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가 WQT에 합격하자마자, 미리 신청해두었던 테라로사로 가는 기차표가 나왔다.
마법사와 같은 ‘A급’ 보증인이 아니면 기차표조차 구매하지 못한다니.
신분 보증이 안 되면 소서리아에서 테라로사까지 몇백km 정도를 도보로, 혹은 마차를 빌려서 다녀와야 한단다.
생각만 해도 엉덩이가 피곤하다. 도보는 생각조차 하기 싫고…….
―합격통지서가 나온 어제, 나와 루리는 그날 저녁으로 테라로사로 갈 준비를 마쳤고, 오늘 아침 해가 뜨자마자 여관에서 나왔다.
“그럼, 출발할게!”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엘리 님!”
“그렇게 인사할 시간 있으면 빨리 출발이나 하거라.”
녀석, 입이 툭 튀어나온 것을 보면 우리 먼저 출발한다고 서운해 하는 건가. 어차피 우리가 도착하면 곧 따라 올 거면서.
“받거라.”
팅――.
“흐어잇! 흐또똣! 놓칠 뻔했네.”
엘리가 엄지를 튕겨 보랏빛이 나는 작은 광물을 내게 던졌고, 나는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다.
“이게 ‘마력석’이라는 거구만?!”
“그래. 도착해서 햇빛에 비추면 찬란하게 빛날 거야. 그럼 바로 텔레포트 하도록 하마.”
어젯밤 엘리가 소서리아 주변 광산에서 마력석이 될 만한 것들을 좀 주워오겠다고 하더니, 이거였구나.
이 마력석을 지니고 있으면 소지자의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다는 거겠지.
게다가 햇빛에 비춰 완전히 활성화시키면, 마력소모가 극심한 장거리 텔레포트를 보다 힘을 덜 들이고 이동 할 수 있다나.
‘근데, 텔레포트가 가능한 거라면 마력을 많이 비축해두었다가 지구로 차원이동하면 되지 않아?’
‘텔레포트가 초월이동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개념이다. 아마도 공간을 넘나드는 개념일 터인 다이멘션포트, 차원이동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지. 그래서 텔레포트는 마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리는 이동하지 못한다. 마력석이 있다고 해도 말이지.’
―어젯밤 늦은 시각에 엘리와 둘이서 나눈 대화였다.
그러니까, 마력석이 빛나면 소지자의 좌표와 최적의 이동경로가 파악돼 불필요하게 마력이 소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어제도 말했지만, 그 마력석으로 너의 상태를 감시할 수 있으니 갑자기 발정이 나 루리를 덮치면 곧바로 죽이러 갈 거야. 알겠느냐.”
―애초에 돌발 상황에 대처한다는 건 핑계고, 날 감시하려는 목적이었던 거구만……?
“안 그래도 상처가 많은 녀석인데 색골한테 당하기라도 한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더냐.”
“……도대체 왜 ‘내가 루리를 덮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건데?!”
하지만 엘리는 내 항의를 가소롭다는 듯이 받아친다.
“뻔하지. 어제도 나는 물론이고 루리의 알몸을 낼름낼름 조물딱조물딱하고 싶어서 기습한 게 아니더냐.”
“핫, 유하 님……, 실망.”
이제는 옆에 있던 루리까지 날 벌레 보듯 기겁하며 거리를 벌린다.
“어, 어이! 로리 자식들아! 허위사실로 명예훼손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인 건 알고 하는 거지?!”
하지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여긴 한국도 아닌데.
우리들의 치유소는 힘이 곧 권력이 되는 곳. 따라서 나는 엘리는커녕 루리에게도 권력으로 뒤쳐진다. 젠장!
“여― 너희들, 벌써 나왔구나. 또 티격태격하는가 보군.”
“랄프 아저씨!”
나는 반가운 마음에 랄프 아저씨 옆으로 달려가서 저 악마 같은 녀석들을 째려보았다.
힘으론 안 되더라도 남녀 성비는 맞아야 해볼 만하지!
“유하, 너무 들러붙진 마라. 남자 취향 아니니까. 게다가 난 유부남이야.”
“헐. 친구로서 저 악마들의 방패막이 되어줄 순 있잖아요.”
“친구라고 해도 난 이제 사십대 중반인데……. 그보다 방패막이라니.”
이럴 수가아―
믿었던 랄프 아저씨마저 나를 배신하다니! 크흐흑.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루리, 이 녀석은 내버려두고 가자구.”
“네― 랄프님, 좋은 생각이에요!”
―뭐어어? 지금 나만 빼놓고 가겠다는 심보, 사실이냐!
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둘은 이미 사이좋게 저만치까지 가버렸다.
“안 돼에에―! 같이 가――!”
“유하!”
“응? 왜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날 불러 세우는 엘리를 향해 돌아보았다.
―하지만 막상 돌아서서 엘리의 말을 듣고 나서는 다림질로 주름을 펴듯이 인상이 펴졌다.
“놀려서 미안, 조심히 가고 있거라.”
엘리가 지은 그것은 미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만큼 옅었지만, 그녀의 꽤나 부드러운 말투에서 나는 미소라고 확신했다.
“걱정 마. 별 일 없을 거야.”
* * *
소서리아 기차역사.
이쪽 세계의 기차역은 지구와 뭔가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 외로 별반 차이는 없었다.
유럽풍의 느낌이 물씬 나긴 하지만, 판타지나 다름없는 세계라면 예상범주 안이지, 뭐.
“조심히 갔다 와. 어쩐 일인지 테라로사에서 아직까지도 소식통이 없는 게 좀 마음에 걸리는 군.”
“가자마자 엘리를 부르면 되니까요. 그나저나 고마워요, 랄프 아저씨.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 주셔서.”
[테라로사행. 테라로사행. 5번 게이트. 5번 게이트. 현재 진입 중.]
역사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머지않아 기차가 정류장 안으로 들어왔다.
기차는 증기나 전기, 혹은 디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소음도 훨씬 적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서리아 기차역이 유럽의 고풍스런 느낌인 데에 반해 기차는 생각보다 더 현대식이고 세련되어 보였다.
“다녀올게요, 어차피 몇 시간 뒤에 엘리도 합류하겠지만, 그 전까지 엘리 좀 잘 부탁해요. 사람 패거나 하지 않게요.”
“그래, 걱정 마. 아, 그리고 이거.”
랄프 아저씨는 내게 장우산을 하나 건네주었다.
“이건?”
“아, 노파심에 말이지. 잠시 건기로 넘어가는 테라로사긴 하지만 혹시 몰라서.”
[테라로사행. 테라로사행. 5번 게이트. 5번 게이트.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착한 기차의 문이 안내방송과 함께 덜컹 소리 내며 자동으로 열렸다.
“어서 타! 출발한다.”
랄프 아저씨가 우리를 기차 안으로 밀어 넣듯이 재촉하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테라로사에만 수입된다고 하는 원두, 선물로 사올게요, 랄프 님!”
입구에 매달리듯이 서 있던 나와 루리는 랄프 아저씨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 기차 안으로 들어가 좌석으로 이동했다.
“어디보자……. G5랑 G6니까……. ――여기다!”
“우와왕,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기차!”
“그러고 보니 루리 너, 기차는 처음이구나?”
“네!”
루리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그드라실 진영에는 이런 대중교통 같은 게 전혀 없기도 하고,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다는 것 같다.
하기야, 땅도 없이 나무들이 공중에 떠 있으니 인프라 구축이 힘들겠지.
대체 어떻게 돼먹은 숲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테라로사행. 테라로사행. 출발합니다.]
“아, 이제 출발한다! 어라? 거꾸로 가는데요?”
“……뭐?”
뭐야 이 자리, 역방향이잖아?!
“젠장! 나 역방향 멀미하는 데에!”
* * *
[본 ‘지벨리트 호’는 당역, 테라로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라로사에 도착하기 10분 전부터 출입문 앞에서 대기했던 우리는 기차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왔다.
드디어―
“흐에에엑――! 멀미!”
“으, 으윽. 거꾸로 가니까 어지럽네요, 흑흑. 기차라는 게 이렇게 힘든 거일 줄이야.”
―역방향의 지옥에서 헤어나왔다.
이렇게 흔들림 없는 편안함을 자랑하는 마력기차라도, 역방향 멀미는 역시 존재하는구나.
“루리, 순방향이면 이렇지 않아……. 흐에엑.”
멀미에 시달리느라 모처럼 ‘이세계의 기차여행’이라는 좋은 회자거리가 박살이 나버렸다.
오지 생존 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 봤었던 뉴질랜드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산맥과 강,
마다가스카르의 신비한 동물들과 바오밥나무 같은…….
얼핏 봤을 때 그 정도 이상의 자연경관이 눈에 들어왔지만,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앞좌석에 내 위장에서 만든 파전을 쏟을까봐 걱정돼 눈을 계속 감았다.
결국 아무도 안 앉을 줄 알았으면 그냥 앞에 앉을걸 그랬어…….
“루리, 너도 아르키메시아의 자연풍경, 제대로 못 봤지?”
“네에……. 세계수 지역에서는 나무밖에 없어서 산과 강 같은 것들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저도 계속 눈 감고 왔어요.”
―너도 나랑 같은 처지구나.
그렇지, 빨리 엘리를 불러서 이 멀미 좀 치료해달라고 해야겠다.
“나와라앗! 엘리시아!”
나는 역사 바깥으로 나갈 생각도 없이 뚫려있는 플랫폼 위 하늘에 마력석을 대고 외쳤다.
“나와라! 엘리시아아――!!”
응……? 분명 이렇게 하늘에 비추면 된다고 했었는데. 방법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주문을 잘못 외쳤나?
어디 그럼 다시 한번…….
“껌딱지보다 조그만 자여, 난쟁이보다 작은 자여, 나 안티 로리콘이 칠흑보다 어둡고 칼바람보다 매서운 마음으로 명령한다. 나와라! 은발 로리이이―――!!!”
……이래도? 영혼의 소멸을 각오하고까지 한 주문인데, 이래도 오지 않는다고?!
“뭐야? 저 녀석. 매너가 없구만, 공공장소에서.”
“흐엑, 눈곱 낀 거 봐. 핵짜증.”
지나가던 모험가 몇 명이 나를 보면서 쑥덕거렸다.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줄 알고 맘껏 소리친 건데,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기는 있었구나.
근데 어쩐지 낯설지 않은 이 느낌은 필시 데자뷰인가.
“응? 루리, 뭐해?”
“……뭐, 뭐죠?! 이 손발이 저절로 오그라드는 느낌은……. 유하 님도 혹시 마법사셨어요?!”
“아니거든!”
허나 손발을 모아 쭈그리고 앉은 루리의 행동과 소름끼친 듯한 표정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가 처음 겪는 기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크흠, 그나저나, 왜 안 오는 거야? 엘리는. 누구는 지금 이렇게 공공에티켓을 어겨가며 수명연장을 모처럼만에 실천하고 있는데.”
“유하 님, 근데 그거 빛이 잘 안 나는 것 같지 않아요? 지금은 그냥 평범한 보라색 돌멩이 같은데…….”
루리가 동태같이 어두운 눈으로 마력석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음 설마, 고장이라든가.”
“아, 그런 불안한 얘기로 플래그 세우지 마세욧!”
―우르르 콰광.
하늘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왜 엘리가 오지 않는 건지 알 것 같다. 왜 마력석이 빛나지 않는 지도.
* * *
“정말 끝도 없이 쏟아지네요…….”
역사 내의 투명한 천장 위로 파전 지지는 소리가 떨어진다.
아주 거친 빗소리. 먹어본 적 없는 소주가 다 땡길만큼.
그래, 내 심정은 지금 소주나 마시고 싶을 지경이다.
「비와 항구의 도시, 테라로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역사 출구 쪽에 걸려있는 현판의 문구였다.
―어째서 비가 많이 내리는 게 도시의 자랑이냐!
“하아. 어쩐담. 엘리가 있어야 이동할 때에도 좀 더 편할 텐데.”
“그래도 일단은 비가 그칠 때까지 그리시스라는 분을 찾아보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비가 그치는 타이밍에 재빨리 마력석을 꺼내서 엘리 님을 부르는 거죠!”
루리의 의견은 백번 옳다.
지금 이런 대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우리끼리 그 조선공을 찾고 있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 확실히 마력석이 활성화 되면 안정적이라고 했지만, 지금 우리가 곤란을 겪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테니 엘리도 그걸 감안해 오고 있지 않을―”
―그 순간 내 시선 앞으로, 고딕양식의 검은색 미니스커트 원피스를 입은 미녀가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보며 지나간다.
보통의 사람보다 동공이 조금 작지 않나 싶은 기묘한 호박색의 눈동자가 내 뇌리를 파고든다.
하지만,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그녀의 완벽한 몸매로 시선이 옮겨간다.
“쩌, 쩐다!!!”
빠―악!
“아악! 우산으로 때리면 어떡해! 너도 엘리 손버릇을 닮아가는 거냐!”
혹시 모른다면서 랄프 아저씨가 챙겨준 유일한 우산이었는데.
―박살이 나버렸다.
“아휴, 진짜 못 말려. 나라도 오기 싫겠다.”
“야! 그렇다고 우산을 박살내면 어떡해!”
“거참! 하나 사면 되잖아요!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러더니 루리가 내 팔을 질질 끌고 역사 내에 있는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우산 하나 주세요!”
루리가 코를 파고 있던 민소매티를 입은 콧수염 잡화점 상인에게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두 시간 전에 다른 손님이 사간 걸 끝으로 이젠 없는데.”
“……네에에?!”
아아――! 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