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시간이 지난 뒤, 흐릿하게나마 명도가 남아있던 하늘이 완벽한 어둠에 잠식될 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혹시나 안전성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 않을까 했던 엘리 역시 끝끝내 오지 않았다.
세 번 정도 더 기차가 이곳에 도착했지만, 모험가라고 해봐야 두세 명 뿐이었고, 그마저도 우산을 같이 쓰지 않겠냐는 말에 어이없다는 코웃음을 치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역사 내 잡화점은 파리만 날렸고, 상인은 해가 지자 문을 닫고 가버렸다.
―그러고 보니 잡화점 상인이 가기 전에 했던 말이 기억나는데…….
‘너희도 빨리 시내에 갈 곳을 구해서 떠나라. 안 그러면 삭아버린다.’
젠장, 우산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비’와 항구의 도시라면, 기차역에 우산 정도는 수십 개 구비해놔야 정상인 거 아냐? 아무리 모험가들이 별로 없다곤 하지만.
그리고 삭는다는 말은 또 뭐야. 뼈 삭는다고?
“―그럼 미녀라도 소개시켜 주든가!”
“유하 님, 유하 님…….”
눈에 초점을 잃고 멍하니 딴 생각을 하듯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킨 루리가 그 상태로 내게 말을 걸었다.
“왜 불러요, 왜 불러요, 루리 님.”
“그냥 비 맞더라도 기차역 근처 여관이라도 들어가는 게 어때요.”
“껌딱지랑 단 둘이는 싫어요.”
로맨스 장르의 여주인공이 했으면 제법 섹시할 법한 루리의 대사 따위는 처참하게 거절한다.
이상형만큼은 확고한 남자니까.
―빠직.
루리의 이마 위에 화가 잔뜩 난 십자가가 생겼고, 멍했던 초점에 생기가 돌며 식칼 같은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아― 그럼 어쩌자는 거예욧! 여기서 밤이라도 새려구요?! 어차피 방 따로 잡으면 되잖아요!”
“이게 다 네가 우산을 뽀개 먹은 탓이잖아! 그리고 돈 아껴야 한다고!”
“그러게 누가 한눈 팔래요?! 엘리 님한테 다 이를 거야!”
뭐?
엘리한테 이른다고? 이 찌끄만 녀석이 오냐오냐 보자보자 하니까―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자구, 베이비.”
엘리한테 나중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거지가 되더라도 예산을 더 쓰는 게 낫겠어. 슬슬 배도 고파지고……. 마냥 엘리만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사실 그녀를 기다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루리한테 구박을 받으면서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 건…….
엘리랑 셋이서 같이 출발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이 몸이 늦었구나.”
“그래, 늦었어. 왜 이렇게 늦은―”
어? 잘못 들었나?
고양이 방울 같은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권위적인 말투.
설마……? 아냐, 잘못 들은 거겠지.
“이 목소리는 설마, 엘리 님?!”
―엥? 무슨 소리야, 루리. 너도 이젠 헛것이 들리는 거야? 아까 이후로 엘리를 소환한 적 없다구.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은 역사 출구 계단 쪽.
물에 빠진 생쥐처럼, 비에 홀딱 젖은 엘리가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 뭐야. 진짜 엘리야?! 어떻게 된 거야? 비에는 왜 젖었고?”
“미안하구나. 사정이 있었다.”
일전에 예상했던 대로 그녀가 비에 젖자, 속옷까지 비치는 흰색의 시폰소재 원피스가 착 달라붙어 그 몸의 윤곽을 들어낸다.
엘리는 역사 내 벤치에 앉아있던 내 옆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몸이 축 져진 것이, 힘이 쭉 빠져보였다. 마력을 다 소모했을 때처럼.
“엘리,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뜬금없는 시간, 뜬금없는 장소에서부터 등장한 엘리였지만, 그녀의 지친 모습에 더 이상은 이유를 묻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흠. 피곤하구나. 10분만 쉬자꾸나.”
엘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젖은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며 말하고 잠들었다.
* * *
――10분이 지나고 엘리를 깨웠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익숙한 기시감.
불안해진 나는 엘리를 업고 루리와 함께 빗속을 뚫고 기차역 근처의 낡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방 두개 주세요.”
날씨 탓에 더욱 스산하고 음산하게 느껴지는 여관.
―쫘르륵.
소름 끼칠 만큼 무표정한 여관 주인은 내가 건넨 돈을 받고 녹슨 방문 열쇠 두개를 건네주었다.
“기분 나빠…….”
“어쩐지 무섭게 느껴지는데요…….”
낡은 외형과는 달리, 세련된 장식품과 깨끗하고 고급진 침대와 비품들이 들어서 있는 것으로 보아 여관 내부는 그런대로 깔끔하게 꾸미려고 노력한 것 같았다.
하지만 복도의 붉은 카펫과 마치 정육점을 연상시키는 시뻘건 조명이 비에 젖은 옷보다도 정신을 더 무겁고 지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세월이 스며들어있는 목재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가뜩이나 기괴망측한 여관의 음산함을 배로 증가시켜 주었다.
“후우――. 그래도 방은 그럭저럭 깔끔해서 다행이네.”
“그러게요.”
나는 루리와 엘리가 머무를 방의 의자에 엘리를 내려 앉혀놓았다.
“근데 설마 엘리 님이 이 정도로 무리해서 오실 줄은……. 역시 마력석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텔레포트하는 데에 마력을 많이 쓰신 걸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장거리 텔레포트는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어쩌면 우리가 벌써 움직였을 거라 생각하고 기차역으로 먼저 올 생각을 못해 헤맸을지도.”
테라로사에 와서 일이 꼬이는 바람에 엘리가 빨리 와 주길 바라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엘리가 쓰러질 정도로 무리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바보자식……. 루리를 도와주자고 했을 땐 나보고 죽지마라, 무리하지마라, 이래라저래라 하더니 맨날 걱정 끼치게 하는 건 본인이라니까.
“어쨌든, 엘리 옷이 많이 젖어있으니까 감기 들지 않게 옷 좀 갈아입히고 말려줘. 루리 너도 감기 조심하고.”
“네. 엘리 님은 제가 잘 돌볼 테니 걱정 마시고 유하 님도 씻고 푹 주무세요.”
“그래, 푹 쉬어.”
루리에게 엘리를 맡기고 삐걱 소리 나는 바닥을 밟으며 옆방 문을 열었다.
―그래도 오늘 안에 셋이 함께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야.
“……열은 나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잘 수 있겠다.”
* * *
“――?!”
쿠당탕――.
“――…….”
하아…… 잠 좀 자자……. 다른 방인가.
분명 다른 투숙객이겠지? 여기까지 와서 싸우다니, 적당히 좀 하지.
“……나도 루리랑 한바탕 하긴 했으니 할 말은 없지만.”
덜컹. 끼이이―.
낡은 문의 특징이라고나 할까.
문이 열릴 때의 저 이음쇠가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는 이세계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그 문이 나무로 된 문이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누구지? 루리인가. 엘리가 결국 몸살이라도 난 건가.
“어엇…….”
그곳에 서 있었던 건 루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 ‘작은’ 엘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2주 전 쯤 본 적 있는 ‘여신’.
“모, 모습이…….”
“유하…….”
“엘리 너, 모습이…… 돌아온 거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아름다운 모습.
꿈인가?
눈을 비벼보지만 어쩐지 기분은 더욱 몽롱해진다. 마치 깊고 깊은 꿈속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
그녀가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왠지 모르게 욕정이 넘치는 기색을 이끌고.
“엘리, 괜찮은 거야?”
황당한 상황과 당황스런 그녀의 행동에 일단 아무 말이나 던져본다. 하지만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
모든 죄를 용서해 줄 것만 같은 인자함과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청순함을 가진 눈매. 그럼에도 쳐지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질리지 않게 하는 활기.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몸이 으스러질 만큼 꼬옥 껴안아주고 싶다.
한껏 지쳐서 풀린 자색 눈동자. 무슨 짓을 해도 모를 만큼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안아도 될까 하는 생각조차 감히 들지 못하게 만든다.
―정상범주를 넘어선 관능미.
암전이 된 무대 위에 내려진 스포트라이트처럼 어두운 방 안에서도 찬란하고 황홀하게 빛나는 은빛 광채.
시간이 꽤 흐른 느낌임에도 여전히 무게감 있게 젖어있는 은발과 순백의 원피스.
그녀의 투명한 듯 투명하지 않은 듯한 시폰 소재 사이로, 굽이치는 곡류만큼이나 아름답게 굴곡진 육감적인 골반이, 보드랍고 하얀 허벅다리의 속살과 귀엽고 수수한 속옷이 은은하게 비친다.
―숨이 넘어갈 만큼 아름답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물든 상황이 아닌,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현실.
“유하…….”
“으, 읏――?!”
무감정한 얼굴로 어느새 침대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치덕거리는 옷을 스르르 내렸다.
내 시선은 그녀의 목을 타고서, 넘으면 안 되는 금단의 울타리를 넘어가 언덕 위에 도착했다.
―아니지, 안 돼.
당장이라도 그녀의 황홀함에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녀의 영문 모를 행동을 이대로 계속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혈류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성적본능과는 다른, 또 다른 본능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엘리, 자, 잠깐만……!”
“유하…….”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쉰소리밖에 나오질 않는다.
몸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녀의 깊은 곳까지 침닉한 내 탐욕적인 감각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내게 마법을 걸어 놓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의 티 없이 뽀얀 맨무릎이 침대의 시트를 점차 장악해온다.
―빗물에 젖어 이리저리 흐트러져있음에도 이슬이 그 위를 타고 쪼르르 내려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사르르 떨어져 내 피부를 간지럽힌다.
이윽고, 그녀의 탐스러운 골반이 내 체온을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 위에 내려앉았다.
“하아……, 하아…….”
그녀가 숨을 점점 가쁘게 끌어올리며 상체를 숙여 나를 껴안았다.
비록 닿은 것은 속옷이었지만, 그 속에 감춰진 말캉하고 달콤한 과육 같은 그것의 따뜻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읏……!”
질척하고 끈적하게 젖은 그녀의 연분홍색 혀가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고 올라온다.
부르르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으하읏……! 하, 하지마, 엘리!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읍!”
힘겹게 벌린 입으로 자초지종이라도 들으려는 나를 농락이라도 하는 듯이, 끈적거리는 타액으로 적셔진 그녀의 혀가 내 어두컴컴한 영역을 침범했다.
―졸도할 것만 같아…….
의식이……,
흐려진다…….
――――.
――――.
* * *
잔혹할 정도로 무심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흐릿한 회색의 아침하늘빛이 여관 방 안을 비춘다.
“으, 으음…….”
방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은 억새풀과 명주실을 엮어 만든 듯한 녹빛의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앙고리아―루리였다.
“……헉!”
불현듯 무언가 생각나 번쩍하고 눈을 뜬 그녀의 시야는 금빛을 붉은 선혈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가리고 있었다.
“그 악령은……? 아니, 그보다도 유하 님이……!”
바닥을 뚫을 들이 튕기며 짚고 일어나는 루리.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정리해 시야를 확보하고는 당장 옆방으로 달려가서 문고리를 돌려본다.
“다, 다행이 잠겨있진 않아……!”
루리는 방문을 이음쇠의 ‘끼익’거리는 비명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벌컥 열어 재끼고 빠르게 시선을 굴렸다.
마침내 시선이 멈춘 곳은 동공이 흐려진 채 침대 위에 홀로 누워있는 유하였다.
“유하 님! 유하 님!!”
루리가 유하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볼을 부들기며 절박하게 이름을 불렀다.
“으에……? 흐어어.”
제대로 의사소통조차 되지 않는 유하가 눈을 사시처럼 제각각 굴렸다.
“꺄, 꺄아악――!”
루리가 그런 유하의 해괴망측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새파랗게 얼굴이 질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유하 님이…….”
루리가 정신을 다잡고 다시 유하의 뺨이 벌게질 정도로 두들겨 보지만 소용이 없다.
“엘리 님……. 제발 빨리 와주세요……. 큰일 났다구요――!!”
하지만 루리의 절박한 외침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천둥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지는 정적 속에서 유하의 신음소리와 루리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여관의 방을 울렸을 뿐.
“흐에에―, 으어.”
유하가 반복해서 기괴한 신음을 내뱉는다.
“크흑…….”
방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흐느끼던 루리가 별안간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가만히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결심한 듯이 침을 꿀꺽 삼킨 루리가 유하의 호주머니에서 마력석을 꺼냈다.
그리고서 언제든지 날이 개면 햇빛에 비출 수 있게 손에 꼭 쥔 다음 유하를 등에 업고 여관 방문을 빠져나갔다.
“또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