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은 편하게 그녀에게 안긴 모습이지만, 어쩐지 마뜩찮다.
―다 큰 어른이 초딩에게 안겨있는 꼴이라니. 인생의 흑역사 탄생의 순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청 청사의 시계탑 난간에 도착하자, 엘리는 나를 가볍게 내려놓고 혼자 중얼거렸다.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 건가?”
“잠깐, 잠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 상황은? 분명 네가 인식저하 마법까지 썼는데도 미행을 하다니? 대체 그게 누군데?”
보통의 마법도 아니고 드래곤의 마법을 간파한다? 아무리 엘리의 마력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아는 상식에선 약해진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일개 개인이 그 마법을 간파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설마―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꽤나 놀랍구나. 나와 비슷한 수준의 마력을 지닌 통찰 마법이 아니면 간파하기 힘들 텐데.”
“혹시, 이 세계에 엘리, 너 말고도 다른 드래곤이 있는 거라면……?”
“본래 인간의 마법이란 드래곤에서부터 비롯된 것. 이렇게 버젓이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인데, 드래곤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그럼에도 그 전설적인 ‘드래곤’이라는 말을 듣고도 벌벌 떤다든가, 놀란다든가 하지 않는 루리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하단 말이다.
어쩌면 엘프와 앙고리아처럼 명칭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드래곤이 실존하는지 몰랐던 나라면 또 모를까.
드래곤의 실존에 익숙한 세상이라고 가정했을 때 너의 뿔을 보고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게 문제라고.
“게다가 엘리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상대라면, 위험한 것 아닌가……?”
“응? 뭐라고 그리 중얼 대느냐?”
“아냐, 아냐.”
엘리는 “흠.”하고 콧숨을 한번 내쉬더니 허리춤을 손으로 받쳤다.
“일단, 우릴 해하려는 목적은 아닌 것 같구나. 중간에 미행을 멈추고 돌아간 것을 보면.”
“뭐,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철컥. 철컥.
둔탁하고 둔중한 시계의 초침소리가 내 뒤통수를 일정한 간격으로 때린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8시 58분.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분침이 당장이라도 직각을 완성할 기세로 ‘12’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으악! 늦었어, 엘리! 2분도 안 남았어, 이제!”
“뭐?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
누가 자꾸 이것저것 사달라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는데 말이죠! 애초에 빨리 왔으면 미행당할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죠!
―라며 혼자 얼굴을 구기고 있는데 별안간 엘리가 시계탑 난간에서 건물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야아! 나도 데리고 가야지!”
“아, 정말! 쓸모없는 녀석이로고!”
엘리가 얼굴에 귀찮은 표정을 한가득 담고서 다시 올라왔다.
―그나저나 쓸모없다니, 지금 상황에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 너무 심한데.
“업어줘.”
“…….”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몹쓸 애교와 나를 매도한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아악! 내 머리! 놔 줘! 대머리 된다고!”
그녀의 화답은 “늦었다면서?”라고 말하면서 내 머리끄덩이를 잡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 * *
“마법사자격 인증시험…… 신청하러 왔습니다…….”
“아 WQT(Wizard Qualification Test)요? 아슬아슬하게 오셨네요?”
데스크 위의 서류를 정리하느라 내 꼴을 아직 보지 못한 시청의 여직원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면서 대답했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어떤 서류를 건네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신청서 드릴 테니 빨리 작성해서 갖다 주세... ―꺄아악!?”
―아아. 확실해. 저 반응.
지금 내 머리는 분명, 잘 닦인 고속도로처럼 말끔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한 장만 있으면 된다.”
석상이 된 여직원의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엘리가 뺏듯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한쪽 의자에 앉아 유려하게 글씨를 써내려가더니, 뻣뻣하게 굳은 여직원 손에 그대로 다시 끼워 넣었다.
“시, 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여직원은 작위적인 말투로 말하고는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너도 이제 그만 정신 차리거라, 유하. 얼이 다 빠져있구나.”
“너라면 괜찮겠냐……. 지금 난 대머리…….”
엘리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있던 머리 뭉텅이를 내 허전한 정수리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밥공기 위에 김자반을 올리듯.
“뭐하냐, 너……?”
엘리는 그저 중지와 엄지를 맞대고 튕길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딱!
맞닿은 손가락에서 맑은 파열음이 울리자, 허전하게 느껴졌던 정수리가 다시 이불을 덮은 것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오?”
머리가 다시 모공에 자리 잡힌다? 설마 이것도 리커버리의 일종인 건가!
만약 대한민국에 돌아간다면 한 연예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500만 탈모인’들의 빛과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지구에 가면 엘리와 함께 바로 발모사업에 뛰어드는 거다!
“응시료는 2골드입니다―.”
내가 망상을 하는 동안, 완전히 정신을 차린 여직원은 이미 몇 명의 이름이 적힌 양피지에 엘리의 이름을 적는 것으로 접수를 완료하고는 빈 트레이를 건넸다.
“얼마라고요?”
“2골드입니다.”
청력이 안 좋아졌나?
“2실버?”
“2골드요! 금화 두 닢!”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귀를 후벼 파고 다시 물었다.
“은화?”
“금! 화! 귀 먹었어요?”
분명 랄프 아저씨가 응시료는 1골드면 충분하고도 남을 거라고 그랬는데……. 착각한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비싸요? 아무리 비싸도 1골드면 충분하다 그랬는데.”
“왜 비싸긴요. 응시유형에 대마도사로 선택하셨잖아요. WQT가 뭔지 알고 오긴 한 거예요?”
여직원은 목소리를 신경질적으로 고조시키며 대답했다. 마치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라는 느낌으로.
―뭔가 데자뷰인 듯한 느낌은 기분 탓이겠지……?
“자, 봐요.”
여직원은 신청서에 ‘응시유형’이라고 적혀진 항목을 가리키며 나에게 보여주었다.
‘마법사’, ‘연마법사’, ‘대마법사’, ‘마도사’, ‘연마도사’, ‘대마도사’.
여직원 말대로 응시유형 항목을 확인하니 정말로 ‘대마도사’에 체크가 되어있었다.
“…….”
엘리 자식! ‘드부심’ 부렸어!
마법사, 아니, 하다못해 대마법사까지만 해도 충분한데!
현재 수중에 있는 돈은 천막 구입을 위해 루리에게 맡긴 1.5골드를 제외하고 딱 2.3골드.
아끼지 않으면 자칫 오늘 점심은 빵과 스프라고!
“대마법사로 변경 안 돼요……?”
“허,”
여직원은 이제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뱉었다.
“시간을 봐요. 지금도 많이 봐주는 거거든요? 다시 작성하면 접수시간 이후 신청으로 간주해서 다음 분기로 이월되는데, 그렇게 해드릴게요, 그럼.”
“자, 잠깐만요!”
다음 분기라면 적어도 3개월 뒤?! 그럴 수는…….
“그냥 대마도사 그대로 해주세요……. 흑흑.”
난 트레이에 금화 한 닢과 은화 열 닢을 올려놓고 여직원에게 건네면서 고개를 돌려 엘리를 노려봤다.
엘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아까 길거리에서 샀던 하늘색 반다나 머리띠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허! 저 자식! 아오! 진짜 드래곤만 아니면……!
속으로 욕하던 중 엘리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는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한 천진난만한 얼굴.
나는 눈썹을 꼬부라트리며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돈’을 표현했다.
그러자 엘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올려 ‘오케이’를 표현한다.
“하.”
그동안 지옥철에서 욕을 먹어가며 연장한 수명을 저 녀석이 다 가져가고 있다. 가뜩이나 오래 살면서!
“응시는 사흘 뒤 오전 10시니까 늦지 마세요.”
“네에…….”
대체 뭘 위해서 지출계획을 세웠던 걸까.
계획은 항상 빗나가기 마련이라며 각오까지 했건만,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엘리는 여전히 반다나 머리띠를 쓴 모습을 거울을 통해 확인하며 콧소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 * *
시험 당일.
시청 부지 아래, 외곽의 울타리를 기준으로 안쪽에 잔디밭이 깔린 드넓은 광장이 있다.
총 여섯 개의 유형별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고, 각 구역에는 응시자들이 몰려있었다.
“와, 생각보다 많구나. 한 삼백 명은 되려나?”
광장을 내려다보며 인원수를 대략적으로 가늠해보았다.
‘마법사’에서부터 ‘대마도사’까지, 여섯 개의 구역이지만, 응시자의 80퍼센트 정도는 ‘마법사’와 ‘연마법사’ 구역에 서있었다.
“그러게요, 근데 엘리 님이 응시하는 대마도사 쪽은 고작 세 명밖에 안나와있네요.”
어차피 엘리가 없으면 치유소 역시 운영할 수 없기에, 응원 겸 따라 나온 루리였다.
“한 명 더 있다.”
“아―, 엘리 님을 빼먹었네요! 헤헤.”
루리가 혀를 빼죽 내밀고 민망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아니라, 이 몸을 제외하고 네 명이 저 곳에 서있다는 뜻이다.”
“네? 엘리 님 제외하고 네 명이라구요?”
루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엘리의 말에 나도 눈을 한번 비비고 다시 세어보았다.
―하나, 두울…… 세 명.
엘리 녀석, 사흘 동안 마력을 비축한다면서 조기퇴근까지 했는데 설마 아픈 건 아니겠지?
훤칠한 키를 가진 금색의 장발의 사내와 유명 영화에서나 봤었던 ‘스태프’를 들고 있는 백발의 노인, 그리고 특이하게 마법사의 대표 무기인 ‘원드’나 스태프가 아닌 ‘소드’를 들고 있는 갑옷의 기사.
아무리 봐도 이 셋이 전부다.
댕― 댕― 댕―……
10시를 알리는 시계탑의 종이 열 번 울리자, 사열대의 단상 위로 검정색 정장을 입은 진행자가 올라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진행자는 자신의 검지를 통해 발산되는 빛을 마이크에 쏘고 나서 마이크의 흡음부를 톡톡, 두들겼다.
[자! 그럼 응시자들은 이제 모두 모여주세요!]
“오오. 신기해. 마이크에 마력을 주입하니까 스피커도 울리잖아?”
시험 시작을 알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산만하게 있던 응시자들이 사열대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되니, 삼백 명이 아니라 족히 오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다녀오마.”
엘리가 나지막이 인사하고는, 계단을 따라 광장으로 내려가 대마도사 구역에 서있는 세 명 틈에 섞였다.
[그럼 이번 분기 WQT를 시작해볼까요? 시험에 앞서 먼저 규칙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에 일부 응시자들은 알 거 다 안다는 식으로 야유를 날렸다.
[자자, 진행자 권한으로 탈락당하기 싫으면 조용하시고!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진행자의 정숙하라는 협박에 쥐죽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고, 몇몇 사람들의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번 WQT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심사가 매우 간단합니다! 아르키메시아의 저명한 마법사이자 심사위원들 앞에서 본인이 뽐낼 수 있는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와아아아――!!”
긴장감이 많이 흐른 만큼, 심사방법을 들은 응시자들은 안도와 함께 커다란 함성을 질렀다.
보아하니, 이전 시험들은 복잡한 형식이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단순하네? 난 또, 마법 주문을 누가누가 많이 외우나 그런 거라도 하는 줄 알았네.”
“유하 님, 여기선 너무 안보여요. 우리 사열대 옆에 좌석도 있으니 그 쪽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루리가 꽤나 들뜬 목소리로 나의 감상 중간에 뛰어들었다.
―하긴,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신기하고 두근대는데, 타종족인 루리도 경험이 없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들뜨는 게 무리도 아니지.
“그럼, 그럴까?”
“우와앙―! 신난다!”
루리가 펄쩍 제자리를 뛰더니 팔짱을 끼듯이 내 팔을 붙잡고 사열대 쪽으로 끌고 갔다.
“하, 하하……. 들뜬 건 알겠는데…….”
로리가 들러붙는 건 사양인데 말이지. 하지만 이렇게 들뜬 애한테 뭐라 할 수도 없고…….
[……마지막 심사위원은 이번 시험의 심사위원장을 맡으신, 아르키메시아 건국신의 직계후손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두 명의 ‘대현자’ 중 한 명! ‘메데스 가(家)’의 ‘유클리아 데 메데스’이십니다!]
계단을 내려가 사열대 기준으로 나뉜 양옆 좌석 중 왼쪽 편으로 걸어가는 동안 진행자가 간단하게 심사위원들 소개를 했는데, 마지막 심사위원은 진행자의 말이 끝난 뒤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와아아아아―――!!!”
그 심사위원이 단상에 오르자,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함성과 박수가 광장을 떠나갈 듯이 울렸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함성의 성비는 남자가 압도적이었다.
“으악, 귀청 떨어지겠네. 저 사람이 대체 뭐길ㄹ―”
육감적인 몸매의 라인을 따라 떨어지는 붉은색 웨이브 머리. 그 위에 검정색 나비가 앉은 것 같은 머리장식.
날카로우면서도 선한, 고혹적인 눈매와 그 눈 밑의 애교점이 그녀를 보는 나로 하여금 굳어있던 심장을 꿈틀거리게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남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와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