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지났을까. 한 시간? 두 시간? 몸이 찌뿌둥할 정도다.
그동안 루리와 조금 농담을 나눈 것 빼고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물론 부족한 잠을 조금씩 채우느라 말을 별로 못 건 것도 있지만, 특히 엘리랑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막연한 기다림이 더 지루하게 느껴진다.
위층에 해적이라도 있어서 녀석들이 떠드는 소리라도 들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배가 출발하고 엘리가 통찰로 확인해본 결과 이 배에는 조타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루리 말로는 ‘에테르 스피리쳐’의 능력은 바람과 공기를 다루는 능력. 아마도 녀석의 능력으로 배에 기동력을 주고 조타수는 방향만 조종해 앞서가는 배를 따르는 듯하다.
―눈꺼풀이 무겁다. 선잠을 잤어도 이미 한창 새벽일 시각…….
“네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도착을 안 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텐데…….”
무릎을 감싸 안아 고개를 기대고 있던 루리가 품에서 작은 회중시계를 열어보고는 맹한 표정으로 말했다.
“엑, 네 시간이야? 내가 생각한 것의 두 배잖아?”
하지만 그 활기차고 청아한 목소리의 루리가 이 정도로 힘이 빠져있다면 틀림없는 사실일 테지.
“바―보.”
엘리 녀석, 아까부터 팔짱끼고 벽에 기대서 한 마디도 안하더니 건수 잡히니까 대놓고 놀리고 있어. 기분 나빠!
“쳇……!”
꼬르륵――.
젠장, 안 그래도 졸린데 이젠 허기지기까지 하네. 이제 춥기만 하면 거지 3요소 완성이로구만.
“냠.”
엘리가 주머니도 없는 원피스 어딘가에서 뭔가를 꺼내 먹고 있다.
“허―얼.”
와아……. 저렇게 얄미울 수가! 혼자 몰래 초코바 먹고 있어! 얍실한 드래곤! 저건 언제 쟁여놓은 거야, 대체?
“받거라.”
엘리가 초코바를 던졌다!
“오오옷! 땡큐!”
나를 지나쳤다!
루리의 손에 안착했다!
같이 배곯는 소리를 내고 있던 루리가 엘리로부터 초코바를 받고는 맹한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
“내 건?!”
“없음.”
엘리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냉정하고 차디차고 단호하고 무덤덤하고 무엇보다 치사하게 말했다.
저 녀석은 분명 악마다…….
“유하 님, 여기요. 제 것 좀 나눠 드세요.”
루리가 초코바의 반을 떼어서 내게 나눠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심성이 착하고 곱고 천사 같을 수가 있는 거지? L.M.T(Luri Maji Tenshi)! 아니, 본명이 푸엘루리엘이니까 P.M.T지, 참.
“우걱우걱……. 룰히―! 곰뫄훠! 여훅시 넙밖에 없숴! 넌 천사햐! 오흘부터 로리 아니야!”
꿀맛이다, 꿀맛이야! 공복에는 반찬이 따로 없다.
―루리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씨와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랑의 전도사 같은 행동에 감복한 나는, 나도 모르게 루리에게 안겨버렸다.
먹을 것 앞에서 ‘펫’은 악덕 주인을 갈아탄다고! 하하하!
“아앗, 유하 님. 이러시면…….”
“얼씨구.”
루리의 볼따구에 내 볼을 비비려고 다가가던 찰나.
휘리리릭―! 데엥―그르르르.
엘리 쪽에서부터 개코가 들고 있었던 펄션이 서슬퍼런 날을 세우며 날아왔다.
“히이이익――?!”
펄션은 화물창고 데크벽에 꽂힌 상태로 파르르 떨렸다.
음식을 나눠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애정 본능보다 죽음을 피하려는 본능이 더 강하다는 이론은 이렇게 확정되는 건가?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나의 생존 본능은 루리에게서 떨어지는 것 정도로 그치지 않고 엘리의 코앞으로 가서 꼬리를 말고 절까지 하게 만들었다.
“잘못했느냐?”
“네에…….”
그러자 엘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짓고 나를 내려다보면서 찰랑거리는 꽃자수 발찌가 걸려있는 맨발을 내밀었다.
“그럼 핥거라. ‘멍멍아’.”
“예에―?! 저기요, 해도 해도 이건 좀 너무하는 것――”
쿠우우――
갑자기 물속에 억지로 밀어 넣은 공을 놓쳤을 때와 비슷한 부유감이 배 안에서 느껴졌다.
동시에, 빠른 속도로 상승하는 배에 가중되는 중력 때문에 몸이 뒤로 쏠렸다.
“으갹?! 엘……!”
“꺅――!”
외부의 상황을 모르는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바뀐 관성의 방향은, 아무리 엘리라고 할지라도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에는 충분했다.
문제는 그 방향이―
“읍……!”
엘리의 입과 내 입이 맞닿는 방향이라는 것.
“읍, 으…… 무식한 놈들이로고! ……핫?!”
엘리가 나와 입술이 닿은 걸 깨닫자, 얼굴이 빨개지며 놀라 고개를 뒤로 내뺐다.
“이…… 버릇없는……!”
그리고서 내 입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아야야……! 갑자기 이게 무슨……, 수면 위로 올라가고 있는 건가? 두 분, 괜찮으세요?!”
“우으읍, 으읍 으읍! 으으읍!”
루리가 뒤로 넘어져 박은 자신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물어봤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엘리가 내 입술을 손으로 꼬집고 있었기 때문에.
―루리, 빨리 나 좀 도와줘! 이 녀석 떼어내 줘!
“허얼. 피하셨어야죠, 유하 님. 일부러 엘리 님 밑에 깔리고 싶으셨던 거 아녜요?”
“으으읍? 으으읍, 으읍읍!”
―아니거든? 그럴 리가 있겠냐!
덜컹!
위로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가 멈추게 되면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마치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튕겨져 나가는 것처럼 몸이 튀어 올랐다.
관성에 의해, 누워있던 채로 떠오른 내 몸이 허공에서 180도 앞으로 기울어 엎어졌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까와는 주객이 전도되어 엘리가 있었고, 내 모양새는 엘리를 덮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 * *
“…….”
“미,”
난 이제 죽었다. 덮쳐진 것도 한 대 맞을 분위기였는데 하물며 이건 다 큰 성인이 초딩을 덮친 것 같은 모양새였잖아!
“미안! 엘리……, ――꽤액!”
“유하 님!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아이 같은 엘리 님을 그렇게 덮칠 수가 있어요?! 짐승!”
루리는 자신이 먹다가 떨어트린 초코바 조각을 주워 엘리에게 다시 절을 하고 있는 내 뒤통수에 강속구로 던졌다.
“아우윽……! 너 그 근력으로 던지면 살인미수라고! 그리고 고의도 아닐뿐더러 엘리가 나보다 나이 100배 이상 많은 거 몰라서 그러냐?!”
아니, 이 녀석이 모를 리가 없지. 아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다 지금.
또 다시 시작된 안구미러볼과 헤헤 웃는 입이 그 증거다, 임마!
―응? 근데 뭔가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것 같은데…….
“으악! 깜짝이야!”
뒤통수를 부여잡고 고통을 달래고 있는 내 위로 엘리가 내리깔듯이 쳐다보았다.
“…….”
어쩐지 엘리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쩍이는 듯한 건 기분 탓이겠지……?
큰일났다. 엘리의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아. 정말로 이러다가 발가락이라도 핥아야 할 판이야……. 크흑! 굴욕!
“……없어.”
―에? 없다니, 갑자기 무슨 쌩뚱맞은 말이야?
“배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길래 아무래도 도착한 듯하여 널 패는 것조차 미루고 곧바로 찾아봤는데, ……없다.”
엘리의 눈에 렌즈 같이 씌워진 마법진이 빛나는 것으로 보아 통찰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까 전에 눈이 번쩍였던 것 같은 건 이것 때문이구나.
근데, 그럼 설마…… ‘없다’는 것은…….
“엘리 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없다뇨? 어떤 게……?”
“아마도 녀석들의 본거지인 이 외딴 섬, 해적들 이외에 인간이 없다는 얘기다. 앙고리아 부부, 그리고 인간 노파. 게다가 미로토러스란 녀석까지.”
……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것은 루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겨우 활기가 채워지던 화물창고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다, 다시 한번 살펴주세요, 엘리 님! 그럴 리가 없어요!”
엘리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동공이 작아진 루리가 애원하듯이 엘리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하지만 엘리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냉정하게 루리의 가슴에 확인 사살을 날렸다.
“이미 몇 번이나 다시 살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놀리며 미소 짓던 루리의 얼굴이, 눈에 물이 차오르며 우악스럽게 구겨진다.
“엘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틀림없어.”
엘리의 단호함과 냉정함이, 이제는 오만하게까지 느껴진다.
어째서 그렇게 쉽게 단정 지으려고 하는 거야?
“아아……, 말도 안 돼. 엘리 님, 거짓말이죠?”
“돌아갈 준비하거라. 미로토러스는 둘째 치고, 너희가 찾는 이들이 없다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
지난 2개월간의 우리의 노력이, 아니, 9년간 부모님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던 루리의 노력이 결실을 맞아야만 하는 날이었다.
화물창고안에서의 시간은 지루했음에도 마땅히 긴장해야할 상황에서 농담까지 던지며 마음의 여유를 애써 가지고 있었던 루리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지난 오랜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것조차 이제는 처참하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 처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말한다고?
웃기지마.
“찾아보자, 루리.”
“유하 님……?”
나는 엘리의 옷깃을 붙잡은 채 주저앉은 루리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벌써부터 포기하긴 일러. 엘리의 통찰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 그렇겠죠……? 그런 거겠죠……?”
나를 보는 루리의 파란색 눈에 어려있는 작은 희망이 반짝 빛난다.
“소용없어. 그냥 포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유하, 너……!”
“시끄러워!!!”
엘리는 크게 내지른 내 소리에 눈을 휘등그레 뜨고 입을 작게 벌려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라고? 드래곤이 그렇게 대단해? 한 사람의 마음을 처참하게 밟아도 될 정도로? 드래곤이면,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다 알아? 드래곤이면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나는 그저 네가…….”
“듣기 싫어.”
“…….”
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내 시선을 피해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을 뿐.
“유하 님……. 그러지 마세요……. 저 때문에 두 분이 싸우는 건 원치 않아요…….”
루리의 얼굴에서 미안함과 간절함, 희망과 좌절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넌, 웃는 모습이 가장 나아.
“루리. 네가 가장 원하는 건 최선을 다해서 힘닿는 데까지 부모님을 찾는 거야. 맞지?”
“유하 님…….”
루리의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 깜빡이는 루리의 눈꺼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긍정을 얘기하듯이 느껴진다.
나는 다시 엘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내 눈을 마주치지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래, 끝까지 그런다 이거지? 됐어. 그럼 여기서 겁쟁이처럼 숨어있어. 나 혼자라도 찾아볼 거니까.”
“유하 님, 너무 무모해요……! 저도 같이―”
“루리, 너도 이곳에 있어. 혹시라도 다치면 안 되니까. 배에 인원을 남기진 않았으니 아마 녀석들도 곧바로 출항을 하진 않겠지. 나는 걱정 마.”
나는 루리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천장에 달린 문을 열기 위해 계단을 밟고 올라가려는 순간 내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무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한 엘리의 여린 목소리였다.
“형상기억마법은 이제 더 이상 발동하지 않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부활이 안 된다고……? 그럼 지금까지는 대체…….
“사실, 이 모습이 되면서 기능유지를 위한 마력을 잃었어……. 지금은 그저 기본 마력만이 남아있을 뿐, 만약 지금 죽는다면 정말로 죽을 거야……. 지금까지는 나의 재생마법으로, 치유마법으로 너를…….”
지금 죽으면, 정말로 죽는다고……?
“유하 님! 그럼 가지 마세요! 저 따위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루리…….
미안하지만, 너의 그 말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 네 눈빛은 나도 아는 눈빛이야.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지 않아.
살면서 느껴본 것 중에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그 참혹한 현실을 인정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가겠어.”
“가지 마, ……발데르!”
“발데르? 예전에도 한 번 그런 소리를 하더니……. 이제는 날 놀리기까지 하는 거냐. ――실망이야, 엘리.”
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 천장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