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나는 배의 갑판으로 올라가 엎드려 숨은 뒤, 고개를 내밀어 주변의 전체적인 동태를 살폈다.
“케켓! 새로 들어온 이 디스트로이어급, 내부도 그렇게 때깔이 난다며?”
“나랑 개코가 화물창고까지 확인해봤는데, 깔끔하긴 하더라고. 크큭!”
외딴 섬 치고는 꽤나 큼직한 부두……. 그리고 그 부두를 순찰하는 두 해적.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지만 부둣가에 켜진 가로등 덕에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는 우리가 타고 온 범선을 비롯해 비슷한 크기의 범선이 또 한 척 있었고, 앞서 이 배를 호송했던, 아마도 두 번째 규모인 에스코터급 함선.
그 외에도 자잘한 크기의 배 다수가, 나뉘어져 있는 각 부두의 구역에 정박되어있다.
랄프 아저씨가 정보를 모아 전해준 양피지에 적힌 양보다 훨씬 배가 많다.
그럼에도 빈 공간이 있는 것을 보면, 바다 밖에 나가있는 녀석들도 있다는 소리겠지.
“대체 어떻게 된 규모냐……. 50명은 무슨, 여기 있는 걸 다 타고 나가면 150명도 훌쩍 넘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더 위험한 녀석들이다.
젠장, 큰소리 뻥뻥 치고 호기롭게 나왔는데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해적단 규모가 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최대한 들키지 않고 찾아보는 수밖에.
……라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자신은…….
일단 조금 지켜본 결과 부둣가에는 확실히 저 ‘짝발’이라는 녀석과 후크로 된 팔을 가진 녀석밖에는 없는 것 같다.
“게다가 녀석들은 이 배 앞에서만 서성거리고 있어…….”
일단 선두의 좌측에 서 있는 저 녀석들과 반대로 선두 우측으로 들키지 않게 빠져나가려면…….
사다리를 조심스럽게 타고 내려가 선미 쪽으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부두에 정박된 배의 선미 쪽은 배가 들어와야 하는 입구이므로 당연히 반대편으로 길이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게 문제다.
배의 폭은 어림짐작으로 20m정도…….
“역시 저 녀석들이 멀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하나.”
그러나 운 좋게도 녀석들이 이곳을 뜨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만, 이곳을 뜨며 나온 녀석들의 이야기는 내 평정심을 흐트러뜨림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 조선공은 바다에 투신했다며?”
“그래, 이 날씨에 투신했으니, 지 아들놈하고 자살한 거나 다름없지.”
“뭐 잘 됐군. 키킥, 어차피 오늘 동이 트면 그 할망구를 처형한다고 했으니.”
“슬슬 선장님이 전원 집합을 호출한 시간이군. 가자고.”
할망구라고 하면……, 설마 그리시스 영감의 아내?!
“오늘…… 처형한다고?”
가만, 그렇다면 인질들은 살아있다는 소리가 된다. 루리의 부모님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행이야!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길 잘했어!
“그럼 엘리의 통찰은 왜 안 먹힌 거지……? 엘리의 마법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윽, 20분 정도를 엎드려있는 상태에서 긴장을 해서 그런가, 벌써 몸이 뻐근해지기 시작한다.
슬슬 녀석들도 시야에서 사라진지 한참 되어가니 빨리 움직여 볼까.
―나는 재빨리 갑판과 연결된 사다리를 타고 부두로 내려갔다.
“만에 하나 다른 녀석들이 아직 있을 지도 모르니 최대한 조심――”
“……넌 뭐냐?!”
“――?!”
부두에 발을 붙이고 고개를 돌린 순간 눈에 보였던 것은―
“―뭐야, 이 쥐방울만한 놈은? 고블린은 그동안 아르키메시아에서도 한 번도 못 봐서 이 세계엔 없는 줄 알았는데.”
“너, 너 설마 침입자냐?!”
녀석은 재빨리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호루라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삐이익―――!!
―이런……! 큰일이다! 갑자기 맞닥뜨린데다가 딴 생각을 하느라 방심했어!
“케, 케켓! 곧 부둣가에 있는 녀석들이 올 거라구!”
녀석이 입을 씰룩거리며 얍실하고 모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다른 해적들이 오는 일은 없다.
“왜, 왜 안 오지?! 분명 두 놈이 이 근처에서 부두 순찰을 하고 있을 텐데!”
아아, 그 두 놈, 하아아안참 전에 갔거든요? 넌 뒤졌어.
“집합한다고 아―까 갔더라고. 각오해라, 너 이 쬐끄만 자식아?”
“으악! 그러고 보니 오늘 녀석들 집합하는 날이었구나!”
나는 곧바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들었다.
녀석은 정말로 작아서, 내 하반신 정도의 신장밖에 되지 않았다.
생김새는 녹색 피부에 귀와 코가 뾰족하고 못생긴, 정말 고블린과 일맥상통하는 녀석. 웃긴 건 고블린 주제에 머리털이 있고 제법 깔끔하게 다듬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녀석은 무기도 없고, 지금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
“이야아압――!”
“흐이이익! 살려줘!”
약하긴 해도 나름 전투가 가능한 종족이라고 상식으로 알고 있는 고블린과는 다르게 녀석은 얄팍한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두 팔로 애처롭게 내 검을 막으려고 발악을 했다.
―멈칫.
생각해보니 곧바로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으하아으아하, 흐잉? 사, 살았다?!”
녀석이 내 검이 멈춤에 따라 휘적거리는 팔을 멈추며 안심한다.
날 얕보는 건가?
“아직 살려주겠단 말은 안했는데?”
“흐아악! 제발 살려주어!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살려주면 어떡할 건데?”
“저, 정말 살려줄 거야?”
“…….”
나 참, 정말 이런 녀석도 해적이 맞는 걸까. 패기도 없고, 무기도 없고, 가진 건 가죽으로 된 크로스백뿐인데.
“그래, 살려줄 테니 뭐 해줄 건데?”
“난 해줄 수 있는 게 없―”
“그럼 죽어야지 뭐.”
―나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짓고 검을 고쳐 잡아 녀석의 목을 겨누었다.
“기, 기다려!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든지 다 해줄게!”
“그럼 너희 해적단에 대한 아는 정보 다 내놔. 모르는 정보도 내놔.”
“뭐, 뭣! 그…… 그건 배신이잖아!”
“그럼 죽어야지 뭐.”
―나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짓고 검을 고쳐 잡아 녀석의 머리를 겨누었다.
“아, 알았어! 구, 궁금한 게 뭔데? 아는 범위 내에선 다 알려줄게! 목숨은 살려줘!”
근데 이 녀석, 머리가 좀 나쁜 거 같네. 어차피 나한테 죽나 정보 누출해서 동료들한테 죽나 매한가지인데. 쯧쯔.
“이 섬에 너희들이 밖에서 납치해온 사람들. 있어, 없어?”
“그, 그 사람들은 미로토러스의 성 지하에 있어!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성? 그 성은 어디 있지?”
“부두는 섬 남쪽이니까, 성은 북쪽 끝에 있어. 저―쪽이야.”
녀석은 손가락으로 섬 한쪽의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숲 너머에 성이 있는 건가본데…….
“멀어?”
“섬 북쪽에 있는 해저터널로 들어가서 꼬박 20분은 걸어야 나와, 이제 됐지! 난 이만!”
녀석이 손을 흔들고는 부두의 다른 구역 쪽으로 몸을 획 돌렸다.
나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걸음을 막았다.
“어쭈, 어딜 가려고.”
“왜, 왜 그래! 알려줬잖아!”
“내가 그랬지. ‘아는 정보, 모르는 정보’다 내놓으라고. 넌 아직 하나 밖에 안 알려줬잖아?”
“너무해!”
녀석, 왠지 내 모습을 보는 거 같기도 한데……?
너도 나 못지않은 겁쟁이에, 맨날 당하고만 사는 놈이구나?
“일단 시간이 없으니 앞장 서. 길 안내를 해줘야겠어. 호루라기는 내놓고. 그리고 크로스백에는 뭐가 들어있는 거야? 무기가 들어있을 수도 있으니까 보여줘.”
“케엑, 철저한 녀석이네! 여기 들은 건 연장이야! 배를 점검하는 수리공이니까 무기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있어도 어차피 나는 싸움 잘 못하는 ‘투르피스’족 중에서도 약골이라구!”
오―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알려주다니. 단순한 녀석이로군. 그나저나 이 세계에선 고블린이 투르피스라고 불리는 건가. 매치 시켜서 기억하려니까 귀찮네.
“연장도 위험하니까 다 버려. 그리고 수리공이 있는데 왜 미로토러스는 그리시스 영감한테 배를 만들어 달래? 이상한 놈이군.”
“자, 이제 됐지?!”
녀석은 크로스백에 있던 연장을 다 바닥에 내려놓고 텅텅 빈 것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전에 망가진 그 배를 고칠 실력이 못 됐어! 선장이 얼마나 나를 구박하던지! 빌어먹을! 그렇게 반파시켜놓고 고치라니, 그건 수리공의 능력을 벗어난 거라고! 그러게 왜 모니카 해적단 녀석들이랑 한판 떠가지고! 전임 선장님이 더 나았어! 제길!”
“야, 쓸데없이 설명충 놀이 하지 말고 빨리 앞장 서.”
* * *
화물창고 안은 천장 문이 열린 채로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고요함.
엘리시아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고, 루리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채 조용히 눈물만을 뚝뚝 흘리며 생각에 잠겨있다.
“전 가겠어요. 만약 저대로 혼자 유하 님을 보낸다면 분명 죽을 거예요.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마침내 정적을 깬 건 루리였다. 그녀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활과 화살통을 고쳐 매었다.
“소중한…… 사람이라니. 내겐 발데르만이……. 아니, 발데르는 이미…….”
엘리시아가 얼이 반쯤 빠진 채 혼자 중얼거린다.
“엘리 님은 유하 님이 소중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럼 지금까지 유하 님을 지켜주려고 하셨던 건 무슨 이유 때문인 거예요?! 그 마기나이트 팔찌도 유하 님의 생명이 위독할 때를 대비해서 만들었다면서요!”
“유하는……. 그보다 발데르가―, 발데르가 떠났어……. 그이를 구해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
얼굴을 손으로 그러쥔 엘리시아의 눈동자는, 이미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초점이 흐릿했다.
“발데르가…… 가버렸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까부터! 발데르가 누군데요, 도대체!”
삐이익―――!!
바깥쪽에서부터 어렴풋하게 들린 호루라기의 날카롭고 높은 소리에 루리의 귀가 쫑긋하며 반응한다.
“호각소리……?! 벌써 들켰나 봐요! 엘리 님! 정신 차려요! 빨리 가서 유하 님을 도와줘야 한다구요!”
엘리시아의 비정상적으로 답답한 행동에 루리가 얼굴을 우악스럽게 구기며 그녀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루리의 행동임에도 엘리시아는 그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눈에 눈물을 머금었다.
“아아…… 가지 마……. 제발 부탁이야…….”
멱을 잡고 흔드는 루리에게 저항할 의지조차 없는 엘리시아의 몸이 다 죽은 사람처럼 흔들리며 머금은 눈물이 반짝이며 공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진다.
―그녀의 눈물이 데크 바닥에 떨어지자, 얇은 나무줄기가 자라난다.
짜악――!
루리의 매운 손이 제세동기처럼 엘리시아의 뺨에 뜨끔한 충격을 가했다.
칙칙한 화물창고의 작은 등불 때문에 빛을 잃어 회색으로 물든 엘리시아의 머리칼이 루리가 휘두른 손에 흩날리며 얼굴을 가린다.
그 충격이 꽤나 심했는지 엘리시아가 머리에 쓰고 있던 하늘색 반다나 머리띠가 루리의 손찌검에 나가떨어졌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엘리시아의 시야 내 바닥에 반다나 머리띠가 보인다.
“그 발데르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유하 님이 위험하잖아요! 짧았지만 우리들, 가족처럼 지냈잖아요! 엘리 님도 유하 님을 좋아하잖아요! 정신 좀 차리란 말이야――!!!”
루리는 심폐소생술을 하는 사람처럼, 엘리시아의 흉부를 압박하듯이 빠르게 쏘아붙이며 말했다.
“………….”
엘리시아는 맞은 자세 그대로 묵묵히 자신의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마음대로 해요! 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루리가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사리물고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
“그 거리에서 유하가 사 준…… 머리띠…….”
엘리시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떨어진 하늘색 반다나 머리띠를 주워서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마치 맑은 밤하늘 위에 떠 있는 무수한 별빛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생기가 돌아와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전부 뒤덮을 만큼 그녀의 눈가에서부터 비처럼 떨어지는 별똥별들.
데크 바닥의 원목이 그 눈물을 마시자 줄기가 자라나 그녀의 주위를 위로하듯 감싼다.
‘엘리, 네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는 드래곤이 되었으면 좋겠어.’
“발데르의 목소리…….”
‘너와 상관없는 사람일지라도 있는 힘을 다해 도와줘.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럼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유하……. 너도 그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거야……?”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유하, 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분명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사랑…… 받고 싶어…….”
차가운 화물창고 데크 바닥에 주저앉아 작게 흐느끼며 중얼거리던 엘리시아가 마침내 천천히 일어선다.
그녀가 일어나자 나무줄기들이 그녀를 배웅하듯이 갈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