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뿌우――.
“기상―! 기상―! 유하 님! 기상하세요―!”
으음…… 뭐야……. 누가 부부젤라 부는 거야…….
“지금 몇 신데……?”
“일곱시 입니다―!”
하얀색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루리에게 묻자 어이없는 대답이 귀로 흘러들어온다.
―하. 새벽 늦게까지 계획을 짜고 잠 들었는데, 고작 일곱시에 깨운다고……?
“밥 먹을 때 다시 깨워줘…….”
땡땡땡―!
―아, 이번엔 꽹과리라도 되는 거냐. 기왕 이렇게 된 거, 뒤집어 엎어주마!
“아오――, 오?”
―뭐야? 언제 방에다가 이런 진수성찬을…….
이불을 걷어차듯이 내팽개치고 멱살이라도 끌어 잡으려고 했지만,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에 멍하니 몸이 굳어버렸다.
이미 엘리는 수저로 국을 떠 마시고 있다.
“유하 님, 제가 다 차려놨으니 어서 같이 먹어요! 헤헤.”
……오랜만이로구나, 이런 느낌은. 나쁘지 않아.
* * *
벌컥, 벌컥, 벌컥―.
“후아―. 살았다…….”
아침 식사를 꾸역꾸역 밀어 넣고 나서 물통을 하나 들고 테라스로 나왔다.
“루리…… 다시는 요리하지 마라. 오늘만 봐준다.”
“―그렇게나 입맛에 안 맞았던 거냐.”
“흐갹, 엘리?!”
식사를 마치고 루리와 함께 옆방으로 들어갔던 엘리가 테라스를 타고 넘어왔다.
이렇게 다들 쉽게쉽게 넘어올 거면 방이 분리된 의미가 없잖아…….
“새벽 늦게 잤더구나.”
“엑, 알고 있었어?”
“자던 도중에 머리가 아파 잠시 깨서 알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반인사불성이 되었으니 머리가 아플 만큼 숙취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것보다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이나 하려나 모르겠네.
“혹시……. 어젯밤 일 기억…… 나?”
“………….”
윽,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기억은 나는가 보다.
―라기 보다는 기억이 나는데도 이렇게 행동하는 건 술김에 화를 낸 게 아니라는 거지!?
“그…… 저번엔 미안했어. 말했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배고픔에 정신이 나갔는지, 나도 모르게 그만…….”
팔짱을 낀 엘리가 한쪽 눈만 떠서 나를 힐끔 흘겨본다.
혹시, 화난 건 이것 때문이 아닌 건가? 설마 내가 아무 노력 없이 놀고먹는다 생각해서?
“그, 그리고! 자, 봐!”
나는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새벽동안 오늘 할 일을 정리해놓은 것을 보여주었다.
“흐응―.”
엘리는 빼꼼 내밀은 메모장을 슬쩍 훑어보고는 이젠 양쪽 눈을 다 감는다.
“나도 나름 노력한다고! 절대 놀고먹고 있는 게 아니야!”
슬쩍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모자를 까봐 엘리의 눈앞에 메모장을 대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긴다. 하지만 움찔하는 반응조차 없다.
“으……. 이것도 아닌 건가…….”
“풋―, 너 지금 드래곤인 내게 무얼 하는 것이냐?”
엘리가 살짝 삐져나온 웃음에 손등을 갖다 대어 막고는 드디어 대답의 포문을 열었다.
어이없다는 눈빛일까? 혹은 재미있다는 눈빛일까? 나를 보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를 담은 표정이 헷갈린다.
“그, 그거야, 제대로 사과를 하려고…….”
“그러니까, 왜 사과를 하느냐는 말이다.”
사과를 왜 하냐니. 그거야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녀의 질문이 무슨 의미일지 고민하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녀가 얕은 미소를 머금은 분홍빛 산호색 입술을 달싹인다.
“드래곤에 대한 죄의 값은 사과가 아니라 죽음이다. 그런 얄팍한 입놀림이 가당키나 하겠느냐?”
“그, 그런…….”
“―그런데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목숨조차 빌지도 않고, 도리어 자신의 노력을 어필하면서 성내는 너의 모습이 신기해서 말이다.”
“으, 으음…….”
얼굴 표정은 밝은데, 입은 신랄하게 나를 비판하고 있다. 화를 내는 건지, 칭찬을 하는 건지 모를 그녀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회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돌아간 내 고개를 자신의 쪽으로 다시 옮겨놓는다.
“네 녀석을 살려둔 건 그저 유희……, 혹은 시종으로 삼기 위함에 불과했다. 그래서 같잖은 인간 따위의 돌팔매질 같은 농담에도 참고 어울렸던 거지.”
내 고개를 돌린 그녀의 따뜻한 온도에, 그녀가 내 얼굴에서 손을 떼고도 다시 시선을 회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제는 그런 너의 어이없는 행동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와. 헛웃음조차 지을 필요 없이 널 없애면 되는데 말이야.”
애써 나의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맞춰놓고는 이제는 그녀가 나의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는 심지어 고개를 살짝 떨군다.
“어제 토라졌던 건……. 술김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너의 하찮은 짓거리에도 그걸 어느새 용서하고 있는 자신이 싫어서였다. 자존심이 상해서…….”
―엘리는 드래곤이다.
설화뿐 아니라 현대인의 상상력으로 지어진 이야기에서도 대체로 괴팍하기로 소문난 존재.
그 소문이나 구전은 사실이었는지,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껏 자신에게 적대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한 인간 혹은 다른 생물을 거침없이 살해하고 없애온 게 분명하다.
황당했겠지. 아무렇지 않게 격 없이 그녀에게 구는 내 행동이.
“하지만 애써 사과할 필요는 없다. 내 선택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결정―”
“―난 네가 좋아.”
떨군 고개에 가라앉았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표표하게 들썩인다.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의 은발이 휘날려 내 시야를 지나고, 칠흑 같은 우주의 샛별처럼 아름다운 두 눈동자가 드러난다.
놀란 토끼 같은 그녀의 고양이를 닮은 두 눈동자가.
“에……, 그…… 좋다는 의미는 오리지널의 네 모습에 한정된 거긴 한데…….”
혹시라도 엘리가 착각할 까봐 확실하게 말해두었다.
“그러니까, 지금껏 네가 만난 인간들이 널 어떻게 생각했든, 네가 그 인간들을 어떻게 생각했든 나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죽이지 않아 주는 건 고맙…… 지만, 앞으로도 난 지금처럼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기왕이면 사이좋게 말이지. 하하…….”
간만에 드러난 나의 본심을 듣고 나서, 기쁜지 슬픈지 모를 그녀의 얼굴이 테라스 난간 너머 펼쳐진 도심의 광장 쪽으로 향했다.
“……노력은 해보마.”
산들산들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를 흩날린다.
얼핏 보인 그녀의 미소를 보아하니 애써 둘러댄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9시까지가 신청 마감이라 빨리 시청에 가야해, 엘리. 어서 나갈 준비하자!”
“뭐 이 몸은 언제든지 상관없―”
다시 무심한 말투로 돌아와 말하던 그녀가 다시 한번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그 말은, 같이 가주겠다는 말이냐?”
“응. 당연하지! 일단 지금은 네가 어린 모습이니까, 내가 보호자처럼 보이는 게 여러모로 나을 거 같아서. 하하.”
사과의 의미도 있고, 사실은, 이 녀석의 정체를 모르고 접근하는 로리콘들의 목숨을 보전시키기 위함이 제일 크긴 하지만……. 일단 로리콘들도 살 권리는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서 준비―”
응? 그새 어디 갔지, 이 녀석?
―드르륵.
옆방의 테라스 문이 살짝 열리고 루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유하 님―, 엘리 님이 준비 끝났으니까 빨리 나오라고 하시네요.”
허어. 고 녀석 행동력 클라스 장난이 아니네.
* * *
소서리아 시청이라…….
큰 도시는 아니라지만 길도 잘 모르는데다가 시청이 멀리 있을 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 어제 랄프 아저씨가 그려준 지도를 보니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여관에서 나와서 20분 정도 거리라고 적혀있으니.
대한민국의 지하철로 가늠하자면 고작 한 정거장 정도밖에 안 된다.
“이번엔 저거다.”
―엘리 녀석의 길거리 쇼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20분이 넘고 말았지만.
게다가 보호자 행세를 하느라 손을 잡고 걷는 것도 불편해……. 어쩔 수 없긴 해도.
“……머리띠?”
엘리가 막대사탕을 들고 있는 손을 뻗어 가리키는 가게 쪽을 보니, 머리띠를 팔고 있는 노점상이었다.
툭.
―어이, 어이. 아무리 그래도 칠칠맞게 사탕을 떨어트리는 연기까지 할 필욘 없잖아. 진짜 애가 아니라고.
“웅. 업어줘. 빨리.”
“……???”
갑자기 웬 귀여운 척? 저기, 혹시 사탕에 이상한 약이라도 들어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건 아니지, 엘리?!
“빨리이이――!”
“으악,”
엘리의 언성이 높아지자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지은 엘리의 얼굴에 조금 홍조가 띠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까 전 여관에서 잠시나마 이 녀석을 좋게 봤던 내 자신이 싫어져!
“으아아!”
빠악!
“크허억! 아니 이런, 미친……. 왜, 정강이를―”
“쉿.”
혹시나 부러지진 않았을까 고개를 숙여 정강이를 문지르며 확인하던 나와 키가 맞아 떨어진 엘리가 귀에 속삭인다.
“좀! 닥치거라.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느냐……?!”
“뭐, 뭣? 그게 무슨…….”
“누군가가 우리 뒤를 미행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행동해라. 적당한 시점에 ‘인식저하 마법’을 사용할 테니.”
미행? 대체 누가? 왜? 우리를? 어째서?
낯선 세계에 온지 고작 일주일 남짓. 우리와 아는 사이라곤 루리랑 랄프 아저씨밖에 없고, 그동안 스쳐간 사람들이라고 해도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면 분명 엘리가 뭐라도 행동을 보였겠지.
“특별히 이상하다거나 우릴 이상하게 여길만한 접점 같은 건―”
“―업어줘어.”
……거 녀석.
후유.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머리띠.”
크흡. 참아야 한다. 몹쓸 인위적인 애교.
객관적으로는 엘리의 인위적인 애교 속에서도 무언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사랑스러움이 넘치는 비음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내게는 그저 어린아이의 찡얼거림처럼 들릴 뿐이다.
“아, 하하하. 머리띠. 그래그래.”
엘리를 업은 채로 머리띠를 팔던 가게의 매대 앞으로 가서 대충 아무거나 집었다.
“아저씨, 이 하늘색 머리띠 얼마예요?”
“오―, 젊은 청년이 보는 눈이 있구만. 그 반다나 머리띠는 3실버라네.”
젠장, 무슨 이딴 머리띠 하나에 만오천 원이나 해? 바가지 아냐?
“사줘.”
등에 업혀있는 엘리가 내가 집은 반다나 머리띠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큭, 그, 그걸로 주세요.”
“청년, 젊은데 참 좋은 아빠로구만. 나도 본받아야겠어!”
중년의 상인이 누런색 이를 번쩍이면서 웃는다.
아저씨, 대체 어딜 봐서 내가 이 녀석 애비야…….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엘리를 업고 있는 것도 힘에 부쳐서 반박할 힘도 안 나온다.
“셋 세면 전방의 인파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머리띠를 품 어딘가에 넣은 엘리가 속삭인다.
자연스럽게 인파속에 스며들어 인식저하 마법을 쓸 생각인건가? 과연!
―아니, 그보다 그런 거였으면 애초부터 썼으면 된 거 아냐? 머리띠가 목적이었던 거냐, 설마!
“―셋.”
“큭!”
흐다다다! 아저씨, 아줌마! 비켜요 비켜! 지나갑니다!
대학교 다니면서 오후 강의가 있는 날이면 집에 갈 때 늘 쓰던 스킬이라 비집고 지나가는 건 식은 죽 먹기지!
“오?”
인파속으로 들어오자마자 기본적으로 인지에 필요한 사물이나 인물, 건물 등을 제외하고는 배경이 새카매졌다.
마치 우주의 한 행성 위에 서있는 것처럼.
“이게 인식저하 마법? 마치 외부와 차단된 느낌이네... 그런데도 시야나 소리를 인지하는 데에 지장이 없잖아?”
오히려 불필요한 정보가 사라지니까 평소보다 집중이 더 잘되는 느낌.
“이제 내려도 된다.”
아― 힘들었다. 생각보다 무겁네 이 녀석.
그보다, 지금 몇 시쯤 됐지? 9시까지 가야하는데, 삼천포로 빠지는 바람에…….
“일단 몇 신지 확인을 해야……, ――야, 야, 잡지 말아봐.”
아무도 우리를 인지하지 못하겠다, 주변에 있는 아무 가게에 들어가 시간만 확인하고 나오려는데 엘리가 내 옷을 당기며 저지했다.
“유하, 시청이 어디라고 했느냐. 어서.”
“응……? 으음 그러니까, 지도를 보면…… 저쪽인 것 같네.”
나는 우리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팔을 뻗어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검지를 뻗은 상태로 몸 전체가 직각으로 기울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엥……? 공주님 안기?!”
“인식저하 마법을 간파 당했어. 이렇게 된 이상 가능한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건물 테라스와 지붕 곳곳을 빠르고 사뿐하게 밟으며 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