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2차 성전(聖戰)’으로 죽음의 고비를 겪었던 그때 이후, 이런 적은 처음 있는 일.
우리 드래곤은 태어난 지 500년, 헤츨링을 지나 성체가 되기 시작하면 점차 운용할 수 있는 마나가 무한에 가깝게 넘쳐난다.
그래서 완전한 성장을 이룬 웜에 이르러서는 마력으로써 외부의 병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내부의 병은 미분하여 배출함으로써 모든 병과 독에 면역을 가진다.
분명이 그럴 터인데…….
“큭, 이곳은……?”
눈을 떠보니 그곳은 황량한 사막 협곡이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느낌.
“아아. 그러고 보니, 어리석은 그 인간 녀석이 메르제비츠가 준 기계를 막 누르는 바람에…….”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기계에서 시전된 마법에 의해 초월이동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생김새는 북미대륙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저 협곡 아래에 흐르고 있는 용암천은 지구가 아님을 손쉽게 시사한다.
둥지를 틀 곳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닐 때에도 본 적 없는 곳.
“설마, 초월을 넘어 차원이동인가……. 메르제비츠 녀석, 무슨 의도지, 대체.”
벗이라고 생각했던 그 녀석이 나를 차원이동 시킨 데에는 필시 둘 중 하나의 의도일 것이다.
하나는 무슨 목적이 있어 나를 배신했거나,
다른 하나는 나를 차원이동 시키면서까지 보호할 필요가 있었거나.
“녀석의 성격이나 정황을 미루어봤을 때는 아마도 전자 쪽일 가능성이 크다.”
1, 2차 성전으로 인해 지구가 피폐해지자 드래곤들끼리 협의를 거쳐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협약을 했었고, 드래곤 간의 경쟁이나 혈투 역시 금지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대부분의 드래곤은 전쟁보다는 비교적 건전한 유희를 연구해 즐기는 삶을 택하는 일이 많아졌다.
“차원이동이라니……. 어떠한 드래곤도 실현할 생각해본 적 없는 마법을……. 그 녀석,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툭.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응?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내게 어처구니없는 소원을 빌었던 그 멍청한 인간이로군. 역시 같이 이곳에 오게 된 건가.
“――.”
어쩐지 목소리가 미묘하게 앳된 것이 거슬리더라니…….
쓰러져있는 이 인간을 내려다보면서 함께 보인 내 손발을 통해, 심증으로만 여겼던 사실이 확증으로 변모했다.
정상적인 폴리모프 상태가 아니다. 헤츨링, 혹은 쥬베나일 초기 수준으로 돌아간 작고 가벼운 몸뚱이.
외관 뿐 아니라 느껴지는 부족한 마력이 그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차원이동의 무슨 부작용 때문인지 폴리모프가 해제조차 되지 않아 마나 운용의 한계가 더 크게 느껴진다.
“몸이 어려진 만큼, 마나게이트가 작아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가.”
좋게 봐줘야 정상 상태의 1/3정도인가.
제아무리 강력한 마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게이트가 없거나 닫혀있으면 무용지물. 그런데 마력조차 약해져있다.
다행히 기억에 대한 손상은 없기 때문에 마법의 질로써 약해진 마력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는 말은, 이 인간에게 걸려있는 ‘형상기억’ 마법의 효과 역시 장담할 수 없겠지.
아마도 마법 발동을 유지하기 위한 마력은 사라져서 부활은 기능하지 않을 테고, 형상기억을 걸기 위한 조건으로 나눠야 하는 기본 마력만이 그의 몸에 남아있을 터.
이곳은 이 인간에겐 꽤나 위험한 곳인 듯한데…….
“뭐, 내게 죽으나 약육강식의 야생에서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편하게 보내주는 게 드래곤에게 엮인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배려겠군.”
이 인간이 영면하면 분명 기본마력 분만큼은 되돌아올 것이고, 형상기억은 최상위클래스 마법이니 1천살 정도 때의 마력은 회복할 수 있을지도.
―나는 그를 편하게 보내주기 위해 마력을 뿜어내어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안…… 돼…….”
“잠꼬대인가. 이런 상황에서 잘도 자는 구나.”
자세히 보니, 왜인지 모르게 조금 ‘그’와 닮았다. 그와는 신장에서부터 꽤 차이가 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했는데…….
“내 도, 동생. ……려줘. 돌려줘…….”
악몽? 동생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건가.
“―리야! ……나야, 유하……. 드디어 만났――”
‘유하’라……. 이 인간의 이름인가 보군.
“흠…….”
메르제비츠의 기계를 이 인간이 마지막으로 손에 쥐고 있었으니, 혹시 무언가 기억하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굳이 급하게 죽일 필요는 없을지도.
“인간, 일어나거라.”
“으응……. 더 자게 냅둬…….”
……아무리 그래도 인간 따위를 드래곤이 손으로 깨워서는 자존심의 손해가 막심하군.
“어서 일어나거라.”
“응……? ……흰색이다.”
* * *
드래곤은 냉혈하며, 합리적이고, 타인에게 무심하다.
그것은 그 어떤 종족이 드래곤 앞에 나타난다 한들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바라고 싶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종족보다 길고 긴 수명.
천재지변도 그 단단하고 질긴 피부 앞에서는 어쩌지 못할 만큼 강인한 생명력.
동족상잔이 아니라면 그 어떤 생명체도 감당할 수 없는 막강한 마력과 그로 인해 다른 종족으로 하여금 드높아지는 드래곤에 대한 경외심.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우리 드래곤들은 원한다면 부와 명예, 그 외에도 거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드래곤에겐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필요하면 빼앗고, 만에 하나 빼앗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아쉬울 것 하나 없다.
―그것이 드래곤이 사는 방식이다.
“크아악――! 아파……, 아파……!”
하찮고,
잘난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과거 기사나 현자들처럼 강인하지도 않으며,
감히 드래곤에게 막말이나 내뱉는,
내 앞에서도 공포는커녕 육욕이나 탐하는 인간이다.
―죽어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조금 손을 봐주기는 했어도 화산지대를 벗어날 때까지 살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굳이 살릴 필요가 있을까.
메르제비츠의 기계에 대한 정보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다가 오히려 이 인간이 영면하면 형상기억이 걸려있는 만큼 분의 기본 마력은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다 수월하게 이쪽 세계의 곳곳을 누비며 지구로 돌아가는 단서를 찾는 것 역시 어렵지는 않을 터.
메르제비츠의 기계를 찾거나, 혹은 최악의 경우 시간을 들여 차원이동에 대한 마법을 연구하여 돌아가면 된다.
시간은 많다.
―냉혈하고, 합리적이고, 무심한 드래곤에게 이 이상 이 인간에게 깊게 생각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이 인간이 영면하면, 힘의 일부를 되찾아, 지구에 되돌아갈 단서를 찾는다. 그것이 가장 드래곤다운 선택.”
‘드래곤인 너에겐 하찮게 생각될 지라도 저들에겐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너와 상관없는 사람일지라도 있는 힘을 다해 도와줘.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발데르……. 요즘 갑자기 다시 그이의 목소리가…….
천 년이 넘는 세월로도 지울 수 없는 당신의 각인인 거야?
한동안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잊은 줄 알았는데…….
“하지만, 발데르. 난 이미 행복해질 수 없어.”
“크흐흐윽. 살려줘…… 누가, 좀…….”
울부짖는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다시 또 지끈거려온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그의 목소리를 외면하기 쉽지 않다.
마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난날의 후회를 다시 반복할 셈이냐? 엘리시아.
“그렇지만 마력이 약해진 지금, 자상도 골절도 아닌 골육의 완전한 재생을 위해서는 ‘르쉬케’와의 계약이 필요해.”
‘르쉬케’는 찬희(燦犧)의 신, ‘람그라시아’의 대리자.
신의 은총을 받은 우리 드래곤들은 그 자체로도 강하기에 대리자와의 계약을 사용할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 * *
감히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다니……. 죽고 싶어서 정신이 나간 건가?
설마, 고작 하의가 없어서 나를 도발해 스스로 죽어 형상기억을 발동시키려고 한 건가?
이 얼마나 어리석고 엉뚱한 인간인가?
“크응……. 방금 전에 또 죽여 놓고 선심 쓰는 척 하지 말아줄래……?”
“본인이 자초한 일인 것은 생각 못하는 우매한 인간이로구나. 아니면 안하무인인 것이냐?”
정말이지 어이가 없고 한심한 녀석이다. 그렇지만―
“왜 다시 살아나도 계속 강제 하의탈의 상태여야 하는 건데?! 이딴 이파리 쪼가리로 언제까지고 불안하게 살 수는 없다고!”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막 나오게 한다.
“크큭. 그거야, 이 몸이 어려지는 바람에 마력도 줄었으니 기능적으로도 감소하는 당연한 이치인 것을.”
물론 거짓말이다. 하의가 돌아오지 않은 건 형상기억이 때문이 아니라 내 치유마법 때문이니까.
* * *
배고픔에 그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조금만 더 가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일어나거라. 네 말대로 저쪽 숲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반쯤 쓰러지듯이 간신히 팔로 상체를 버티고 있는 그에게 다가간다.
“정말……. 철없는 네놈 때문에 다시 절로 늙는 기분이로구나.”
“미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자,”
“……어?”
축 쳐져서 고개를 떨군 그의 시야로 손을 내밀자, 그가 나의 손을 잡는다.
“아, 고, 고마워.”
고작 이 정도에도 쉽게 쓰러지는 나약함.
하지만 왠지 그 마음속까지 한없이 유약하진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의 따뜻한 손이 분명히 그렇다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여전히 피곤한 기색은 남아있었지만 그가 구원받은 듯한 얼굴로 내 앞으로 다가온다.
감사라도 표현하려는―
―덥썩.
“……!”
그가 나를 안듯이 허리를 받치고는 내 아랫입술을 그의 뜨거운 입 안으로 포개어 넣었다.
―이 행동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달콤하다아. 이건 무슨 열매지?”
그가 나의 입술을 혀로 할짝거리며 맛보고는 멋대로 지껄였다.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의 익숙한 입놀림에 잠시 놀랐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행동은 쉽게 용서하기가 힘들 것 같다.
“미친놈.”
* * *
흥분한 나머지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이가 손버릇 발버릇을 조심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쥐어 짜내듯이 모든 마력을 고갈시켜 죽기 직전의 그를 치유한다.
본래 리커버리는 발마(拔魔)하는 과정이 복잡할 뿐 마력이 많이 드는 것은 아닌데도……. ‘계약’을 사용하고도 얼마 쉬지 못한 지금의 상태에선 부담이다.
“몸이 어려진 영향이 체감 상으론 더 크게 느껴져…….”
옆에 있는 이 아이는 이 상황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다가 내 마법을 보고 꽤나 신기해하는 눈치다.
근데 이제 치료는 거의 끝나 가는데, 언제쯤―
“느흐어어어!”
때마침 정신을 차리는군.
“깨어났느냐.”
“괘, 괜찮으세요?”
“얘기는 이 아이를 통해 들었다. 이 몸이 너를 오해했더구나. 미안하다.”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장땡?!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도덕성이야? 쳇, 괘씸죄 추가로 사형이다! 땅땅땅!”
은혜도 모르는 녀석. 그냥 내버려 둘걸 그랬나.
“평소 행실이 낳은 결과라고는 생각을 못하니, 정말이지 언제 생각해도 우매한 녀석이로구나.”
녀석, 속으로 또 뭔가 불평하고 있군. 분명 또 로리니 뭐니 하고 있겠지.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정말로 도와주시는 건가요, 모험가님? 벌써 제 생명의 은인들이신데……. 게다가 전 그 은혜를 갚을 능력도 없고…….”
이 아이의 사연. 어쩐지 좋은 예감은 들지 않는다.
“유감이지만 나와 이 녀석은 어서 떠나야 하―”
“물론이지. 분명 도와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잠깐―”
바보 같은 녀석이. 이곳에 와서만 벌써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너도 루리의 사연을 들었다며? 근데 어떻게 모르는 척 할 수 있어? 아까도 말했잖아! 인간이기에 돕는 건 당연하다고. 난 인간답게 살고 싶어!”
“쓸데없는…… 오지랖일 뿐이다. 그 시간에 어서 지구로 돌아갈 단서나 찾는 게―”
아아. 또 머리가 아파온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잖아.”
‘――우리에겐 시간이 많잖아, 엘리.’
두통이 심해져 그의 목소리가 이중으로 겹쳐 들린다.
“시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를 말려야 하는데……. 머리를 강타하는 고통 때문에 제대로 반박을 하기 힘들다.
두통과 어지러움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역시 ‘계약’ 때문에 무리를 많이 한 건가.
“가면 안…… 돼…….”
점점 앞으로 기울어지는 흐릿한 시야에, 그가 멀어지는 형상이 보인다.
―시야가 점점 아득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