *
다음날 아침, 루리와 테레이엘 씨는 미실레이 씨와 함께 곧바로 옐드라실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만 혹시라도 옐드라실에 눈이 내리면 ‘옐드라실 로드’를 올라가는 데에 어려움이 많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유하 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딸을 돌봐주시고 저도 이렇게 구해주시고……. 그리고 새 보금자리를 찾을 때까지 머무를 수 있게 해주시고요.”
테레이엘 씨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가 숙인 고개를 들자, 루리가 닮은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축축해져 있는 게 보였다.
“제가 좋아하는 인물의 유명한 대사가 하나 있죠. ‘사람은 누군가가 구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거야.’라고요. 그저 그 뿐이에요. 저도 루리 덕에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 게 있으니까 그걸로 퉁치죠.”
제법 꼴이 좋아 보이는 내 대답에 그녀가 눈가에 머금고 있던 눈물 대신 미소를 지어서 답례했다.
하지만, 여전히 슬퍼서 구겨진 인상을 피지 못하고 있는 녀석이 하나 있다.
“유하…… 님……. 흑.”
루리가 내 가슴 언저리에 얼굴을 묻으며 훌쩍였다.
“나 참, 어제까지만 해도 울지 않는다면서.”
“그래도 어떻게 안 울 수 있어요……! 유하 님이랑…… 헤어지는데……. 엘리 님께는 인사도 못 드리고…….”
루리가 놓아주기 싫다는 듯이 내가 입은 남색 스웨트셔츠를 꼬옥 쥐었다.
하지만 이별의 때는 언젠가는 다가오는 법…….
―나는 루리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다음 애써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루리, 기억나?”
“어떤 거요……?”
“도와주면 네가 할 수 있는 뭐든지 하겠다고 했던 그 말.”
“아, 음……. 네…….”
루리가 잠시 생각하다가 떠올리고는, 창피한지 얼굴이 붉어졌다.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네게 무언가 시킬 일이 생긴 것 같아.”
“…….”
내 말에 루리가 침묵하는 것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내가 울지 말고 씩씩하게 옐드라실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멋진 아크로마가 되어서 나와 엘리에게 노래 불러 줘야해. 알았지?”
그 말을 들은 루리가 무언가 과거를 상기하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테레이엘 씨 역시 내 말을 듣고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흑, 흐흑.”
이런, 울지 말라고 다그치기 싫어서 했던 말인데 이렇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 어쩐담.
“루리…….”
“죄, 죄송해요! 갑자기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만…….”
뺨으로 눈물을 흘려보내던 루리가 재빨리 팔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리고는 어제 보였던 것과 같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네! 꼭 아크로마가 되어서 첫 순회공연을 하게 되면 유하 님과 엘리 님을 초대할게요!”
―그래, 바로 그거야, 루리. 넌 웃는 얼굴이 제일 어울려.
“꼭 갈게. 이 집은 잔금을 보태서 구해놓고 랄프 아저씨를 통해 연락을 받을 테니 공연하게 되면 언제든지 이곳으로 편지를 남겨줘. 헤헷.”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특유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짓던 루리는 마지막으로 내 손을 포근하게 잡아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잘 지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그 말을 끝으로 루리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테레이엘 씨와 나란히 섰다.
“테레이엘 씨, 푸엘루리엘, 이제 돌아갑시다. 고향으로.”
몇 걸음 더 떨어져있던 미실레이 씨가 두 모녀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얘기했고, 그렇게 루리는 그녀의 어머니와 손을 흔들며 점점 멀어져갔다.
――멀어지면서 루리가 입가에 손을 모은 다음 입을 뻥긋거렸다. 그리고는 이가 다 보일 정도로 씩씩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