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야!”
앙고리아족 여성이 철창의 문 가까이에서 쇠창살을 잡고 루리를 애타게 불렀다.
“어, 엄마……! 엄마!”
루리가 빠르게 철창 앞으로 달려가 그 여성의 손을 맞잡았다. 얼굴 가득 폭포같이 흐르는 물줄기를 담고.
“엄마……. 흐아앙――! 엄마! 엄마! 엄마아……! 흐윽…….”
“그래, 루리야…….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엄마아……. 아빠, 아빠는?”
루리가 그녀의 아버지를 찾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눈물을 글썽이던 어머니의 눈에서 차가운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흐흐윽, 아빠…….”
우악스럽게 구겨진 미간과 함께 눈썹을 팔(八)자로 구부린 루리의 어머니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루리는 그저 어머니의 품에서 그녀의 부모를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쪽 철창에도 여성들 밖에 없는 것을 보면 렌티오스가 얘기했던 대로……. 그럼 루리의 아버지는 이미…….
“젠장…….”
나는 루리와 그녀의 어머니와의 재회에 대한 감상을 뒤로하고 그리시스 영감의 부인을 찾아 나섰다.
철창을 하나하나 살필 때마다, 그리고 그 철창에서 아이들을 발견할 때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나브 부인을 불렀다.
“나브 부인!”
“나를 살려주오! 제발!”
“나브 부인!”
“사람이다! 사람이야!”
부인의 성을 부르며 찾을수록 점차 철창의 창살 앞으로 와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젠장……,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브 부인!”
아홉 번째 철창에 다다를 때까지 부인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이제 남은 건 가장 구석에 있는 마지막 하나 남은 철창. 이 철창은 젊은 여성 2명밖에 없는데…….
“설마 이미 돌아가신 건――”
“영감……? 영감이 왔소……?”
“나브 부인?!”
철창을 비추어보고 상심해 다시 처음부터 찾아보려고 하던 찰나, 나이 지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철창을 다시 비추어보니, 구석에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가 쭈그려 앉아있었다.
“영감이 아니었구만……. 당신은 누구시오……? 누군데 저를…….”
“그리시스 영감님의 부탁을 받고 구하러 왔습니다.”
서서히 철창 앞에 서서 얼굴을 드러내는 나브 부인의 상태는 오히려 젊은 여성이나 아이들보다 말짱해보였다.
생각해보면 처음 발견했던 철창에서도 나이 지긋한 노인은 그저 거친 이곳의 환경 때문인지 지쳐있었을 뿐, 젊은 사람들처럼 피를 흘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미로토러스의 목적이 분명하다는 소리였다.
이곳에 갇혀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고리아 여성. 그리고 인간 여성도 대부분 외모가 미려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꺄아아악!”
바로 옆 철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뭐, 뭐지……?”
“해적들이, 해적들이……! 안 돼……! 하지 마……! 살려줘……!”
옆 철창을 비추어보니 한 여성이 발작을 하듯이 자신의 목을 조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봐요, 이봐요! 괜찮아요?!”
철창 앞으로 다가서자, 그 안에 있던 여성 중 한두 명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기겁하며 뒤로 물러선다.
“뭐하는 거예요! 빨리 저 사람 좀 말려 봐요! 저러다 죽겠어!!”
그러나 이미 겁에 질린 여성들은 그저 머리를 감싸고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철창 안은 지쳐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깨어있는 여성 중 절반은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철창에는 정신이나 몸이 멀쩡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케엑, 컥, 커억……!”
“빌어먹을……!”
나는 서둘러 재킷 안주머니 지퍼를 열고 RMP와 마력절단기를 꺼냈다.
커터칼처럼 생긴 마력절단기의 뒤쪽에, 마력을 압축해서 알약처럼 생긴 용기에 담은 RMP를 주입하자 칼날이 플라즈마처럼 빛났다.
“조금만 기다려요! 구해드릴 테니까!”
마력절단기로 창살을 긋자, 날카로운 검으로 대나무를 썰듯이 정교하게 잘린다.
잘린 창살문을 내던지고 안으로 들어가 글로우스틱을 내려놓고 스스로 목을 졸라 자해하고 있던 여성의 손부터 떼어내었다.
“이봐요!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이봐요!”
여성의 뺨을 두들기면서 불러보지만 몸을 부르르 떨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다. 입은 거품을 물고 눈은 이미 흰자위를 보이며 돌아간 상태였다.
이내 그 여성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봐요! ――크윽!”
코에 손을 갖다 대어 보니 따뜻한 바람도 나오지 않고 손목을 만져 봐도 맥박이 뛰지 않는다.
“젠장……! 심폐소생술…… 심폐소생술을 해야 해!”
―근데 어떻게 하는 거더라……! 분명 교양수업에 구급법도 있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백지가 되었다.
전공 수업 때보다는 분명 깨어있는 시간이 더 많긴 했지만 막상 떠올리려고 하니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멍청한 놈! 쓸모없는 놈! 이럴 줄 알았으면…….
뒤늦게 학교생활에 성실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된다.
집에만 틀어박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혼자 울부짖었던 게 후회된다.
지난날의 무력했던 자신이 한심해진다.
―생각을 하면서도 가슴 사이 중간을 어떻게든 압박해 기억나는 만큼만이라도 무언가를 해보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싶지만 이미 겁에 질려있던 사람들은 창살 밖으로 도망쳐 나간 지 오래였고, 쓰러져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산만한 와중에도 정신을 차릴 생각을 못하고 있다.
“루리! 좀 와서 도와줘――!!!”
하지만 아무리 루리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젠장! 젠장! 젠장! 살아나! 살아나란 말이야!
“루리이이! 빨리 이쪽으로 와――”
―쉬이익, 퍽!
“뭐야……?”
―어줍잖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던 대상의 심장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주르륵.
뺨에서 따가운 핏물이 흘러내린다.
꽂힌 화살은 내 얼굴을 스쳐 지나 여성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었다.
“이 화살―”
―루리가 맨 화살통에 들어있는 화살의 깃과 같은 색깔, 같은 모양…….
“루리!!! 이게 뭐하는 짓――”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돌리자, 바로 앞에는 다른 화살을 시위에 얹은 뒤 나를 겨냥하고 있는 루리가 있었다.
“루리……?”
―붉게 변한 눈동자. 무감정한 표정과 굳게 다문 입. 그저 묵묵히 활시위를 크게 잡아 당겨 언제 놓을지 모르는 손.
“대체 왜……. ――설마.”
순간, 잊고 있었던 의심의 싹이 마음속에서 트고 순식간에 자라 그 줄기가 이성과 기억을 잠식했다.
―파르마란스에서 배를 구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을 때에도…….
‘이제 겨우 이곳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데 위험을 감수하시려구요?’
―그 여관의 테라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부모님이 납치되신 건 5년 전이에요.’
‘엑, 몇 개월 전이라고 하지 않았어? 갭이 너무 큰데?’
‘에……? 제가 그랬다구요? ――아아……, 저희 앙고리아족은 인간족보다 몇 배는 오래 사니까, 5년이라곤 해도 때때로 몇 개월처럼 느껴져서 시간 감각이 헷갈릴 때가 있거든요.’
―한 달 전, 각종 도구들을 구하기 위해 세르만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었을 때에도…….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래. 아참, 갑자기 생각난 건데 지난번 멘탈이터 사건 때 루리와 단 둘이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는데 뭔가 엄청 단호해보였어. 널 필사적으로 구하려고.’
‘네? 정말요? 하하…… 민망한데요.’
‘그게 아니라, 이건 내 감이지만 생각해보면 루리는 뭐랄까, 미묘하게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에이, 설마요. 그렇게 착한 녀석이요? 농담도 참.’
‘……역시 그렇지? 하하하! 그럼,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
―싸운 흔적도, 누구와 같이 있던 흔적도 없었는데 섬 북쪽에 미로토러스에 성과 해저터널이 있다는 걸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찾아온 것.
반년 전에 레드럭으로 복귀한 렌티오스도 몰랐던, 성으로 가는 비밀의 지하통로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
‘……미로토러스는 세뇌능력이 있어. ……그 능력 때문에 해적단에서 혹시라도 도망치는 녀석이 생겨도 귀소본능을 발휘해 자신의 휘하에 오게 되지.”
‘…………굳이 그렇게 변수를 키울 필요가 있을까?’
‘……세뇌를 통한 자유행동은 전부 미로토러스를 위한 것으로 치환이 되게끔 설계되어있어. 그러니까……. ……결국에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득이 되는 일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는 거지.’
―루리는 세뇌 당한 게 분명하다.
저벅. 저벅.
동굴 어디에선가부터 들려오는 거칠고 둔탁한 발소리.
그리고 이어서 께름칙하고 소름끼칠만큼 부드러운 목소리가 동굴에 잔향을 그리며 울렸다.
“어여쁘고 착한 푸엘루리엘, 다녀왔니? 그 활은 잠시 거두려무나.”
그 말에 루리가 당겼던 활시위를 천천히 풀고는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셨습니까, 미로토러스 님.”
“이런, 이런. 선장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 여전하네.”
어딘가에 널브러져 있는 글로우스틱의 빛과 함께 어둠이 눈에 점차 익어가자, 시커먼 그림자에서부터 미로토러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보였다.
악마의 그것과 비슷한 뿔, 거대한 박쥐 같은 날개, 끝이 창촉처럼 생긴 검은색의 기다란 꼬리.
랄프 아저씨가 건네준 정보 현황에 적힌 대로 미려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과 비슷한 모습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의 눈은 호박색인데다가 동공이 작았고, 그의 피부는 마치 황소의 가죽처럼 털이 짧고 거칠어보였으며, 갈색으로 뒤덮였다.
―이어, 녀석의 가증스런 미소가 보인다.
“칸디투스가 쓸모없어져 버렸지만 푸엘루리엘 덕분에 아주아주 예쁘고, 강한, 아름다움의 극치인 여성을 곧 얻게 될 거란다. 정말로 고마워. 반년 전에 널 내보낸 건 좋은 선택이었어.”
“별 말씀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루리! 정신 차려!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잖아!”
“훗. 그게 정말일까, 푸엘루리엘?”
미로토러스가 루리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상체를 살짝 굽혀 그녀의 턱을 천천히 올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제 선택은 언제나 미로토러스 님을 위해――”
“웃기지 마――!!! 넌 세뇌 당하고 있는 거라고!”
“―서만 존재합니다.”
루리가 순간 움찔하듯이 멈추었다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마저 꿇고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미로토러스의 발에 고개를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하지 마! 그만해!”
할짝.
“아아……. 실로 엄청난 행복이로다. 오늘,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면 나의 침실에 오너라, 푸엘루리엘.”
“닥쳐――! 쓰레기 같은 새끼야!!!”
“호오. 제법 기개가 넘치는 사내로군. 그대가 여기에 온 이유는 이곳에 있는 여성들을 구하기 위함인가?”
순간, 렌티오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 번 세뇌를 하면 적어도 반년은 가니까, 보통 반면 주기로 집합을 하는 편이지.’
―그래, 저 녀석이 분명 반년 전에 루리가 이곳에서 나갔다고 했으니 분명 세뇌가 유지되는 기한이 끝나갈 거야.
그게 오늘일지 내일일지는 몰라도, 방금 전 루리가 순간 멈춘 건 기한이 끝나가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 시간을 끌어야 해…….
“그, 그래……. 이 많은 여성들을 어쩔 셈으로 납치한 거냐, 대체! 그리고 왜 자신에게 도전한 모험가들의 유골을 모으는 악취미를 가진 거지?”
“풋, 푸하하하!”
“뭐, 뭐가 그렇게 웃기지?!”
미로토러스가 별안간 루리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더니 눈동자를 빨갛게 빛내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내팽개쳤다.
“얄팍한 수가 훤히 다 보이는 군. 이로써 내 대답에 성실이 응할 마음이 생겼는가? 하하하!”
“……설마, 다시 세뇌한 거야?”
“보시는 바와 같이.”
동굴의 딱딱한 바위에 내팽개쳐져 이마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루리는 재빨리 일어나 미로토러스의 발을 핥았다.
“크윽, 이 개자식이――!”
더 이상 보고만 있기 힘들어 칼을 뽑아 들고 미로토러스에게 돌진하려 했으나―
파앗―.
“루, 루리…….”
미로토러스의 목을 향하던 검의 끝은 녀석을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는 루리 때문에 도중에 방향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런……. 가엾은 사내로다. 놀이는 이쯤 하고 슬슬 온 것 같으니 준비를 해볼까. ――푸엘루리엘, 저 녀석을 잡으려무나.”
“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오다니.”
“네, 미로토러스 님.”
당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미로토러스의 의중을 분석할 틈도 없이 녀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루리가 빠른 속도로 나를 제압했다.
“크윽, 루리!”
팔이 꺾여 조금만 움직여도 부러질 것 같다.
루리가 허리춤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들어 날카로운 촉을 내 목에 겨누었다.
“―왔군.”
미로토러스가 나지막이 말하고 나자, 갑자기 동굴 한쪽에서 은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쿠아앙――!
―큭, 이건 대체 또 무슨…….
“――유하! 드디어…… 찾았다…….”
동굴의 벽이 굉음을 내며 무너짐과 동시에 빛이 쏟아져 들어왔기에, 재차 겪는 암순응으로 동굴 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동굴 안도 환하게 비춰져 글로우스틱 따위 다시 꺼낼 필요도 없었다.
“엘리……!”
―그곳에는 온통 은색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