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가 내 좁은 등을 향해 힘없고 가냘픈 목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나는 그것을 귀 기울여서 들으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중얼거림 다음에 들려온 소리는 뒤돌아서는 나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털썩.
팔다리에 힘이 빠져나가 무기력하게 바닥에 온몸을 부딪치는 소리.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호기심이 강하다고 했던가.
예상하지 못한 위화감은 늘 인간의 시선을 그곳으로 돌리게 만든다.
“……엘리?”
“하아……. 하아…….”
우악스럽게 미간을 구기며 신음을 내뱉는 엘리는, 이슬을 머금은 저녁의 초원 바닥에 싸늘하게 쓰러져있었다.
―내가 형상기억으로 다시 부활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휴식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야아…… 엘리, 농담이지?”
머리로는 그렇게 내뱉었지만 몸은 저절로 엘리에게로, 손은 나도 모르게 엘리의 이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앗, 뜨뜨! 뭐야 대체 이 불덩이 같은 몸은……?”
―농담이 아니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엘리의 몸은 용암에 달궈진 쇳물처럼 녹아 흐를 것만 같았다.
드래곤의 체온이 평소에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열과 흥건한 땀은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고 육감이 말해준다.
“루리――!!”
저만치서 있던 루리가 엘리를 부축하고 있는 나를 의식하고는 빠르게 달려왔다.
“이 근처에 혹시 아는 도시 있어!? 작은 마을이라도!!”
“헉!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놀란 루리가 일단 엘리를 일으키고 있는 나를 도와 같이 부축하고는 물었다.
“엘리가 정신을 잃었어! 그보다 어서 의사를 불러와야해! 하다못해 눕혀서 쉬게 할 만한 곳이라도……!”
“‘아르키메시아’에서 온 모험가가 아니셨어요?!”
―그딴 거, 알게 뭐야! 젠장, 빨리 근처에 아는 마을 아무 곳이라도 안내하라고!
그러나 루리 역시 쓸데없는 걸 물어볼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나를 도와 엘리를 부축했고, 덕분에 이 말이 목젖 언저리에서 더 이상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여기서 남동쪽으로 가면 가까운 곳에 ‘소서리아’라는 큰 도시가 있어요!”
루리가 우리가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는 내가 업고 따라 갈 테니까 먼저 가서 의사를 좀 알아봐줘! ……부탁이야!”
“네, 네……!”
발 빠른 루리를 먼저 보낸 나는 차가워지는 바람을 맞으며 어둠이 찾아오는 쪽을 따라 달렸다.
* * *
마구간을 개조해서 만든 퀴퀴한 냄새가 나고 찝찝한 단칸방.
목재로 만든 작은 원형 걸상에 앉은 루리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와 엘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유하 님…….”
“왜 깨어나지 않는 거지.”
딱, 딱, 딱, 딱……
“유하 님! 엄지에서 피가……!”
아, 습관적으로 또 뜯고 말았다. 젠장.
불안감과 긴장감이 엄습해오자, 나도 모르게 자꾸 입에 손이 간다.
따갑다. 엄지 위에 고인 선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도통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이 유영하기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자.
―마력을 다 써버려서?
아니야. 쓰러졌을 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며칠이나 잠들은 지금이라면, 하다못해,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로는 마력을 회복했을 것이 분명하다.
―정말로 병에 걸린 건가?
드래곤이 병에 걸린다.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다.
물론 그것이 인간의 상상에서 비롯된 편견이라고 하더라도 엘리는 전에 내가 중2병 걸렸냐는 소리에 병에 걸린 스스로를 상상할 수 없다는 듯이 코웃음까지 쳤다.
“하지만 심증적으로는 이것 말고는 달리 설명이 안 되는데…….”
루리가 몇 군데를 돌아다녀서 불러온 의사의 얘기로는 발열을 제외하고는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몸살인 것 같으니 푹 쉬어주면 금방 깨어날 거라며.
“하아― 하아― 하아…….”
“유하 님! 엘리 님이!”
하루 정도는 괜찮다가도 이따금씩 이렇게 열이 심하게 올라오며 죽을 것 같이 아파한다.
―나는 엘리의 이마에 올려놓은 물수건을 갈아주고 이불을 턱밑까지 바싹 올려주었다.
아무리 몸살 때문에 정신을 잃어도 하루 이틀이지―
“큭, 엘리 녀석……. 걱정하게 하고 말이야.”
“유하 님도 좀 쉬셔야……. 벌써 며칠째 엘리 님을 간호하고 계시잖아요. 저도 돕고는 있지만…….”
―정확히는 일주일째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한 푼도 없었고, 루리가 가지고 있던 ‘레드링’ 두 개를 팔아 그나마 가장 저렴한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
레드링 한 개의 가치는 금화 한 닢으로 생각보다 높은 편이었지만 괴수에게 쫓기느라 다 흘리고 두 개밖에 남지 않았던 탓에 금화 두 닢으로 셋이서 일주일을 버텼다.
금화 한 닢이 이곳에선 5만 원 정도니까, 10만 원으로 셋이서 일주일간 입에 풀칠이라도 한 게 다행일 정도다.
이제 남은 돈은 아르키메시아 화폐인 100디아.
“한 마디로 100원 정도인가. 하루를 바게트 한 개와 스프 한 그릇으로 버티던 것마저 이젠 끝이다…….”
“죄송해요, 가진 게 이것뿐이라……. 목숨까지 구해주셨는데…….”
“아냐, 오히려 도와주겠다고 큰소리 치고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내가 더 미안하지. 그 열매가 없었으면 이런 작은 방조차 구하지 못했어.”
쿵, 쿵!
방 밖에서 누군가 문을 주먹으로 둔탁하게 두드리는 소리. 아마도 주인이겠지. 방을 빼라는 의미다.
지금이 벌써 12시. 체크아웃 시간이 10시니까 늦어도 한참 늦기는 했다.
이곳의 시간과 날짜 개념은 신기하게도 지구와 같았다. 뿐만 아니라 공용어가 한국어라니.
물론 나라나 종족마다 각각의 언어도 있는 듯하지만, 적어도 한국어만 알아도 생활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어쨌든 하루 숙박에 은화 두 닢. 금은동화가 각각 10배씩 차이가 나니까 대략 만 원정도 된다. 이만 한 방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렇게 쪼아대서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인간 진영 국가인 이곳 ‘아르키메시아’에서는 공식적으로 루리 같은 타 종족과 신분 보장이 안 된 사람의 경제 활동을 거의 제한한다.
물론 사창이나 도박, 마약 같은 지하산업은 몰래 행해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니, 으슥한 동네긴 하지만 도시 외곽 쪽도 아닌 이곳에서 이렇게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으니 알면서도 쉬쉬하는 건가.
“루리,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는데 혹시 몇 살이야?”
“올해 여든 한 살이에요.”
헉. 생각보다 훨씬 많잖아? 나이로만 치면 내 할머니뻘인데?
하긴, 엘프와 비슷한 종족이라고 생각하면 인간보다 나이가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앙고리아족 기준으로 81세면 어느 정도야? 초등학생? 어린이?”
“아뇨? 어른인데요? 성인이 된 지는 1년 밖에 안 되긴 했지만.”
“뭐?! 성인?”
“네, 왜요?”
동안인 건지, 아니면 원래 앙고리아족은 나이 대에 비해 어린건지.
어쨌든 성인이라는 소리지……? 그렇다면……, 나는 여성전용, 루리는 남성전ㅇ―
“아니지, 아니지. 대체 무슨 생각을!!! 우어어! 죽어라 이유하!”
“……?”
루리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신 차려라, 이유하.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다. 아무리 돈이 급하다고 해도 막노동을 할지언정, 어둠의 길로 들어가진 말자.
큭, 이게 다 엘리가 깨어나지 않아서 그래!
“제발 눈을 좀 떠라, 엘리! 깨어나면 잘해줄 테니까! 희망은 너 뿐이란 말이야!”
나는 축 늘어진 엘리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쥐면서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응? 왜?”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해진 채 놀란 토끼 눈으로 날 쳐다보는 루리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우와앙……. 로맨틱해요. 두 분, 연인이셨구나아.”
루리가 감동받은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젠장, 눈에 미러볼이라도 달았냐. 겁나 빤짝거리면서 돌아가네.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거든! 그리고 애인은 더더욱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로리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엘리가 오리지널 모습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 반하거나 사랑에 빠질 일 없어! 내 이상형은 오리지날 엘리야!
“콜록, 콜록……! 으음……. 이곳은……?”
내 간절한 바람이 그녀에게 들린 걸까? 엘리가 천천히 눈을 뜨며 정신을 되찾았다.
“엘리, 괜찮아?!”
“엘리 님! 정신이 드세요?”
다행이다. 우리 셋 중에 그나마 다재다능한 능력자는 이 녀석 밖에 없었는데…….
나는 우선 그녀의 이마에 손등을 갖다 대어 체온부터 확인했다.
“음……. 아직 미열은 남아있는 것 같네. 얼굴도 꽤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무슨…… 짓이냐. 어서 이 손, 치우거라.”
야릇하게 보일 정도로 눈을 반쯤 가냘프게 뜬 엘리가 내 손을 힘겹게 떼어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여전히 까칠한 녀석일세. 뭐, 그래도 다행이 눈을 떴으니까 이해해줄게.”
“……흐응.”
“미련하긴. 아프면 아프다 했어야지. 근데 드래곤이 아프기도 하는 거였어?”
“알게 뭐냐.”
미간을 찌푸린 엘리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눈마저 감으며 외면했다.
루리 녀석은 이 상황을 해쭉이며 드라마 보는 것 마냥 쳐다보고나 있고.
―젠장. 이쁘게 봐주려고 해도 이 모양이니? 휴우... 참자, 참아.
“그나저나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어, 엘리. 무리인 줄은 알겠지만. ……움직일 수 있겠어?”
쿵!
“어이―! 시간 됐으니까 어서 방 빼라!”
“들었다시피 쪼잔한 주인장께서 방을 빼라고 해서 말이지.”
이딴 냄새나고 습한 마구간 방을 누가 또 쓴다고 저렇게 재촉해대는지. 이세계에서도 갑의 갑질은 끊이질 않는구만.
“흥, 얕보여도 한참 얕보였군. 드래곤의 회복력을 무시하지 말거라.”
엘리가 졸린 눈과 헝클어진 머리로 이불을 박차고 상체를 일으켰다.
뻔히 저렇게 피곤한 모습이 눈에 다 티가 나는데, 애써 아닌 척 하는 행동이 제법 귀엽긴 하다.
“그보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냐. 인간. 이 몸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겠지?”
놀고먹기만 한다니. 자기를 간호해준 사람 앞에서 매도를 해도 참. 방금 전 귀엽다고 한 거 취소!
―엘리는 반대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루리의 부모님을 구할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러기 위해 그녀를 설득하려면…….
“우선 이 방은 루리 덕분에 얻을 수 있었어.”
“대단한 건 아닌데……. 미, 민망해요.”
쑥스러워 하는 루리를 엘리가 지그시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결국 그런 선택을 한 것이냐. ――어쩔 수 없구나, 빚을 졌으니…….”
암,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역시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전에도 그녀에게 백두산이 어디인지 알려줬을 때 굳이 뭔가를 바라고 한 건 아닌데도―실은 얼떨결에 말해준 건데도― 내게 선심을 베푼답시고 소원을 말하라고 했었지.
‘드래곤의 자존심’이라는 건가, 엘리는 빚을 지면 꼭 갚으려는 성격인 것 같다.
예의 바른 녀석 ……은 아니지만 이런 점을 보면 역시 나쁘기만 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
“잘 생각했어, 엘ㄹ――”
“―단, 조건이 있다.”
쳇,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다니. 그래, 그 조건이 뭔지나 한번 들어보자.
“너도 느꼈겠지.”
“응? 뭐를?”
“이곳 세상은 네게는 너무 위험하다. 절대로 무리도 하지 말고 엉뚱한 행동으로 죽음을 자처하지 말거라. 절대, 죽으면 안 된다.”
뭐야, 난 또 뭐라고. 어차피 자기가 죽이는 거 아니면 죽지도 못하게 마법까지 걸어놨으면서.
“내가 널 죽이기 전까진 다른 놈들한테 절대 죽지 마라. 카카로트.”라는 거냐? 츤데레의 원조 대사를 날리는구만.
“알았어. 약속할게. 죽을 땐 네 손에 죽는 거로 하지 뭐.”
“농담 하지 마라. 절대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해라.”
엘리는 또렷하게 뜬 단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엘리가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며 이렇게 까지 얘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내 시선이 그녀의 보랏빛 성운이 뿌려진 듯 깊고 깊은 동공을 통하자, 새카만 우주 공간에 빠진 듯한 공허함이 느껴진다.
그 드넓은 우주 공간은 너무나도 차갑고 슬픈, 행복 따위 세포 하나 만큼조차도 없는 공허한 공간이었다.
―어쩐지 농담으로 대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이었다.
“응. 무리하지 않을게.”
나는 이불을 움켜쥔 엘리의 손바닥을 펴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다 보면 무리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