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자크 만’은 소서리아의 북쪽 ‘셰인웨일 숲’ 끝의 라인을 따라 형성된 절벽 해안이다.
―맑은 밤하늘 위에 뜬 달은 하나…….
어젯밤까지만 해도 분명 지평선을 따라 낮게 달이 뜨고 그 위로 다른 하나의 초승달이 높게 떴었는데, 오늘은 분명 하나다.
신기하다. 달이 하나가 되니 지구랑 영락없이 똑같다.
―우리는 셰인웨일 숲 절벽 끝에 도착해서 배에서 신호탄이 쏘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 추워! 확실히 겨울이 다 되긴 했구나. 밤늦게, 그것도 바닷바람을 맞으니까 손이 다 얼 것 같아.”
“그러게요. 자칫하면 감기 걸리겠어요. 잠복 때문에 옷을 두껍게 입기도 뭐하고…….”
나와 루리는 가죽으로 된 옷에, 늦가을에 맞춰 외투로 재킷까지 챙겨 입었지만 겨울에 성큼 다가온 날의 자정이 넘은 시각에는 그다지 큰 보온이 되지는 못했다.
“엘리, 너는 그 시폰 원피스 하나만 입고도 안 추워?!”
일교차가 컸었던 2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춥다 혹은 덥다 얘기를 하지 않아서 위화감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엘리는 처음 만났을 때의 시폰 소재의 원피스를 쭈욱 입고 있었다.
“이 몸은 폴리모프 상태여도 비늘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외부 열에 영향도 별로 없을뿐더러 필요하면 마법으로 보호하면 되니, 당연하지.”
아아― 인간형일 때에도 비늘의 보온효과는 적용되는 건가 보구나. 근데 간지럼은 잘 타는 걸 보면 마냥 두껍다는 감각은 아닌가보네.
……가 아니라!
“그런 마법이 있으면 우리에게도 좀 걸어달라구! 지금 얼매나 추운디 아더? 으덜덜덜…….”
“유하 님, 솔직히 그렇게 혀 꼬일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요…….”
시꺼! 난 원래 추위를 잘 타는 편이란 말이다! 그리고 엘리는 이렇게 하면 은근 잘 먹히더라!
“정말……, 귀찮은 녀석이로고. 자,”
“오오?”
엘리는 눈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오오라를 나와 루리의 몸 전체에 덮어씌워주었다.
오오라가 몸을 감싸자, 거짓말같이 외부와의 열이 차단되면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마치 온몸을 보온매트에 뉘인 것처럼!
“배에 도착할 즈음엔 해제될 거다. 많이 만끽하거라.”
“에――?! 그런 게 어딨어!”
“인간은 드래곤과 달리 하찮은 체온조절 체계를 가졌으니 그 상태로 움직여봤자 탈수만 난다.”
“지금 인간 비하 발언하는 거냐?! 드래곤은―”
파충류면서!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통을 받으면서도 죽지도 못하게 나를 갖고 놀 엘리를 생각하니 목구멍에서 검열이 자동으로 걸린다.
“드래곤은 뭐, 뭐. 말해봐.”
“아악! 머리! 머리 쪼개진다! 기브업! 기브업!”
나는 엘리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가망이 없자 그냥 손바닥으로 땅을 쳐 항복했다.
이런 젠장, 이제 이 녀석도 내가 할 말의 패턴을 대강 알게 됐잖아?! 그리고 이번엔 헤드락까지 거는 거냐!
“두 분 또 티격태격하네, 정말! 집중 좀 하셔요! 이러다가 신호탄을 놓치겠어요!”
“……한 번만 봐준다, 유하.”
“예……. 주인님…….”
―흐흑! 누가 내 대신 이 악덕 주인의 애완동물을 해줄 사람 없냐!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 녀석 사진을 올려놓고 “이 로리의 펫을 대신 해줄 사람을 구합니다.”라고 적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줄을 세울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이쪽 세계는 로리콘이 없냐고오으읍!”
“조용히 좀 해.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시끄러운 것이냐.”
―읍읍! 뭐야 이거! 입이 붙어버렸어! ‘아가리봉인’이라니! 숨을 못 쉬잖아! 정말로 죽게 만들 셈이냐!
“코로 쉬면되잖아. 바―보.”
아하. 그러면 되지, 참. 헤헷.
“쉿――!”
루리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앙고리아 특유의 엘프 같은 기다란 귀를 쫑긋 세웠다.
앙고리아는 청력도 좋은 편인가보구나.
“온 것 같아요!”
루리가 속삭이듯이 말했고, 나와 엘리는 그제서야 조용해졌다.
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쥐 죽은 듯이 해수면을 보고 있자, 엘리도 아봉을 해제시켜줬다.
피유우우웅――.
신호탄이 올라온다.
바다는 어둠에 눈이 익었음에도 달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새카맸지만, 그 덕에 이르자크 만 앞바다 멀찍이서 솟아오른 신호탄의 하얀 빛은 대비되어 확실히 잘 볼 수 있었다.
“자, 가자꾸나. 둘 다 어서 준비해라.”
“네! 여기요, 유하 님.”
엘리의 말에 따라 나는 예정했던 계획대로 루리에게서 활과 화살통을 건네받아 어깨에 매었다.
“루리, 안 무겁겠어? 네 활하고 내 검이랑 몸무게까진데.”
“아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녜요. 테라로사에서도 몇 시간씩 업고 다녔는데요, 뭘.”
“허허, 그런 흑역사를!”
나는 루리의 등에 업혔고, 나를 가볍게 등에 진 루리는 다시 엘리의 등에 업혔다.
3단 업기라니, 무슨 인간 윷놀이 하는 것 같네.
엘리랑 루리만 있으면 윷놀이 할 때 ‘업기’ 하나만큼은 유리한 고지에서 시작할 수 있겠군.
“꽉 잡거라. 놓치면 버리고 갈 터이니.”
“예이―. 그럼 엘리 말! 출바―을!”
“고귀한 드래곤에게 말이라니? 나중에 두고 보자, 유하.”
아이고, 무슨 말을 못해요. 진짜 기회를 봐서 엘리 약점이라도 하나 잡아야지, 안 그러면 맨날 잡혀 살겠어, 아주―으으앗?!
“야아아! 오줌 쌀 거 같아아아!”
“싸면 죽인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번지 점프라니!
정신없이 떠드느라 긴장감이 너무 풀려서 이렇게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질 각오를 못했어!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라아!
에에엘리의 튼튼한 각력을 통한!
도움닫기를 이용해에에 떨어지느으은 거라아!
체감 속! 도는!
더 빨라아아아! ――아아아…….
―드디어 다 내려왔네!
“헉! 헉! 루리, 넌 괜찮은 거야?!”
“전 이 정도는 괜찮은데……. 그보다 유하 님, 진짜 오줌 싼 거 아니죠? 왠지 축축한 거 같아요…….”
루리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아냐! 이거 무서워서 생긴 식은땀이야! 나 오줌싸개 아니라고!”
“자, 아직 멀었다. 힘 풀지 말거라.”
어?! 그러고 보니 절벽 아래는 바로 파도치는 바다인데 어떻게 서 있는 거지? 물결치는 파도의 출렁거림이 느껴지는 게, 레비테이션의 느낌은 아닌 거 같은데?
―엘리는 그 여리고 하얀 피부의 맨발로 바다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우왓! 이건 뭐야, 엘리?”
“‘써피스텐션’이라는 간단한 거다. 간다.”
엘리의 발쪽을 좀 더 자세히 보니 오오라와 해수면의 표면장력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마치 소금쟁이의 발처럼 엘리의 발 역시 바다 표면의 안쪽으로 살짝만 들어가 있을 뿐, 둥둥 떠 있었다.
―굳이 레비테이션을 쓰지 않은 것도 이런 식으로 마력을 아끼기 위해서……?
“고급진 마법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게 더 멋있어!”
바다 위를 참방참방 날듯이 답보하는 엘리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유유한 나비처럼 아름다웠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무협으로 치면 초상비(草上飛). 아니, 이건 바다 위니까 해상비(海上飛)인가!
“엘리 님, 신호탄 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요!”
“걱정 말거라, 이제 다 왔으니.”
그녀의 말이 끝나고 불과 수 초 뒤 우리의 시야에, 과장해서 운동장 크기정도 될 만한 대형 범선이 보였다.
“우아아아!”
완성된 배의 모습은 2개월 전보다 더 웅장한 모습이었고, 뱃머리에 달려있는 악마형상의 선수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겁에 질리게 할 정도였다.
엘리는 우리를 업은 채로 가볍게 발을 튕겨 20미터 가까이 될 것 같은 높이의 갑판 위로 사뿐히 뛰어올랐다.
“오오! 어둑어둑해서 ‘은돌고래’가 튀어 오르며 이쪽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엘리 님이셨군요!”
우리를 찾고 있었는지, 갑판 난간 근처에 서 있던 힉스 씨가 감탄하고는 엘리를 환영했다.
“2개월 만이네요, 힉스 씨!”
“힉스 님! 안녕하세요!”
“유하 님, 루리 님, 오랜만입니다! 일단 배는 이곳에 정박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레드럭 해적단이 수거해가기로 했으니, 잠복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힉스 씨가 각자 업혀있던 등에서 내려온 루리와 나의 손을 번갈아 맞잡으며 말했다.
“그리시스 영감님은요?”
“아버지께선 조타실에 계십니다. 일단 날이 쌀쌀하니 같이 들어가시죠.”
힉스 씨는 선미 방향에 솟아있는 조타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은 들어가서 그리시스와 회포를 나누어라. 나는 녀석들이 오는지 보고 있을 테니.”
확실히 엘리가 통찰을 써서 경계를 봐준다면 안심이다. 멀리 있더라도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으니.
엘리는 해수면에서 갑판 위로 올랐을 때처럼 다시 돛대 위로 뛰어올라서 앉았다.
“으음……. 나중에 속바지라도 사줘야하나. 나야 별로 감흥은 없지만 민망하지도 않나, 저 녀석은.”
“자, 자. 들어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고 몸을 녹이고 있죠.”
우리는 힉스 씨의 안내를 따라 갑판실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타고 조타실로 올라갔다.
“유하 군! 오랜만이네!”
그리시스 영감은 선장모까지 쓰고 깔끔한 용모로 분위기를 낸 듯했다.
오랜만에 본 그리시스 영감은 전보다 표정도 인상도 훨씬 밝아져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리시스 영감님. 얼굴이 좋아지셨는데요?”
“그동안 건조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지. 어떤 게 아내를 위한 일인가 하고 말이야. 난 말야, 어떤 결과라 하더라도 자네들을 믿어보기로 다짐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이것이니 말이야.”
“잘 생각하셨어요, 영감님. 솔직히 무섭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인데, 그래도 잘 될 것 같은 감이 있어요.”
엘리는 걱정할 필요 없고, 나도 어찌 됐든 죽지는 않을 테니 루리만 잘 지켜주면서 작전을 진행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음 앞에만 서면 온몸이 쭈뼛쭈뼛 서고 소름이 돋는 엘리가 남긴 트라우마는 너무 싫지만, 잠깐의 고통을 감내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절대 무리는 하지 말게! 상대는 레드럭이야. 그 대마도사님이 유클리아 대현자님의 인정을 받았다니 안심하고는 있지만 괜히 세계 5대 해적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호로록.
배 위에서 마시는 차는 이런 맛이구나. 어쩐지 운치가 있어서 더 풍미 있게 느껴지는걸.
잔잔한 호수 같은 잔 안의 찻물.
―그러나 곧,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찻잔의 물이 미묘하게 요동쳤다.
“……?”
뭔가 위화감이…….
미묘하게 들려온, 거대하고 아주 낮은 주파수 같은 소리가 점차 가까워짐과 동시에 찻잔의 물이 빠르고 짧게 요동쳤다.
“다들 충격에 조심하거라!”
엘리가 다급하게 조타실 데크로 착지해 외문을 열어 재끼고 소리쳤다.
쿠구구우우――.
“으, 으아아아?! 이게 뭐야 대체?!”
엄청나게 크고 둔탁한 굉음과 함께 배가 기울어지듯 흔들렸다.
미처 충격에 대비하지 못한 조타실 안에 있던 모두가 순식간에 한쪽으로 튕기듯 쏠려서 뇌진탕이나 타박상을 입을 것 같았다.
부웅―.
“어……? 살았다.”
“다들 다친 곳은 없느냐.”
엘리가 재빨리 배리어를 쳐줘서 모두 에메랄드 빛의 투명한 구체 안에서 한숨을 돌렸다.
“엘리, 어떻게 된 거야?!”
“녀석들이 심해에서부터 수면으로 올라온 모양이다. 일단, 잠입에 대비부터 하거라.”
조타실의 창으로 바깥을 보니, 우리가 타고 있는 배보다는 작지만 커다란 범선이 갓 수면 위로 올라온 고래처럼 물줄기를 흘려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잠수함도 아닌 게 수중으로……?”
“저게 소문으로만 들었던 ‘에테르 스피리쳐’의 능력……! 여러분들, 어서 계단을 따라 지하 화물창고로!”
힉스 씨는 기울어진 배가 복원해 안정을 찾자 다급히 조타실 바닥의 문을 열었다.
“힉스 씨, 에테르 스피리쳐가 대체 뭐예요?!”
“그거 얘기할 시간 없어요, 유하 님! 곧 녀석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제가 얘기해드릴 테니 일단 잠입 준비부터……!”
루리가 소리치며 내 팔을 잡고 계단 쪽으로 이끌고 내려갔고, 엘리가 우리의 뒤를 따랐다.
“행운을 빌겠네, 자네들! 우리 걱정은 말고 꼭 살아 돌아 와 주게.”
그리시스 영감의 말을 끝으로 조타실 바닥 문이 닫혔고, 우리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화물창고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