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클리아 데 메데스라고 했나? 그렇다면 메데스라는 것은 가성(假姓)이겠군.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더라니.”
“………….”
“그나저나 카르트 녀석이 그대의 아비라고? 자식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
유클리아가 엘리의 추궁하는 듯한 질문에 경계심을 더욱 높이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엘리는 그제야 나와 루리를 비롯한 주변의 이목이 자신과 그녀에게 집중된 것을 알아차렸다.
“……이 얘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엘리의 추궁이 중단되자 유클리아는 미묘한 한숨을 돌리며 안도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집중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의 작은 한숨이었다.
“――허나,”
“뭐죠……?”
“왜 나를 미행했지? 그 대답은 들어야겠는데.”
미행? 그렇다면 설마 이 여자가 며칠 전 시청에 가는 중에 있었던 바로 그…….
―드래곤인 엘리의 인식저하 마법을 단시간에 간파한 상대.
엘리가 말한 ‘카르트’라는 인물에 대한 정황과, 단 두 명뿐이라는 ‘대현자’라는 유클리아의 마법사로서의 위치.
그리고 무엇보다 뭇 남성의 애정을 독차지할 만한 아름다운 외모로 보았을 때, 그녀는……
―드래곤이다.
하지만 어떻게?
정말로 저 여자가 엘리의 벗의 자식이라면, 그 카르트라는 인물 역시 차원이동했다는 소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 여자가 드래곤이라면, 그리고 저 정도의 성숙함이라면, 최소한 어려지기 전 엘리와 비슷한 나이라는 소린데…….
―대체 어떻게?
“WQT를 준비하기 위해 소서리아에 온 그날, 응시자분…… 아니, 엘리시아 씨의 마력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마력을 가진 마법사라면 제가 모를 리 없었죠.”
“그래서, 내가 위험인물인지 아닌지 확인을 위해 미행을 했다는 건가?”
“……네. 알아본 결과, 그 날 제가 아는 그 정도 마력을 가진 사람은 소서리아에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설마 이렇게 제 배리어를 쉽게 깨트릴 정도의 인물이었다니…….”
유클리아가 아까 전 엘리가 검에 오오라를 씌워 던진 일을 곱씹자 얼굴이 조금 상기된 듯 보였다.
그녀 또한 엘리만큼이나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다.
“어쨌든, 미행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유클리아의 해명에 엘리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 과연.”
직후 엘리는 돌아서서 케니자에게로 간 뒤, 일레비루스를 회수하고 번개에 타 그을려있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에메랄드빛의 오오라가 나와 케니자의 몸을 감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을린 흔적도 상처도 없이 깨끗하게 나았다.
“푸후웃――!”
그가 낫는 과정을 보며 웃음을 참아보려 안간힘을 쓰던 루리가 결국 터뜨리고 말았다.
―번개에 불타 그의 옷은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고, 엘리의 리커버리는 상처만을 회복시킬 뿐, 옷까지 재생시켜주진 않기 때문이다.
“크, 크하하하!”
랄프 아저씨도 예외 없이 자지러졌다.
그리고 자지러진 건 그 둘 뿐만은 아니었다. 광장에 있는 응시자들과 심사위원, 관계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기에, 루리를 시작으로 시험장 안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하하하! 저 자식 봐, 저거!”
“케니자 맞지? 평소에도 다른 마법사들을 우습게보더니, 꼴좋다――!”
“계속 그렇게 발가벗고 있어라! 하하하!”
케니자의 평판은 아무래도 마법사 세계에서 영 좋지 않았는지,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크흑, 이 멍청한 새끼들이!”
쓰러져있던 케니자는 중요 부위만을 간신히 손으로 가렸다.
“꺼져라, 이 몸의 눈앞에서.”
엘리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치욕감과 수치감이 새겨져있었다.
“크윽……! 언젠가 모두 죽여버리겠어! 이 치욕은 반드시 갚는다!”
케니자가 삼류 만화의 악역 같은 말을 남기고 잔달음질 치며 시험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헤헹―! 감히 엘리에게 덤비다니! 내가 그랬지?! 자살하는 방법은 많다지만 그건 아니라고. 키킥!”
나라고 웃지 않았을 리가 없다. 불과 얼마 전에 하의탈의 패션을 겪어봤으니까.
“그런 말 했었어요?”
“시꺼, 방금 지어낸 말이야. 로리2.”
“헤헷.”
나와 루리가 시답잖은 대화를 하는 사이 엘리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유클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이제 결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원래라면 먼저 시작한 그 쓰레기를 죽여야 마땅하지만, 아량을 베풀어 말끔히 살려놨으니, 실격할 만한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옳소!”
나와 루리는 군무를 맞추듯 주먹을 내지르며 엘리의 주장에 힘을 보탰고, 랄프 아저씨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이에 동조하며 번져나갔다.
“흐음…….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먼저 시작한 것은 케니자 씨였으니 정당방위라고 치죠.”
유클리아가 짧은 신음을 내며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이마를 긁적였다.
“그래도 룰은 룰. 실격은 면하는 대신, 평가에는 감점으로 기록하도록 하죠. 이 정도면 다른 응시자 분들도 동의하시겠죠?”
대마도사 시험을 응시한 남은 세 명의 참가자는 딱히 항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이 상황에 대한 암묵적인 찬성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럼, 저는 다른 구역의 심사 마무리를 도우러…….”
응시자들의 동의를 받아낸 유클리아는 황급히 원래의 구역으로 돌아갔다.
“흥, 그래봐야 이 몸보다 나은 녀석은 찾아볼 수 없겠지만.”
“엘리 님! 엄청 멋있었어요! 제가 여태껏 봤던 마법사들 중에서 엘리 님이 최고예요! 특히, 그 이상하게 생긴 검을 소환할 때의 모습은…… 헤헤!”
엘리에게 달려가 귀엽게 해롱거리는 루리. 반면 엘리는 그런 루리의 어깨를 짚듯이 한 번 토닥이고는 내 쪽으로 걸어온다.
“야이, 엘프 녀석이, 누가 ‘이상하게’ 생겼냐! 나처럼 잘생긴 존재가 또 어딨다고!”
“헤에……?”
엘리의 손에 들린 일레비루스가 루리에게 소리쳤지만 루리는 시선을 그 검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불길 속으로 뛰어 들었었는데, 다친 곳은 없느냐.”
엘리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걱정해 주었지만, 그녀의 눈썹이 순간 미간 쪽으로 꿈틀 거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흠흠……! 난 괜찮아, 하하.”
“그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거늘.”
“아하하…… 참! 그러고 보니 그 검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아, 이 녀석의 본래 모습은 검이 아니야. 번개의 신 ‘레트릭스’의 대리인이지.”
엘리가 이 정도로 나긋나긋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주다니. 기분이 상당히 풀렸나보구나.
“오호, 그렇구나―. 그나저나 검을 소환한다니, ‘지크 가이 프리즈’를 외쳐야만 할 것 같은 장면이었어.”
“말은 똑바로 해라, 안경잽이! 그 주문은 불꽃검 ‘이프리트라’를 부르는 주문이라고 임마!”
에? 진짜 그런 주문이 있어? 게다가 심지어 불꽃검이야? 그냥 던져본 말인데…….
“아무튼! 이제 시간이 됐으니 난 갈 거야, 엘리시아.”
“잘 가라.”
엘리는 아쉬워하는 기색 하나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마력을 더 키워서 종국선언을 할 때 부르라고!”
“흠―. 생각해보지.”
엘리의 영혼 없는 대답. 하지만 이어진 일레비루스의 짧은 이야기가 그녀의 동공을 흔들고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참, 소환되기 전에 ‘르쉬케’가 ‘예상대로 문제점이 발견됐으니 가급적 계약 사용을 자제해라.’ ―라고 전해 달라던데.”
르쉬케? 계약? 문제? 무슨 말이지?
“――역시 그런 건가…….”
“너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한 거냐?”
“아니, 알 것 없다. 어서 돌아가.”
그녀가 싸하게 굳은 안색을 빠르게 평상시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되돌리며 일레비루스를 하늘 높이 던졌다.
“흐아아악―! 야! 조심히 다루라고!”
일레비루스는 귀가 아플 만큼 목청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엘리는 그런 그의 절규를 모른 척하며 무덤덤하게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고, 일레비루스는 푸른 번개를 쏟아내며 개방된 소환문을 통해 사라졌다.
일레비루스가 사라지자 하늘도 거짓말같이 다시 푸르게 돌아왔고, 먹구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물러갔다.
“크하하, 엘리는 정말 대단한 마법사구만. 저 정도면 유하 네가 왜 그렇게 자신감을 가졌는지 이해가 간다. 미로토러스를 상대로도 전혀 문제없겠어!”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덩치.”
랄프 아저씨가 우락부락한 손으로 엘리의 팔을 잡고 어울리지 않게 빙글빙글 돌며 비행기를 태웠다.
―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던 건 착각이었나?
엘리는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 상현달 같은 눈으로 째릿 랄프 아저씨를 쳐다봤지만, 의외로 점잖게 당해주었다.
“―역시 잘못 본 건가?”
“뭐가요?”
“아냐, 아냐. 근데 엘리 정도면 합격은 무리 없겠지? 이제 남은 건 그리시스라는 분을 만나러 테라로사로 가는 일만 남았군!”
“네!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루리 녀석, 얼마나 기분이 좋길래 저렇게 배시시 웃는 거야? 하하, 가끔 바보처럼 보이기까지 한단 말이지.
―당연하지만 며칠 전의 그런 슬픈 얼굴보다는 훨씬 보기 좋다.
앞으로도 루리가 밝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
“자, 그럼 이따가 저녁은 같이 뒤풀이를 하러 가자구! 시험 치르느라 고생했으니 내가 쏘겠어!”
“정말요? 랄프 님, 최고―! 맥주 최고―!”
루리가 이번엔 랄프 아저씨를 띄워주며 그의 근육 팔에 매달렸다. 루리는 맥주 몇 잔을 마시고도 취한 기색조차 없이 맛있게 잘 마셨으니 좋아할 만도 하지.
자, 그럼 슬슬 돌아갈 준비도 하고―
“엘리!”
“?”
―역시 그건 착각이었던 게 분명하다. 여전히 대답 없이 눈알만 굴려 나를 바라보는 무뚝뚝한 녀석. 역시 난 ‘펫’이라든가, ‘사역마’라든가 비슷한 거냐!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맘에 안 드는 주인에게 선심 한번 써보자.
“수고했어.”
나는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앗…….”
축 쳐져있던 엘리의 긴 은발이 그녀의 살짝 놀란 표정과 함께 보풀처럼 부풀어 올랐다.
―무뚝뚝한 게 아니라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였나?
여하튼 그렇게 무례한 내 행동은, 말하자면, 펫으로서 주인에게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응.”
―불그스름한 홍조가 살포시 띠는 엘리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 * *
며칠 뒤 아침, 당시 등록해두었던 랄프 아저씨네 가게 주소로 WQT통지서가 날아왔다.
「합격을 축하합니다!―」
“오! 엘리! 합격이야, 합격!”
“유하 님?! 잠깐, 아직 들어오면―”
제일 먼저 소식을 받게 된 나는 통지서를 들고 나와서 가게 옆 케노피 천막을 들추고 들어갔다.
“어서 이거 봐봐! ……흐익?!”
―너네 둘. 대체 왜 여기서 옷을 갈아입는 건데……?
“꺄아아악――! 유하 님 변태!”
“흐으어억!”
물병과 의자, 심지어 접이식 침대까지 난무하는 천막 안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
“그러니까 아직 영업개시도 안했는데 왜 들어오구 그래욧! 천막 문에 ‘영업종료’ 걸이판 걸어 놓은 거 안보여요?!”
아직까지 빨개진 얼굴이 식지 않은 루리가 상어 같은 이를 드러내며 화를 낸다.
엘리도 살짝 발그레해진 뺨을 숨기지 못하며 “색골 녀석. 쯧.”하고 도끼눈으로 혀를 찬다.
“미, 미안하다니깐 그러네……. 통지서가 나와서 너무 들뜨는 바람에. 아하하…….”
생각해보니, 여관에서 나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으면 되잖아? 내 잘못만은 아닌 거 같은데?
“근데 왜 여기서 갈아입는 건데?!”
“애초에 귀찮게 간호복을 입으라고 한 게 누. 구. 였. 죠?!”
“그, 그건……!”
그렇게 말한 건 나지만, 그래도 명색이 치유소인데 깨끗한 이미지를 보여야 할 것 아냐?!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변명은 곧 죽음. 엘리에게 처맞고 죽기 싫으면 빨리 머리박고 사죄해야한다.
“그나저나, 분명 합격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서 통지서를 열어 보거라.”
“아, 아아―, 응. 한번 같이 볼까?”
「―귀하는 Wizard Qualification Test) ‘대마도사’ 부문에 3등으로 합격하셨습니다!―」
“3등? 어째서 3등인 것이냐.”
「―귀하의 점수는 심사위원 점수에서 100점 만점에 100점, 심사 외 점수에서 ‘타 응시자 공격행위’ -10점 및―」
“―‘관계인 난입행위’로 인해 마이너스 십……”
―차갑다.
통지서를 읽고 있는 나를 보는 ‘누군가’의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진다.
“이…… 멍청한 녀석―!”
“흐이익――! 사, 살려줘, 엘리!”
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엘리의 못된 손버릇이 내 복부를 강타하기 직전―
“유하! 테라로사로 가는 기차표가 나왔어!”
―랄프 아저씨 덕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