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는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그윽한 향이 가득한 국화꽃밭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었고,
그리시스 영감과 그의 아들은 앞으로 마주할 미래를 선택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 서로가 마음에 담은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며 정리를 하는 시간.
세상에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가족.
누구에겐 태어난 순간부터 누구보다 오랜 시간 추억을 공유한 부모님.
그리고 누구에겐 한 평생과 황금기를 함께한 동반자.
이러한 가족이 살아있지 않을 수 있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야……. 마음의 준비를 할 선택…….”
마음먹기에 따라 사람의 미래는 달라진다.
과거를 바라보는 눈 역시 달라진다.
현재의 자신이 달라진다.
그것을 결정해야 하는 시간.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느냐, 아니면――”
“과거를 좀먹고 시대를 방황하게 되느냐…….”
“엘리.”
엘리 역시 루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해 혼자 있게 해 둔 건가.
“죽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미래를 보고 나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
“응……, 맞아.”
죽을 만큼 사랑하고, 죽을 만큼 보고 싶고, 죽을 만큼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 혹은 두 번 세 번도 겪을 수 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겪을까.
그리고 만약 다시 또 경험하게 된다면, 그 때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바라보는 것도 마냥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로구나.”
“엘리…….”
드래곤…… 인가.
인간의 수십 배를 살아온 존재. 그리고 앞으로도 수천 년 더 살아갈 존재 앞에선 100년도 채 안 되는 수명을 가진 인간의 죽음쯤은 그저 스쳐가는 바람일지도.
―그렇지만 엘리의 눈망울에 담겨있는 자색의 쓸쓸함은, 그리고 그 쓸쓸함에서 느껴지는 비애는 뭘까.
꽃향기가, 진하다.
“좋은 향기지요?”
나브 가의 장남이 우리 옆으로 와서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옆에는 마음의 정리를 한 듯한 그리시스 영감도 서 있었다.
“어머니가…… 가꾸어놓으신 국화 밭입니다. 어머니가 국화꽃을 좋아하셨거든요. 원래 산지에 사는 식물인데, 이렇게 해안가 부근에 심어놓고 기르셨죠. 바다에 평화가 오기를 바라면서요. 그리고 그 평화가 배에 깃들기를 기원하셨었죠.”
그가 눈을 감고 국화 향기를 머금은 해안가의 공기를 한 번 마시고 나서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국화꽃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국화의 상징 중에 ‘평화’가 있었던가…….
확실히, 이 꽃향기를 맡으니 마음이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작업장으로, 들어와 주겠나. 갑자기 떠오른 게 있다네.”
그리시스 영감의 말투가 한층 차분하고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단단함이 묻어나왔다.
호통이나 고함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유하 님, 엘리 님. 죄송해요, 갑자기…….”
마음을 다 추스린 듯한 루리가 엘리와 내가 서 있는 작업장 근처로 걸어왔다.
“루리, 진정 됐느냐.”
“네……!”
눈물범벅이 됐던 루리는 코까지 벌게져있었다.
아직까지 울음기가 다 가시진 않았지만 루리는 특유의 해맑은 미소로 다시 무장했다.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
“악! 푸힛……! 유하님! 뭐예요, 그게! 웃겨 정말! 히힛!”
루리는 내 팔뚝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깔깔깔 웃었다.
다시 원래의 루리로 돌아왔구나.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 근력으로 쳐대니까 너무 아프거든……? 멍들 것 같으니까 그만 때려줄래……?
“쨌든, 들어가 볼까.”
작업장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우리는 다시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까 전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는데, 배가 엄청 크다! 어림잡아 선원 50명 좀 안 되는 인원이 먹고 자고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길이나 폭이 한강 유람선의 두 배? 세 배? 정도 되려나. 그런데다가 높이가 훨씬 높기 때문에 상당히 크고 웅장하게 느껴졌다.
“기존에 작업하던 배를 조금 더 크게 개량해서 작업중이었다네. 앞으로 2개월 안에 완성을 하려면 조금 빠듯할 것 같지만…….”
결국 그리시스 영감의 선택은 미로토러스에게 배를 바치기로 한 건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걸 보여주는 이유는…….
“아버지, 저도 돕겠습니다. 애들한테도 할아버지 일 좀 도우라고 말해야죠.”
작업장 문이 한 번 더 열린다.
“오, 영감님, 어떻게 된 겁니까? ‘힉스’도 표정이 좋아 보이는 군. 결국 포기하기로 한 겁니까?”
“세르만 씨.”
해변가에서 줄담배를 피고 있던 세르만 아저씨가 때마침 들어와서 그를 부르는 바람에 기억이 났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소리를 해대고 있지만.
“에라이, 썩을 놈! 녀석아, 내가 포기하는 거 봤냐? 조선공 중의 조선공, 이 그리시스가!”
“뭐야, 포기 안한 겁니까?”
세르만 아저씨는 특유의 능숙한 코 파기를 시전했다.
“이 대마도사님께 공운(工運)을 걸어보련다.”
“……잘 생각하셨구먼. 그게 맞는 거요. 사람은 뭐가 됐든 앞으로 나아가야지. 랄프 녀석처럼. 나처럼 도망치지 말고…….”
세르만 아저씨는 씨익 웃어보였다. 이제 보니 아저씨의 어금니 두세 개는 금니였다.
―이렇게 보니 이 아저씨도 해적같이 생겼네.
“유하, 기왕 랄프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는 김에, 동료들의 유골을 발견하면 ‘세르만이 같이 못 가서 미안했다.’고, ‘돌아오면 꼭 찾아보러 가겠다.’고 전해줘. 내껀 이 영감처럼 어렵지 않지?”
“속 편한 놈, 우산에 맞아 뒈질 놈, 싹수없는 놈.”
“내가 그걸 얼마나 가슴에 담아두고 살았는지 모르는 거요, 영감?! 나 그렇게 매정하게 살지 않았어!”
그리시스 영감은 원래 입이 험하긴 하구나, 하하…….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이제 와서 속 편하게 동료들에게 사과한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돌아오면 그들의 유골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겠어.”
저렇게 까지 얘기하는 것을 보니 양심까지 해적처럼 못생긴 건 아닌 것 같다.
“뭐, 세르만 아저씨의 부탁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긴 하죠. 일단 배만 있다면야, 어떻게든…….”
“참, 그나저나 모험가님들은 레드럭 해적단에 쳐들어갈 방법은 생각하셨나요?”
그러고 보니, 그리시스 영감한테 배를 구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고 그 이후가 막연하긴 했지. 아무리 그 녀석들의 출정 정보를 얻어 바다에 나간다고 해도 망망대해에서 마주치기란…….
“일단 영감님께 배를 구하고 바다에서 그 녀석들을 마주치려는 계획밖에 없긴 했는데요……. 본거지를 모르니.”
“그러면, 저와 아버지가 생각한 방법이 있는데 그건 어떠세요?”
아, 설마 아까 전에 그리시스 영감이 떠오른 게 있다고 한 것……?
“아버지는 그 때 한 약속대로 미로토러스에게 배를 지어서 바칠 생각입니다. 약 2개월 뒤, 소서리아 해역으로 가면 레드럭 해적단이 배를 수거해가겠죠.”
힉스 씨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한다.
―그러자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하, 그렇다면?!”
“네, 모험가님들은 그 배 안에 잠복해 있다가 그들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과연, 이렇게 되면 확실하게 그들의 소굴로 갈 수 있다! 배를 수거하는 데에 해적들 전부 나오지는 않을 테니, 안전하게 잠입할 가능성도 높고.
“그거 좋은 방법인데요? 확실하게 잠입할 수 있겠어요! 잠입하고 나서는, 마법을 통해 인질들의 위치를 파악해서 엘리가 시간을 끌면 그 사이에 저와 루리가 사람들을 찾아 구출하는 하면 될 것 같아요.”
“오호라, 유하. 너 나중에 전략가 해볼 생각 있냐?”
“크크, 그럴까요?”
전(前) 전략가인 세르만 아저씨가 감탄할 정도면 나도 꽤 쓸만하잖아? 봐라, 엘리! 놀고먹는 건 아니라 그랬지?
―나는 ‘이겼다’는 표정으로 엘리를 쳐다보았다.
흐흐흐.
“……이상한 얼굴 짓지 말거라. 그건 그렇다 치고 조선공, 그대는 어쩔 셈이냐. 배를 바치는 건 둘째 치고 어떻게 녀석들에게서 탈출할 생각이지?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일 텐데.”
그러고 보니, 그리시스 영감이 탈출할 방법은 생각을 못했다. 분명 녀석들은 목적을 이루면 그를 죽이고도 남을 텐데…….
“그건 걱정 마세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자, 그럼 2개월 뒤. 그러니까, 정확히 11월 29일 한 개의 초승달이 뜨는 날 밤, 소서리아 북쪽 ‘이르자크 만’ 북방 1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정박을 하고 있을 테니 그때 봅시다! 대마도사님, 1km정도는 바다를 건너오실 수 있으시죠?”
“물론이다. 그 정도야 이 몸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니 걱정 말거라.”
“자, 그럼 그날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힘내보죠!”
누구보다 그리시스 영감에게 포기하라고 했던 힉스 씨가, 이제는 가장 먼저 앞장서고 있다.
그 역시 속으로는 상심이 컸던 게 분명하다.
“역시 가족을 포기하기란 절대 쉬운 게 아닌 거 같아요……. 유하 님.”
루리가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었다.
“그래.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족을 구하고, 살리고 싶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라.”
* * *
우리는 나브 가의 부자와 2개월 뒤를 다짐한 뒤 다시 도심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힉스 씨의 아내는 엘리가 멘탈이터를 처치한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테라로사 시청에도 들어갔다.
도심으로 돌아가자마자 엘리는 테라로사 시청에서 초대를 받았고, 그곳의 높은 분께서 직접 엘리에게 공훈장을 수여해주었다.
엘리는 인간들에게 상을 받는다는 게 자존심 상했는지 그다지 기뻐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공훈장과 함께 받은 100‘마기나이트’의 가치를 뒤늦게 알고는 눈에 ‘디아’ 화폐를 박아 넣은 듯이 들떴다.
‘세르만! 왜 그 사실을 이제야 알려준 것이냐! 진즉에 알려줬더라면 그 시장에게 젊음이라도 주었을 텐데 말이다!’
“‘젊음’을 줄 수도 있긴 한 거야……?”라고 나중에 물어보니 농이란다. 그럼 그렇지.
아무튼 돈 같은 건 필요 없었을 지구와는 달리 지금은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라 돈의 노예가 된 걸까?
아니면 ‘여자’라서 ‘반짝반짝 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매료되는 게 있는 건가?
세상에, 난 그렇게 엘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뭐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렇게 좋아하는 것에 공감은 된다. 세르만 아저씨의 말로는 ‘1마기나이트’의 가치가 10골드에 해당된다니, 100마기나이트는 그럼 5천만원 정도가 된다.
……미친! 부자가 되었다!
* * *
“저는 제가 쓸 활과 화살이랑, 랄프 님한테 선물로 드릴 원두도 샀어요!”
“나도 호신용 단검과 검술 정도는 조금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가볍고 단단한 검을 하나 샀지.”
나와 루리는 테라로사를 떠나기 전, 1마기나이트로 쇼핑을 마쳤다.
소서리아를 비롯해 아르키메시아의 다른 도시들은 주로 마법사 무기나 마법사 물건들이 많은데, 테라로사는 본래 최대 항구라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이 많았다.
더욱이 그 품질 역시 최상품이 많기에, 나중에 좋은 것 찾아 헤매는 것보다 이왕 테라로사에 온 김에 사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엘리, 너는 아무것도 안 사도 돼?”
“나는 이 ‘마기나이트’라는 것이 하나 있으면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엘리는 마기나이트 하나를 팔찌로 만든 것을 보여주었다.
희귀 광물을 세공한 마기나이트의 아름다움은 남자인 내가 봐도 다이아몬드보다 대단했으니―
―역시 여자라 ‘반짝반짝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거였어…….
착.
엘리가 그 팔찌를 내 손목에 감았다.
“에……? 이게 무슨―”
“잔말 말고 받기나 하거라.”
엘리는 마기나이트 팔찌를 내 손목에 채우고는 열차 안으로 먼저 들어가버렸다.
“나 참, 난감하네.”
“혹시 프로포즈 아닐까요?”
루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나와 팔찌를 번갈아 쳐다본다.
“야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로리 드래곤의 펫 인식표겠지.”
이래나 저래나 맘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소서리아행. 소서리아행. 지벨리트 호, 곧 출발합니다.]
“잘 가고, 랄프에게 안부 좀 전해줘. 그리고 조만간 한번 찾아가겠다고도.”
배웅을 나온 아저씨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고맙기는. 너희 덕분에 나도 일을 관두지 않아도 되니까, 퉁친 거로 하자.”
“그럼, 언젠가 또 봐요. 테라로사에 오면 찾아뵐게요.”
“그래.”
우리는 세르만 아저씨와의 작별인사를 마치고 소서리아행 열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