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으로서 만끽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이로다.”
미로토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리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엄만 괜찮아. 사랑해――.”
테레이엘이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이것뿐이었다. 루리가 가능한 상처받지 않도록…….
“엄마아――!”
미로토러스는 끔찍하리만치 잔인하게, 그리고 피와 눈물도 없이 극악무도하게 세뇌시킨 루리의 몸을 장악했다.
루리는 미로토러스에게,
유하는 해적들에게 붙잡혀서,
엘리시아는 자신이 움직이면 유하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루리의 손에서 떠난 화살은 그렇게 그녀의 어머니에게――
――팅!
“오옷! 맞췄다! 케켓!”
동굴의 위쪽에 뚫린 통로에서부터 주먹만 한 돌이 날아와 루리의 활에서 쏘아져 나간 화살을 튕겨내었다.
“――렌티오스 님 등장이다! 케케켓!”
“렌티오스?! 어떻게?”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잡혀버린 거냐, 인간! 카캇! 나야 뭐, 성으로 돌아가서 지하통로 길이 있나 찾다가 한 인간 여성이 나오는 곳을 보고 달려왔지!”
유하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렌티오스를 반갑게 맞았다. 렌티오스 역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가 다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미로토러스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렌티오스……. 옛 동료의 정을 생각해 세뇌시키지 않았더니 감히 내 즐거움을 방해해!”
미로토러스의 분노가 차오르자, 평범했던 그의 팔과 다리에서 예기(銳器)가 튀어나오며 점점 더 악마와 같은 형상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한편 루리는 자신의 손으로 제 어머니를 쐈다는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게 끝이라는 좌절과 절망, 삶의 목적을 잃은 듯한 허망감.
그러한 것들 이외에는 루리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으리라.
“루리! 정신 차려, 루리!!!”
유하가 그렇게 목울대가 터져라 루리를 부른 이유는, 불안정했던 루리의 세뇌가 미로토러스가 변신을 하는 과정에서 그가 신경을 못 쓰자,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루리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축 쳐진 연극 인형처럼 주저앉아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안 그래도 잔인한 마인의 분노가 잔뜩 차오른 마당에 그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루리가 당장 저 미로토러스의 팔다리에서 튀어나온 검 같은 것에 베이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루리만큼은 반드시 살리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 서로를 가족처럼 생각한 것은 루리뿐만은 아니었기에.
“큭……. 엘리, 지금 어떻게 안 되겠어?”
유하는 미로토러스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몸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을 때가 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시아 역시 유하와 마찬가지로 생각해 한쪽 발을 떼려는 순간―
뿌득――!
아직 발조차 떼지 않은 흠칫한 순간이었음에도 해적이 유하의 어깻죽지를 부러트리듯이 꺾었다.
“크하악――!”
“유하! 치잇……!”
과연 미로토러스의 세뇌는 상상이상으로 자율적이면서도 완벽한 통제에 따르고 있었다. 시전자의 의식에 따를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상황에서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마치 인공지능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엘리……. 크윽.”
“유하…….”
유하를 바라보는 엘리시아의 걱정 어린 시선은 너무도 안쓰러운 것이어서, 이런 상황임에도 오히려 유하는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계속 자신을 생각해준 그녀에게 그렇게나 상처를 주는 말을 했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다시 걱정해주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죽어, 크크크큭――!”
그러나 그러한 감상도 잠시, 갑작스럽게 미로토러스가 렌티오스가 밟고 있는 통로 쪽으로 예기를 휘두르자 바위로 된 통로가 날카롭게 잘려져 나가며 와르르 무너졌다.
“으, 으아아악!”
당연하지만 그것에 반응할 수 없었던 렌티오스는 비명을 지르면서 돌무더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매장되었다.
“렌티오스까지……! 루리! 제발 정신 차리고 도망쳐! ――크악!”
유하가 어떻게든 그녀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이름을 불러보지만 이미 루리는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가 루리의 이름을 외칠 때마다 해적은 유하의 팔을 점점 꺾어 들어갔다.
“유하……! 그만……, 그만 부르거라!”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던 유하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몰골은 처참했다.
이미 안경은 박살이 난 지 오래라 시야도 그저 누가 누군지 정도만 알 수 있을 정도로 흐릿했으며, 헝클어진 그의 앞머리는 가라앉아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전히 황망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무능에 대한 자괴감과 무력감.
렌티오스가 뒤늦게 나타나 준 덕분에 루리가 제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저 연명하는 시간이 조금 늘어났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돌이킬 수 없이 미로토러스에게 모두 당하고 만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단.
모두가 행복한 결말은 맺을 수 없다.
“킥,”
어두운 그림자가 진 유하의 얼굴 아래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크크큭, 하하하!”
별안간 유하가 동굴 안이 떠나갈 듯이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유하……?”
그런 그의 모습을 엘리시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웃는 낯을 본 것은 변형을 마친 미로토러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비록 여전히 멍청하게 초점을 잃은 눈빛이었지만 루리도 유하의 웃음소리에 반응하며 시선을 그에게로 천천히 옮겼다.
“호오? 아주 좋은 얼굴 표정이로다. 그런 실성한 얼굴을 나는 아주 좋아하지. 하하하!”
다시 특유의 부드러운 억양으로 말하는 미로토러스였지만 그의 구겨진 얼굴이나 분위기는 여전히 주변의 공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실성……?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크큭.”
“푸하하! 그렇다면 뭐란 말이지? 인간 중에서도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인 네 녀석이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미로토러스가 유하를 힘껏 비웃었다.
“네 녀석은 그저, 이 미로토러스의 노예가 될 아름답고 우아한 저 엘리의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지. 네놈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나는 벌써 끝났을 지도 모를 일. 그러니까 네 녀석은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뭐, 나는 쓰레기 같은 녀석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인이긴 하지만.”
“닥쳐라……!”
엘리시아가 감춰놨던 은빛의 살기를 다시 짙게 흩뿌리며 미간을 좁히고 이를 앙다물었다.
“하하, 몇 번이나 말했지만 자칫하면 저 쓰레기가 죽게 된다구, 엘리. 그건 내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변하지 않지.”
그가 모습을 변형하고 있을 때 해적들의 움직임을 보면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하가 죽으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네놈을 아주 철저하게 공을 들여 처죽일 것이다.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해도 죽지 않고, 아주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그러나 엘리시아의 진심어린 협박이 마인인 그에게 통할 리 없었다. 마인에게 있어서 협박은 그저 그 존재의의를 잘 실천하며 살고 있다고 하는 칭찬에 지나지 않는다.
“하하, 해볼 수 있으면 해보든가! 뭐, 그 전에 어떠한 공을 들여서라도 넌 내 세뇌로 노예를 만들어 매일 밤을 나와 함께하게 할 거지만. 하하――”
“――하하하하!”
“……하?”
미로토러스가 실소를 터뜨린 건 자신의 비열한 폭소보다 더 크게 웃어 그것을 상쇄시키는 유하의 웃음 때문이었다.
“……그래, 난 쓰레기지.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알아주니까, 의외로 기쁜 걸? 마인에게 인정받은 쓰레기라니. 크큭!”
“뭐? 하하하! 재미있는 녀석!”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체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게다가 이기적이어서, 루리를 도와주려는 내 욕심에 엘리까지 끌어들여서 네 녀석에게 수치스러운 일마저 당하게 만들었어. 정말이지……, 나는 최악이다.”
“유하! 그렇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말거라!”
“……엘리, 상처 줘서 미안했어.”
“미안했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푸우에엘루리에에엘――――!!!”
무언가를 각오한 한 남자의 의지는 무엇보다 강하다.
이제는 어깨가 완전히 비틀어져 돌아가는 순간임에도 유하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질러댈 비명 대신, 루리의 본명을 있는 힘껏 불렀다.
“유하……님?!”
이번에야말로 유하의 목소리가 루리에게 닿았다.
멍청하게 유하 쪽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루리가 정신을 번쩍 뜨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뭘 그렇게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계속해 질러대는 유하의 고함소리에 동굴 안에 메아리가 치고, 미로토러스와 세뇌당하고 있는 해적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의 목소리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니, 미로토러스조차 황당무계한 이 인간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듣고 있었다.
마치 다 죽어가는 사냥감이 얼마나 발악할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여유로운 포식자처럼 호기심마저 치솟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푸엘루리엘은 밝고, 긍정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쉽게 포기하지 않아!”
“――――.”
죄책감 때문에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삭막하게 말라버린 루리의 눈이 점점 촉촉해졌다.
비록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 지라도 자신의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는 자책감.
게다가 자신도 모르게 세뇌당해 가족만큼 소중한 두 사람을 곤경에 빠트렸다는 충격 속에서 자신은 울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저는……. 웃을 자격은커녕 울 자격조차 없――”
“그딴 거 알게 뭐야!!! 그 누구도 널 탓하지 않아! 너는 그저 부모님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 했을 뿐이야! 나쁜 건 네가 아니라 저 새끼라고!”
유하가 부릅뜬 눈으로 미로토러스를 노려보았다.
미로토러스는 오히려 그의 욕지거리에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듯이 얼굴이 상기되었다.
“――흑, 흐흑…….”
새어나오는 둑을 억지로 막고 있던 루리가 흘러넘치는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터뜨리고 말았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은 무심하게 했지만 친숙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나쁘지 않았어!”
“흐윽…….”
“WQT때에는 랄프 아저씨랑 같이 엘리를 응원하고 더욱 친해졌다고 생각했어!”
“저……, 저도예요……!”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루리가 애절한 눈으로 유하를 바라본다.
그리고 루리와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또 한 사람.
“5년 동안 너는 포기하지 않아서 우리를 만났어……! 테라로사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를 보살펴주고, 엘리를 부르기 위해 노력했어! 근데 이제 와서 그렇게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살아. 어떻게든 살아! 누가 어떻게 되든 무조건 살아서 행복을 찾으란 말이야!”
“흐흑…….”
그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테레이엘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너를 만난 덕에 나도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뭐……, 이제는 끝이지만……. 크큭. 루리, 너를 만난 덕에 나는! 엘리마저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됐단 말이다아아아――!!!”
유하가 고개를 돌려서 천진스럽게 웃으며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엘리시아는 그의 미소에 자신이 유하에게 소극적인 태도를 했던 것에 대해 용서와 구원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어 안도했다.
하지만 그 안도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아직 몰랐다.
“푸엘루리엘!!!”
우드득.
계속해 옥죄어오는 해적들의 고문에 가까운 꺾기는, 유하의 연골이 완전히 뒤틀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럼에도 유하는 비명대신 루리의 이름을 불렀다.
“네, 유하 님! 하지만 이제 제발 그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루리는 그의 고통을 십분 느끼듯 괴로워했다.
“너는 불쌍한 아이가 아니야아아!!! 크윽……!”
물론 팔과 어깨가 부러지고 꺾이는 고통을 쉽게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우는 얼굴보다 웃고 미소 짓는 게 어울리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며 함께 있고 싶은, 그리고 그 가족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는, 그런 ‘소녀’다―――!”
터진 루리의 둑이 홍수처럼 넘쳐흐른다.
“자아, 이제 끝났으면 슬슬 즐겨보실――”
미로토러스가 손뼉을 치고는 입맛을 다시자, 유하가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부러진 어깨 연골을 이용해 몸을 틀어 자신의 팔과 어깨를 잡고 있는 해적 중 한 명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달려가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멀지 않은 거리의 엘리시아와 눈이 마주쳐졌다.
그의 입이 네 번, 움직인다.
‘고마웠어.’
“안 돼!”
그의 행동은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심지어 미로토러스 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푸슈욱――.
“커헉…….”
――미로토러스를 위한 세뇌의 자율행동에 따라, 해적들이 유하의 몸에 칼을 꽂았다.
“유하아아――!”
절규에 가까운 엘리시아의 울부짖음이 동굴에서 지상의 성 전체로 울려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