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가 저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다.
늘 주변 사람을 존대해주며, 해맑게 웃고, 그 푸르고 청명한 눈을 반짝거리는 아이였는데.
하긴, 부모님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었으니,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루리, 일단 진정해봐.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어.”
루리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난 탓에 순식간에 호프 안에 왁자지껄한 수다가 사라지고 모든 이들의 이목이 우리에게로 집중되었다.
“아.”
루리가 머리를 깜빡이며 뒤늦게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을 마쳤다.
“아하하…….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헤헤…….”
그녀가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면서 황급히 자리에 다시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한 호프 안의 공기가 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걸쭉한 목소리들로 채워졌다.
“참, 루리. 널 돕겠다고 했으면서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은 못 세우고 있었네. ……너희 부모님은 레드럭 해적단에게 납치되신 거였어?”
“네……. 그 마인 미로토러스가 있는…….”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던 루리가 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대답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랄프 아저씨는 우리의 대화에 흠칫 놀라 눈썹을 들썩였다.
“뭐?! 레드럭 해적단에게 납치됐다고? 근데, 설마 레드럭 해적단에게 덤비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뇨, 맞는데요. 정확히는 인질 구출이긴 하지만.”
“………….”
내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랄프 아저씨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뭐, 아저씨의 반응을 이해는 한다. 해적들에게 고작 셋이서 덤비겠다니. ‘고무 주먹’이 울고 갈지도 모르겠다.
“일단 본거지를 찾는 게 제일 관건일 텐데, 아무리 그래도 불법을 자행하는 녀석들이니 마냥 눈에 띄기 쉬운 곳에 있지는 않을 테고. 인적이 드문 외딴섬이나 배 그 자체가 본거지겠지. 루리, 혹시 그거에 대해서 알아본 적은 있어?”
“아, 본거지는 모르지만 주로 출현하는 장소나 마주칠 만한 방법은―”
“잠깐만, 잠깐만.”
루리가 내 질문에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랄프 아저씨가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몇 마디 하지 못하고 끊어졌다.
아저씨는 갑자기 근육질 넘치는 손으로 자신의 안대를 풀고 이어서 말했다.
“봐, 이 눈을.”
“흐익.”
드러난 아저씨의 눈에는 심각한 흉터가 남아있어 안대를 썼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무서운 얼굴이 되고 말았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난 제법 잘나가던 모험가 파티의 리더였지. 실력도 있었고. 하지만 그 미로토러스에게는 손도 써보질 못했어. 동료들은 결국 전부 살해당하고 나 혼자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어.”
온통 근육질로만 되어있어 떨림이란 걸 모를 것 같은 아저씨의 벽돌 같은 투박한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후로도 다른 유명 모험가들이 몇 번 나섰었지만 결과는 참담했지……. ‘아나크로즌’, 그러니까, 해적국가가 연합에 합류하기 전에도 연합군이 그를 어쩌지 못했던 건 괜히 그랬던 게 아니야.”
“맞아요. 유하 님의 자신감에 이유가 있으시다는 건 저도 알지만, 레드럭 해적단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해적단 중 하나예요.”
“뭐?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그러니까, 5대장이라구?!”
“네. 저도 엘리 님의 대단한 모습을 오늘 한 번 더 확인했기에 마음속에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거지만, 솔직히 저 때문에 두 분이 위험에 빠지진 않을지…….”
랄프 아저씨와 루리가 연속으로 나에게 해적의 위험성을 경고하자 갑자기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솔직히, 엘리가 아니었음 이렇게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드래곤이 무엇인가. 실존만 한다면 인류가 떼거지로 덤벼도 못 이길 지구 최강의 종족. 전설적인 동물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내 눈앞에 실존한다. 경챁특공대를 압도하는 것도 직접 목격했었다.
“엘리, 아무리 그래도 5대 천왕이라는데 괜찮겠어? 걱정되는데…….”
“흐으응, 쓸데없는 걱정이다! 이 몸이 그런 녀석들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는 소리냐? ―거기 뽀글 머리 인간! 한 잔 더 내오거라!”
이제 세 잔째. 나도 두 잔 마셨지만 아직 말짱한데, 엘리는 이제 눈도 풀리기 시작한다.
“정말로 괜찮겠어?”
“드래곤을 사칭하는 녀석들은 멸족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느니라! 흐흐.”
왠지 들떠 보이는데……. 배시시 웃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역시 벌써 취한 건가.
―이거 어쩌면 위험한 거 아닌가? 술 취해서 난리라도 치면……. 가급적 엘리한텐 말 거는 걸 자제해야겠다.
“아, 암튼, 괜찮다는 데요? 아저씨.”
“흐음. 내가 갔을 때만 해도 환자들이 꽤 많았었는데, 치유마법을 그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하면서 그 많은 환자들을 다 치료한 걸 보면 확실히 실력 하나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엄청나다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치유사는 서포터. 미로토러스에게는…….”
랄프 아저씨가 엘리의 주먹맛을 한번 본다면 저렇게 얘기 하지는 못할 텐데.
“엘리의 힘은 단순히 치유에서 끝이 아니에요. 근접 전투도 강한데, 본래는 엄청난 마력을 지닌 무시무시한 마법이 주특기죠.”
“뭐? 정말이야? 그 실력에 치유가 주특기가 아니라면 확실히 기대를 걸어볼 만하겠는데. 흐음.”
랄프 아저씨는 가는 신음을 엿가락처럼 뽑아내면서 고심하다가, 별안간 무언가 마음을 정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안 하나만 해도 될까?”
랄프 아저씨는 깍지를 끼고 턱을 괴고 있던 양손을 분리시킨 뒤 오른손 검지를 펴고 말했다.
“제안이요?”
“그래. 며칠 뒤에 있는 마법사자격 인증시험을 본다고 그랬지?”
“네, 일단 당장 뭘 하든 돈이 필요하니까, 경제활동을 하려면 신분 보증이 필요해서요.”
그가 듬직한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쩍 옆에서 맥주를 꼴딱 넘기고 있는 엘리를 본다.
“음, 이 마법사님이라면 인증시험 따위는 손쉽게 통과할 테지. 하지만,”
―하지만?
“지금 너희들이 운영하는 치유소는 이 도시에서 독점인데다가 반응도 좋으니까 분명 시청에서 내일 당장이라도 단속이 들어올 거야. 오늘 찾아오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지.”
허어. 이 나라의 공무원들은 열일하는구나.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까딱하면 여관도 예약 못할 뻔 했네. 휴!
“그러니까 내 제안은 이래. 이 마법사님이 자격증을 딸 때까지는 내가 잠시 신분 보증을 서 줄게. 난 마법사는 아니라서 영구 보증은 못 서주겠지만, 며칠 정도는 괜찮을 거야.”
“오옷, 정말인가요? 그럼, 그 제안에 대한 대가는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지만, 랄프 아저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우리에게 별다른 선택지는 없다. 며칠뿐이라도 노숙자 신세는 면하고 싶다.
“하하. 너무 그렇게 사무적인 눈으로 쳐다보진 말아줘. 거창하게 제안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부탁에 더 가까운 거니까 말이야. 아까 말했듯이 이 치유사님이 없었으면 예쁜 내 딸 얼굴이 어떻게 흉졌을지 모르니까. 값을 지불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감사해서 말이지.”
“덩치, 동태눈깔인 유하랑은 다르게 보는 눈이 있구나.”
허. 이 자식. 이젠 대놓고 디스하는 거냐!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이유 없이 매도당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지?
“크하하! 내가 안목이 좀 있기는 하지.”
랄프 아저씨가 안대를 다시 쓰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레드럭 해적단에게 도전하는 건 너희들의 자유니까 막을 생각까지는 없지만, 혹시 레드럭 해적단의 본거지에 가게 된다면 내 동료들의 유골을 찾아봐 줄 수 있을까?”
“유골…… 이요?”
랄프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료를 잃은 건 꽤 오래된 일인 것 같은데,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가.
“아무리 그래도 오래되어서 벌써 없어지거나 훼손되지 않았을 까요? 해적들이 굳이 보존해 줄 리도 없고.”
“아니. 미로토러스에게는 몇 가지 악취미가 있는데, 그 중에 밝혀진 하나는 자신에게 덤빈 모험가의 유골을 보존해서 미술관처럼 전시한다는 거야. 완전 미친 녀석이지. 아니,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우욱, 그런 정신 나간 취미가…….
괜히 마족이겠냐 만은, 정말 사이코적인 취미를 갖고 있구나. 마족이라고 하면 그저 살육만 즐기는 줄 알았는데.
“10년이나 지났지만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아직도 불면증에 시달릴 때도 많아. 그리고 동료들의 유족들을 볼 면목도 없고…….”
아저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맥주잔을 들이켰다.
저런 안쓰러운 얼굴 표정을 보니, 거절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다른 조건이었더라도 랄프 아저씨의 제안은 구미가 당기는 일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받아들였겠지만.
“한번 해보죠!”
“응. ――뭐? 정말?!”
사실 어려운 제안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렇게 흔쾌히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랄프 아저씨가 깔아 내렸던 눈을 번쩍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말이죠. 만약 녀석들의 본거지에 가게 되면 엘리가 해적들의 이목을 끄는 동안 저는 루리랑 부모님을 찾으면서 유골도 같이 찾아보면 될 것 같아요. 괜찮지, 루리?”
“네! 전 상관없어요.”
루리 역시 그 착한 심성에 걸맞게 향긋한 미소로 기꺼이 대답해주었다.
“정말 고맙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너희들과 같이 직접 현장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실은 다리도 이 모양이라서. 보탬이 되기는커녕 짐짝만 될 것 같아.”
그러면서 아저씨가 자신의 바지의 오른쪽을 걷어 목재로 된 의족을 보여주었다.
“아아.”
“훠이! 훠이! 그렇게 부담 갖지는 마! 너는 담담하게 승낙하기는 했지만 어려운 부탁이라는 거 아니까. 크하하…….”
짧은 만남이었지만 지금껏 호탕한 웃음만 보여준 아저씨였건만, 이번 웃음 뒤에는 안쓰러움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그럼 일단 내일은 치유소를 우리 가게 옆으로 옮기도록 해. 그 편이 너희들한테도 나을 테고, 나도 시청직원들을 대할 때 편하니까. 게다가 우리 가게 매출도 올라갈지도 모르니 꿩 먹고 알 먹고지!”
랄프 아저씨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걸걸한 목소리로 듬직하게 얘기했다.
“자아. 그럼, 루리. 레드럭 해적단과 조우하는 방법을 얘기하다가 말았었는데 말이지.”
“아, 맞다.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본 적 있어요. 하나는 놈들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구해서 배를 타고 직접 쳐들어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레드럭 해적단이 출항하는 시기에 맞춰서 주 출현 장소에 배를 타고 나가 바다에 표류하는 방법이에요.”
상당히 막연한 방법인 것 같은데……. 어찌 되었건 정보가 중요하단 거군. 그리고―
“―배가 무조건 필요하다는 건데.”
“배라. 아르키메시아에서는 배를 구하기 힘들 걸.”
랄프 아저씨가 루리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짧은 턱수염을 만지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네? 왜요?”
배를 구하기 힘들다니, 이 도시에서라면 몰라도 아르키메시아에 조선공이 한 명도 없다는 소리인가?
“알다시피 아르키메시아는 마법국가라서, 내국인들은 마장기나 워프게이트를 이용하지, 배를 타지 않아.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조선공이라는 직업이 사라졌고. 물론 외국인들은 가격 문제로 대부분 배를 이용하기 때문에 항구도 있고 수리공까지도 있지만, 조선공은…….”
오징어튀김을 앙 하고 귀엽게 뜯어먹으면서 랄프 아저씨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엘리는 그의 말 어떤 한 단어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아마도 ‘워프게이트’이려나. 술에 취했어도 은근히 얘기를 경청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러고 보니 너희는 마법사가 있으니까 워프게이트를 이용했을 테니 잘 몰랐겠군. 외국인이라도 마력을 제공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면 워프게이트 이용료는 저렴하니까 편하지.”
아뇨, 워프게이트랑은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차원이동을 통해서 왔습니다만.
―라고 말은 하고 싶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아르키메시아에 조선공은 단 한 명도 없는 거예요? 가격은 둘째 치고 일단 조선공이 없으면 안 되니…….”
“아르키메시아의 최대 항구도시인 ‘테라로사’에 그리시스라는 영감을 일단 유일하게 알고 있기는 한데,”
뭐야, 괜히 걱정했잖아?
일단 조선공이 있으면 가격은 나중의 문제다. 여차하면 선금을 주고 차후에 지급하는 식으로 협상이라도 해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다음 랄프 아저씨의 말을 듣고 무용지물이 됐다.
“듣자 하니 그 영감, 2주 전쯤부터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연락이 있어서 말이지. 정신병인 듯한데, 영 찝찝해. 그래서 요즘 테라로사 발(發) 정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