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앞에서 솟구쳐 오르는 용암이 내뿜는 폭발음에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으, 으아아아―――!!”
차디찬 겨울바람이 뼛속 깊숙이 스며들 듯, 내장부터 피부까지 온몸에 배어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때리며 경고한다.
하천처럼 흐르고 있던 용암천이 갈라지면서 솟아나온 마그마는, 마치 핵폭탄이 버섯구름을 피어내는 것처럼 하늘로 마구마구 쏟아져 나왔다.
“흐아, 뜨뜨뜨! 사, 사람 살려……!”
우리가 있던 고지대의 바닥으로 앞서 솟구쳤던 마그마 덩이들이 떨어지면서 주변을 불태울 듯이 온도를 높였다.
사막같이 황량한 땅에서도 굳세게 자란 자그마한 풀잎들이 부질없이 공기 중의 재로 변모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뿜어냈다.
―쿠아아!
“흐억! 오, 온다아……!”
소위 ‘메테오’라고 할 수 있을만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마그마 덩이가 폭발하듯이 솟았고, 이쪽을 향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주, 죽는다…….”
―잠깐,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잖아?!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거지? 이렇게 겁먹을 필요가 없는데.
엘리가 걸었던 ‘형상기억’이라는 부활마법.
확실히 그것은 내게 그녀에 대한 공포심과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기분 나쁜 마법이었지만, 지금 내게 딱 필요한 마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딱히 죽음이라는 것이 무섭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어차피 죽어도 이곳에서 다시 살아나면―
“―가만, 그러고 보니 이런 대서 죽으면 다시 살아나도 소용없는 거 아냐?!”
저런 용암덩이가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면, 다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마그마가 화산암이 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잿더미가 될 것이 분명했다.
끝장이다. 성불도 못하고 용암 속에서 죽었다 살아나는 상상을 하니 지독하게 소름이 끼친다.
나는 눈을 꼭 감고 기도했다.
―만에 하나라도 운 좋게 성불해서 다시 태어나면 의자왕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하, 내 짧은 인생. 결국 이렇게 영원한 동정으로 마감이로구나.”
―라며 한탄하던 찰나,
“시끄럽다. 조용하지 못하겠느냐.”
“읭……? 에, 엘리?”
“제아무리 어려졌어도 이 몸은 드래곤이니라. 용암으로 목욕을 하고 빙하를 맨입으로 씹어 먹으며 해구 깊은 곳의 괴물 같은 심해어를 양식으로 삼고 태풍 위에서 낮잠을 잔다는 소문이 괜히 있는 줄 아느냐?”
―허세가 가득하다는 소문도 알고는 있지만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실화는 아니겠지.
그녀는 손을 뻗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마그마를 막아냈다.
그러고 나서 전에 나를 가두었었던 에메랄드빛 벽이 생성되었고, 우리를 구체로 감쌌다.
“그래, 이게 말로만 듣던 ‘배리어’라는 거구나?! 대, 대단해……!”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움직일 수 있겠느냐? ――이런…….”
엘리가 고개를 돌려서 내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자빠진 몸을 일으키려 먼저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못 볼 거라도 본 거 마냥.
“……어어?”
발이 움직이질 않는다. 왜지?
곧장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하체 쪽으로 시선을 옮겨보았다.
“―――.”
―그녀가 손을 뻗어 용암을 막을 때 흩어져 떨어진 용암이 흘러 나의 하반신을 좀먹고 있었다.
“흐아아악――!!”
마그마에서는 타는 고기냄새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무심하게 내 하체를 쓸고 지나갔다.
정신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쇼크와 함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뒤늦게 밀려온다.
눈은 뜨고 있지만 시야에 거대한 태양의 잔상이 떠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파, 아파――! 아프다고! 흐아아악――!!”
―차라리 죽여줘……! 이렇게나 아픈데……! 왜 죽질 않는 거야, 대체!
소리치고 싶어도 입에서는 단말마적 비명밖에 나오질 않는다.
“……어쩔 수 없구나.”
계속해 폭발하는 분화구의 천둥 같은 소리와 나의 비명이 혼잡하게 뒤섞이는 틈에서 희미하게 엘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놓치지 않게 팔로라도 꽉 잡고 있거라.”
그 다음 순간, 몸이 공중에 붕―하고 뜬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잠시나마 고통에서 해방되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죽을 것만 같은 아픔 때문에 뜨지 못했던 눈을 살짝 떠보니 지근거리에 그녀의 앳된 얼굴이 보였다.
“엘리……?”
―나는 배리어를 펼친 상태로 사뿐사뿐 분화구 지대의 봉우리를 밟으며 벗어나는 엘리의 두 팔에 안긴 채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 * *
―으, 으음…….
대체 하루에 몇 번을 정신을 잃고 깨어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또 다시 눈은 떠진다.
죽어서 깨어난 건지 아니면 아직 살아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저 멀리 빽빽하고 울창한 숲이 내려다보이는, 초원으로 이루어진 고지대의 언덕이었다.
“시원해…….”
시원하고 쾌적한 바람이 불어와 내 이마를 식혀주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멀리 숲이 보이는 것도 그렇고, 분화구의 더운 바람과 삭막한 사막협곡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용암에 빠져 죽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
기억에 의하면 분명 내 하반신은 송두리째 날아갔을 텐데……. 역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건가보구나.
“그러고 보니 엘리는?”
―허벅지가 무거워.
이번에야말로 상체를 제대로 일으켜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지는 허벅지 쪽을 보니―
“……이 로리 녀석, 왜 하필 내 허벅지를 베개 삼아 자는 거냐.”
곤히 잠든 엘리의 얼굴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세상의 평화를 다 가진듯한 표정. 앳된 얼굴과 뽀얀 피부가 어떤 기억을 상기시킨다.
“……닮았어. 아니, 외모 자체는 이 녀석이 더 예쁘긴 하지만……. ――쳇.”
드래곤인 이상 객관적 미모 하나만큼은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꼬맹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가.
살짝 헝클어진 듯한 보드라운 은발이 맨살의 내 허벅지를 간지럽힌다.
맨살.
그래, 맨살.
―잠깐만, 맨살이라고?
“끼요오오오옷!!?”
허리 아래쪽으로 모든 피부에 초원 잔디의 가슬가슬한 감각이 느껴진다.
―나, 왜 하체만 발가벗고 있는 거냐!? 바지는!? 어디 갔지?
게다가 왜 이 로리는 그런 걸 아랑곳 않고 내 허벅지를 베개 삼는 건데? 민망하지도 않은 거냐!!!
나보고 무슨 색골 어쩌구 하더니, 정작 본인은 대체 뭐하는 짓인 건데? 아앙?!
“꾸호오오올!!! 끼요오오오올!!!”
주체할 수 없는 민망함이 하체를 엄습하자 내 입에서는 나도 예상하지 못한 괴상하고 날카로운 비명이 일대를 쿡쿡 찔러댔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아무 감각이 없는 게 나아…….
그래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중요(?) 부위는 큰 이파리들로 엮어 만든 원시부족 치마 같은 것이 입혀져서 가려져있었다는 것이다.
“거참, 조용하지 못하겠느냐……!”
내가 요상한 소리를 낼 때마다 이마에 힘줄을 하나, 둘 세우던 엘리가 결국 인상을 찌푸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를 냈다.
―그렇게 화낸다고 해도 이 민망함을 멈출까보냐!
“꾸어어어! 꺄우울!”
“차라리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낫겠다!”
나는 이 커다란 이파리 치마를 목숨처럼 챙겨서 온 몸을 웅크려 최대한 가렸다.
아무리 내가 설렘이나 이성적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꼬맹이라고 할지라도 일단은 생물학적으론 여자다. 에…… 드래곤이니까 여자가 아니라 암컷이라고 말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순결을 뺏길 순 없다고…….”
얼굴이 후끈후끈 한 걸 보니 머리끝까지 달아올라 빨개진 것이 분명하다.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란 말인가! 그나마 이 치마가 없었으면 난 벌써 순결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코딱지만한 코끼리로 무슨 엄살을 그렇게 떠느냐. 마력이 약해져 제대로 재생이 되었을지 어떨지 모르니 어서 움직여나 보거라.”
“다리는 잘 움직이긴 하는데…….”
가만, 지금 뭐라 그랬냐? 코딱지만 한 코끼리……?!
“설마……! 봤어?!”
“하암――. 네놈이 지금 입고 있는 그것,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느냐.”
엘리는 피곤이 덜 가셨는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한 번 쩌억 내뱉고는 그대로 내가 입고 있는 치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앙대해에……!”
만 19년간 강제로 지켜져 온 내 순결이, 이렇게 원치 않는 방식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이 찌끄만 꼬맹이에게!
―젠장하아알!
“어떻게 할 거야, 내 순결 돌려줘――!”
멘탈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나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엘리의 멱살을 손으로 붙들고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이,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뭐하는 짓거리냐!”
아앙― 와그작!
그녀가 멱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콱 깨물었다.
“끄아아악――! 깨무는 건 반칙이잖아!”
“그러게 누가 그렇게 난리 치라고 했느냐. 뭐 이렇게 날 뛰는 걸 보아하니 중요한 곳까지 재생은 잘 된 것 같구나. 네놈이 말하는 이상한 기준의 순결은 빼앗겼을지언정, 영원히 동정으로는 안 남을 테니 내게 고마워해라.”
“으어어! 닥쳐! 닥치란 말이야!”
펄럭펄럭.
―아……?
아슬아슬하게 묶여져 있던 이파리 치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명 제대로 고정되어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쉽게 안 벗겨지게 만든 거 아니었어……?”
“네놈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대니 고정쇠가 안 떨어지고 배기겠느냐. 꼴좋다, 킥.”
대체 어떤 식으로 묶어놨길래 이 정도 가지고 고정쇠가 떨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의 말대로 작은 나무막대기가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차라리 날 죽여줘……. 쪽팔려……. 흐어엉――!”
“미안하구나. 네놈을 살린다고 조금 무리했더니 피곤해서 말이야. 풋―!”
“풋? 푸우우웃―?! 지금 비웃었냐!”
“――하하하! 별로 볼 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것이냐. 그 아기 코끼리를 봐도 민망하기는커녕 귀여워 죽겠는데 말이다, 크큭!”
엘리는 배꼽을 잡더니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땅을 치면서 거하게 웃었다.
―여자가 말이야, 저렇게 지 속옷이 적나라하게 다 보이는지도 모르고 조신하지 못하게 웃기나 하고 말이야!
“분명히 경고하는데, 너 그렇게 자꾸 웃다가 후회한다.”
“하하하……! 정말 웃긴 녀석이로구나, 너. 크크크―”
이젠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냐. 지금 누구는 일생일대에서 가장 심각한 상황인데. 도저히 못 참아.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고.
―어디보자, 초원이라 강아지풀도 많고 말이지.
나는 곧바로 여기저기서 강아지풀만 잔뜩 뜯어서 한대 모아 묶었다.
엘리는 아직까지도 발라당 누워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야, 너 간지럼 좀 타지?”
“―하하하…… 응? 뭐, 뭐?!”
‘간지럼’이라는 말에 엘리가 놀라는 것을 보니 내 추측이 맞는 것 같다.
그녀가 간지럼을 잘 탈거라고 생각한 것은, 이곳에 오기 전 그녀의 골반쯤을 건드렸을 때 그녀가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때문이었다.
골반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옆구리 쪽에 조금 더 가까웠기 때문에, 그렇게나 민감하게 움찔거리며 나를 한대 팬 것은 분명 간지럼을 잘 타기 때문일 것이다.
난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강아지풀떼기들을 그녀의 발바닥에 갖다 대고 문질렀다.
“꺄――악!”
좋아, 적중했다. 어디 맛 좀 봐라.
간질간질간질.
“아흣……! 그, 그만……!”
“흐흐. 그러게 내가 그만 웃으라고 그랬지? 복수다, 복수.”
아예 나는 묶었던 강아지풀을 두 뭉텅이로 나눠서 양 손에 쥐고 그녀의 두 맨발바닥을 공략했다.
이참에 그녀를 괴롭히다가 혹시라도 날 죽여주기라도 한다면 완전히 땡큐인 것이다.
―보아하니 날 죽게 냅두지 않고 하체를 재생시킨 모양인데, 그래서 지금 나는 이렇게 ‘형상기억’을 하지 못하고 강제 하의 실종을 하게 된 거 아니겠냐! 형상기억 때에는 부러진 안경이고 찢어진 옷이고 다 돌아왔었는데!
“꺄흑……! 으히히, 하, 하지 말거라아……! 간지러……!”
엘리가 어떻게든 간지럼을 피하려고 몸을 배배 꼬면서 거부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간지럼을 공략하기에 아주 최적화된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지.
발바닥을 가리면 무릎! 무릎을 손으로 가리면 목! 이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웅크린다면 허벅지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꽥!!!”
‘원빵맨’의 주먹이 그렇게 세다더니. 악역들의 기분을 좀 알 것 같군.
―그녀의 참다못한 주먹질에 고개가 꺾이듯이 휙 돌아가고, 수 미터를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