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새하얀 공간.
그 넓이나 크기를 가늠하고 있는 감각이 정말로 맞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광대한 백색의 공간.
마치 우주의 색을 반전시킨 것과도 같은 기묘한 색체감과 스스로를 보잘것없게 느끼게 하는 허무감이 그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유하, 나 자신.
“여긴 어디지……?”
걸음을 옮기며 백색의 하늘에 떠 있는 검은 색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조차 이런 광경은 보기는커녕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마치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듯한 세계같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난 뭘 하고 있었더라.
“어째서 이런 곳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러다 순간, 명치 언저리에서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들어왔을 뿐이었기 때문에.
“설마 나는 죽은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죽음에 가까운 고통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입력되듯이 느껴지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글쎄……, 넌 과연 죽었을까? 아니면 죽게 될까? 그것도 아니면, 죽고 있는 중인 걸까?”
순백의 세계를 방황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고하고 우아하며 나이가 어린 듯하면서도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마음 안쪽으로 파고들어왔다.
그 목소리는 마치 심장을 손으로 주무르듯이 멈춰 있던 내 기억과 감정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목소리.
미간 사이가 찡그려지고 한참 지나서야 어렵사리 그 목소리의 정체가 떠올랐다.
“……엘리시아 폰 예런하이거.”
힘들게 기억의 편린들을 이리저리 헤집어서 발견한 한 조각의 비늘에 도달한 결론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런이런, 미안하지만 그건 내 딸의 이름이야. 아니, 정확하게는 딸이 아니라 내게 선택받은 드래곤의 이름이지.”
정확히 어디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지 몰라 주위를 계속해서 둘러보다가 정면의 먼 곳에서부터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두터운 흰색 로브를 뒤집어 쓴 그 모습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은발이라는 것과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를 어중간한 키와 몸맵시였다.
처음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던 그 목소리는, 생각해보니 남성의 것이라기엔 엷었고 여성의 것이라기엔 두터운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당신은 누구죠……?”
제법 멀찍이서부터 보였던 그 존재의 모습이 바로 눈앞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 이런 경험은 처음일 테니까. 오히려 넌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다고나 할까.”
그 존재가 두건을 벗자, 남자라기엔 장발이고 여자라기엔 단발이 은색의 빛을 반짝거리며 드러났다.
그리고 엘리와 마찬가지의, 아니, 더 심원하게 느껴지는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점점 더 정확히 기억이 상기되는 느낌이다.
“반가워. 내 이름은 람그라시아. 랑그라시아나 란그라시아, 뭐 부르는 이름은 시대나 세계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찬희(燦犧)의 신이지.”
“찬희의 신……?”
“빛과 생명을 담당하고 있는 신이야. 뭐, 이런 걸 알려줘도 별로 의미는 없겠지만. 그럼, 앉을까.”
그가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벤치에 앉았다.
……그보다는 그가 앉으려는 자세를 취하자 ‘벤치가 생겨났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어쨌거나 정말로 신이라면 성별이란 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근데 어디에 앉아야…….
“…….”
“아, 이런. 미안미안. 초면인데 옆에 앉는 건 좀 뻘쭘하려나.”
그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맞은편에 벤치가 하나 더 생겨났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마저 생겼다.
근데 신도 뻘쭘하다라는 말을 쓰는 구나. 속된 말인데, 의외인 걸…….
“하하, 너무 신을 어렵게 보는 것 아냐? 그런 건 편견이라구.”
“엑, 제 생각을 읽으신 거예요?”
“신인데 당연한 거 아닐까? 하계의 일부 종족이 쓰는 권능, 뭐 너희들이 얘기하는 ‘마법’이란 것으로도 상대방의 마음은 읽을 수 있는데, 신이라고 못할 건 또 뭐야.”
……하긴, 없던 벤치랑 테이블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걸 보면 뭘 해도 이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마저도 읽고 있으려나……. 유쾌한 기분은 아니네, 하하…….
―어쨌든 나는 그가 만들어준 맞은편 벤치에 앉았다.
“불편하면 얘기해. 푹신한 거로 바꿔줄게.”
“아, 아뇨, 이걸로도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음료수는 뭘 좋아하지? 녹차? 콜라? 커피?”
“아…… 코, 콜라요…….”
뭔가 기분이 이상해.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곳에 온 건데, 이런 대접은 지극히 사회적인 느낌이…….
“뭐해? 어서 마셔.”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테이블에는 한 잔의 밀크티와 캔콜라 하나가 놓여있었다.
“더 필요하면 얘기해.”
“아, 네에. 저, 근데, 저는 어떻게 된 건가요? 하계…… 맞나요? 그곳에서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데, 역시 칼에 찔려 죽은 건지…….”
나는 캔을 따지 못하고 손에만 쥔 채 그에게 물어보았다.
죽으면 이곳에 오게 되는 건가? 근데 왜 나 밖에 없는 거지? 이곳은 대체 어디지?
갑자기 이런저런 궁금증들이 밀려올라왔다.
“글쎄? 아까도 말했지만 넌 과연 죽은 걸까? 아니면 죽게 될까? 그것도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 중일까?”
그가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유지하면서 아까 했던 말을 다시 입에 올렸다.
“확실한 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네. 그리고 이곳은 죽으면 오는 곳이 아니야. 죽은 사람이 올 수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론 죽으면 창조주 곁에 가게 되지.”
“창조주……라는 게 또 있는 건가요? 신이 제일 높은 줄 알았는데.”
“으흠, 창조주를 그렇게 입에 쉽게 오르내리다간 존재가 지워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아무튼, 이곳은 네가 생각하는 저승은 아니야.”
그가 차를 한 모금 후루룩 입에 담아 넣었다.
“그럼 절 대체 이곳으로 불러들이신 이유는…….”
“――이곳으로 널 불러들인 건 내가 아니야. 이곳은 신의 영역. 그렇기 때문에 나나 다른 신들의 허락이 없으면 대리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올 수 없어. 그리고 난 네가 이곳에 오는 것을 허락한 기억이 없지.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대리인……. 일레비루스 같은 녀석들을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넌 ‘레트릭스의 검’을 본 적이 있구나? 엘리가 자주 쓰는 검이지. 레트릭스랑 나랑은 꽤 친한 편이니까 그의 대리인인 일레비루스의 제어를 받는 조건으로 쓸 수 있게 허락해줬어. 내 딸이 ‘그때’ 이후로 내 검인 ‘미스텔테인’을 영 안 쓰려고 하거든.”
“으음…….”
그가 하는 얘기가 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대략적으로 가늠은 해보려고 하지만, ‘그때’는 뭐고 ‘미스텔테인’은 또 뭐고…….
“흐음, 그러고 보니 좀 닮았어, 너는. 엘리가 왜 너를 따르는 지 알 것 같아. 지금도 레트릭스의 검이 하계에 소환된 것을 보면, 그리고 너를 위해 다시 한번 르쉬케를 불러 계약까지 하려는 것을 보면, 내 딸이 너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네.”
“네?! 엘리가 저를…… 좋아한다구요? 그럴리가――”
“―사실이야.”
드래곤답지 않게 인간인 나한테 꽤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저 좋게 봐줘야 친한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흠.”
그가 별안간 내 앞으로 고개를 내밀어 부담스러울 만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마 네 몸속에 남아 있던 내 딸의 권능 때문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설마 이곳으로 불려질 줄은 몰랐어. 신인 나조차도 놀랄만한 일이긴 해.”
“제 몸속에 남아있던……?”
“하지만 이것 또한 정해진 네 운명이었겠지. 어쨌든 네가 이곳에 오게 된 이상, 난 신으로서 이제 너의 운명을 정할 의무가 있어. 아까도 말했듯이 이곳은 신과 대리인 외에는 금지된 세계니까.”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에 진지함이 끼얹어지니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킬 만큼.
“너, 내 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냐?”
에? 엘리를…… 행복하게……?
순수한 의미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엘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엘리의 그 아름다운 눈에서 보았던 슬픔.
후회.
체념.
절망.
좌절.
책망.
비애.
심장이 끊어지는 고통만큼이나 애절하게 느껴졌던, ――짧은 행복.
아직 그 얘기를, 엘리의 과거를, 엘리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내 얘기도…… 아직…….
듣고 싶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어째서 그렇게 슬픈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지 듣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 슬픈 눈동자를 밝고 찬란한 눈으로 빛내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저는――”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해.”
그가 검지를 세워 내 입을 막고는 조용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게 그 정도 마음도 없다면 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온 너를 창조주의 곁으로 보내버리려고 했지만 네 마음을 확인했으니까 안심이야. 괜히 돌려보내서 희망고문만 하다가 내 딸의 가슴에 더 큰 대못이 박히는 건 보기 싫으니까.”
하지만 그의 미소가 씁쓸한 종류의 것임을 알게 된 건 그가 백색의 세계에 저편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내뱉은 대사를 듣고 나서였다.
“……한 번이면 족해, 그런 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그가 앉았던 벤치와 앞에 놓인 테이블이 사라질 때까지도 나는 손에 들은 캔을 따지 못했다.
“르쉬케, 돌아왔구나.”
중얼거리듯이 나온 그의 목소리를 듣고 점차 멀어지고 있던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옆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회색머리의 사내가 서 있었다.
“네 몸은 회복되었을 거야. 이제 널 하계로 내려 보내줄게.”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의식을 거치지 않는 반사작용처럼 항상 말이 끝나자마자 척척 진행이 되었고, 그에 따라 내 몸은 승화되는 것처럼 점점 공기 중으로 흩어져갔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 못할 거야. 그리고 적어도 죽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 보게 될 일도 없을 거고. 그럼, 내 딸을 잘 부탁해. ――그리고 눈은 서비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시야에서 아득히 멀리 사라져버렸고, 그곳에서의 내 몸은 완전히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 * *
“――――!”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양이 방울같이 귀엽고 맑은 목소리.
본디 그 목소리는 세상의 그 어떤 목소리보다 고고하고 아름다울 것 같은 목소리지만, 지금은 비음이 섞여 그저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같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울고 있는 거야?
끝없는 저편의 어둠속에서 피어나는 빛의 지평선처럼 떠진 시야에 흐릿한 은빛의 형상이 보인다.
―엘리?
그녀는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내 옆에서 주저앉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차가운 눈물을 내 위로 떨어트리면서.
그리고 이 일대는 푸른빛이 쏟아지는 하늘이 보이는 섬……. 아니, 미로토러스의 성이 있던 그 터임이 분명했다.
“엘……리…….”
생각만큼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느리고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고요하고 한적한 가운데에서는 그녀에게 닿기에 충분했다.
“유하?!”
수분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엘리의 눈이 놀라 커다래지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 살아있는――”
와락――.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품에서 따뜻하고 상냥한 온기가, 안도하는 심장박동소리가 내 가슴을 타고 느껴졌다.
“살아있어……, 살아있어……! 유하……! 유하……! 유하――! 흐흑…….”
내 뺨에 부대끼며 전해지는 그녀의 잔뜩 젖어있는 얼굴이, 그 얼굴에서 흐르는 짠맛이, 시야를 아른거리는 찰랑이는 머리가, 달콤하게 풍기는 그녀의 향기가, 애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짖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 오감의 자극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해적들의 칼에 몸통을 관통당한 것이 분명 내 마지막 기억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는 살아있다.
어떻게 해서 살아있는 건지 모르지만……. 분명히 살아있다.
“엘리.”
“흐윽……, 응…….”
내 머리를 감싸듯이 끌어안아 훌쩍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여전히 잔뜩 안도하는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부드럽게 다듬어 내려오면서 눈가에 어려 있는 눈물을 닦아주고는,
――소리 내어 그녀에게 말했다.
“고마워.”
Main Episode 1 – Carmen Puella(소녀의 노래)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