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공간감은 머릿속뿐만 아니라 온몸 전체로 퍼져있다.
“이제 좀 공포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눈을 뜬 그곳에는 나를 날카롭게 비웃는 그녀의 얼굴이 내려다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이 안나.
몸이 너무 뻐근하다.
“저, 저기……, 저 몇 시간동안 잠들어있었어요?”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반개했다.
그리고는 멱살을 잡고 있던 내 얼굴을 끌어당겨 자신의 머리로 받고는 그대로 나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커헉―!”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맨땅에 등을 처박아서인지 폐가 터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콜록, 콜록, 콜록!”
“네 녀석이 나에 대한 경외심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도록 수도 없이 죽였다. 그런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냐?”
젠장, 대체 무슨 짓인데! 수도 없이 죽였다는 말은 대체 무슨 소리고!
―라고 생각하며 위화감이 느껴지는 주변을 둘러 본 순간.
“우엑! 우에엑――!”
위의 역류를 자극하는 지독한 피비린내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모를 피가 강을 이뤄 범람한 듯이 공터의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 이 피는 대체……?”
“뭐긴, 말했지 않느냐. 네놈을 수 없이 죽였다고.”
“그게 무슨 말인지…….”
그녀는 전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픽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네놈을 죽이고, 육신을 살린 뒤, 다시 죽이고 그렇게 수 없이 반복했다는 뜻이다. 이제 알겠느냐?”
오싹――.
그녀의 말을 듣고는 머리로는 믿을 수 없었지만, 온몸에 트라우마처럼 새겨진 죽음에 대한 공포의 대한 감각이 알레르기처럼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오며 반응한다.
“흐, 흐아아악――!!!”
몸을 반쯤 일으켜 누워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귀신을 본 것처럼 질겁하며 뒤로 슬금슬금 도망가고 있었다.
그런 나를 그녀가 개미를 가지고 노는 철없는 어린애처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호오. 드디어 공포를 절감하나 보구나. 이제 내가 좀 무서우냐? 크큭.”
그녀가 만족한다는 듯이 그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비열한 미소를 지었고, 손을 뻗어 무언가 연두색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만들어 내 주변을 감쌌다.
기어가듯이 도망가던 나는 그 공간의 벽에 부딪쳐 가로막혔다.
“대, 대체 뭐야, 이건!? 도망갈 수가 없어……!”
그녀가 벽을 관통하면서 공간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좌절하고 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상체를 숙여 보드라운 검지로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겁에 질려 도망가는 꼴이 마치 주인에게 학대당하는 개와도 같구나. 후훗.”
앞으로 기울인 상체 때문에 그녀의 옷 사이로 풍만한 가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울지도 모르는 계곡.
심장이 터질듯하게 두근거리고 그녀를 차지하고 싶다는 나의 본능적 욕망이 미쳐 날뛴다.
“하악……!”
“…….”
짜악―!
그녀가 내 시선이 대놓고 향하는 곳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질색한 얼굴로 내 뺨에 손바닥을 한 대 후려갈겼다.
“정말 네놈 같이 색에 미친 녀석은 3천 년을 가까이 살면서 처음이다……! 죽음보다도 나의 몸이 더 좋다는 말이냐? 믿을 수가 없구나.”
그녀의 얼얼한 따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나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런 표정마저도 너무나도 아름답다. 내가 아니라 어떤 남자라도 저 여신을 독차지할 수 있다면 죽음 따위 상관 안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녀의 청순함과 관능적인 미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외모는 난다 긴다 하는 여배우들 몇 트럭을 갖다 놔도 절대 못 이길 수준이다.
게다가 저런 수수한 원피스만으로도 오감을 자극하는 듯한 성적 어필을 하―
“―하얀색…….”
젠장, 이렇게 경멸당하면서도 시폰 사이로 비치는 ‘은밀한 것’이 눈에 들어오는 내 자신이 싫어진다.
―하지만, 이 각도에서, 본능적으로 눈에 들어와 버린 걸 어떻게 하라구!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남자들이라면 필시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눈놀림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빌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그녀의 정체가 대체 뭔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존적인 본능이었다.
그녀를 보고 두근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일어나라.”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잠시 고심하더니 얼음장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고, 나는 거부할 생각조차 들지 못했다.
마치 여왕에게 복종하는 신하. 혹은, 주인에게 꼬리를 내리는 개가 된 느낌이었다.
“네, 네!”
이젠 그녀가 백룡파 양아치든, 괴물이든, 뭐든 좋다. 일단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간만에 세상에 나왔으니, 이번엔 가증스런 인간을 살육하는 즐거움을 잠깐 누린 것으로 끝내겠다. 꺼져라.”
“아이고, 당치 않으십니다. 제 능력 범위 내 해드릴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겠습니다! 도, 돈이라도 드릴까요……?”
젠장! 그녀의 위압감에 쫄아서 적당히 얼버무리고 튀려는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뭐든 다 해드리겠다니,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하고 튀었어도 모자를 판에! 이유하, 이 겁쟁이 치킨 자식아!
“풋, 돈 따위.”
그녀는 다른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한 말투로 비웃었다.
“흐음――.”
그러고 나서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 고민하면서 비음을 길게 내었다.
“네놈이 정 그렇다면, 백두산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느냐? 벗을 만나려 하는데, 그곳은 오랜만이라 잘 모르겠구나.”
“배, 백두산이요……?”
“그래. 분명 제법 큰 화산일 텐데, 이 근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더구나.”
얼굴을 붉히며 정색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어느새 고개를 갸웃하며 곤란해 하는 표정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여신의 모습만이 남았다.
“부, 북쪽에, 북한 끝 중국과의 접경지역에 있는데. ……요.”
심장을 쥐어짜듯이 충격을 가하는 그녀의 성숙하면서도 귀여운 모습에 보호본능이 자극된 나는, 저도 모르게 그만 반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다.
“그래? 고맙구나.”
그녀가 옅은 미소로 내게 말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경멸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졌다.
“비록 이 몸이 가장 혐오하는 인간족이지만, 이제 보니 하찮기만 한 녀석은 아니로구나. 의외로 나의 흥미를 돋운 구석도 있고.”
그렇게 말하고 난 그녀는, 집채만 한 순백색의 드래곤으로 변신하고는 그 위엄에 걸 맞는 웅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의 본 모습을 본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이 모습을 보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인간은 손에 꼽을 정도니.”
……머엉.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렇지, 간만에 너 같이 드래곤에게 충성심을 보인 인간을 본 기분이다. 금방 다녀와서 네게 선심까지 베풀어 줄 테니 멀리 가있지 말거라. 어차피 도망가도 소용없겠지만.”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놓은 그녀…… 아니, 그 드래곤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폭풍을 휘몰아치더니 순식간에 하늘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 * *
드래곤.
그것은 신화를 비롯해 판타지 장르 등, 다양한 매체에서 빈번하게 나오는 전설의 동물.
나 같은 서브컬쳐 덕질러가 아니어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머릿속에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데 굳이 그 생김새를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그만큼 드래곤이란 존재는 흔히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아무도 그것이 실존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아, 물론 나를 제외한 ‘지구정복학과’ 학생들과 교수들 빼고.
“꿈……? 하하. 드래곤이라니.”
그래. 꿈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설 속의 동물이 존재한다고?
‘빅풋’이나 ‘예티’ 같은 영장류와 비슷한 생김새의 괴물이라면 그런대로 납득해주겠다. 하지만――
“드래곤은 너무 말이 안 되잖아.”
게다가 이 주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우욱……!”
의식을 주변으로 환기시키고 나니, 위산이 다시 또 올라올 것 같다.
나는 지금 분명 공터의 입구에 서있다. 그것도 발바닥이 찐득거릴 정도의 양의 피로 물든.
“우엑……!”
젠장. 이젠 더 이상 확인할 점심 메뉴도 없는데…….
한참을 헛구역질로 게워낸 뒤, 위산 맛 침을 닦아내고 생각을 해보았다.
백번 양보해서 아까 그게 진짜 드래곤이라고 치자.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죽이고 살리고 또 죽이고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했다.
죽었는데 그걸 다시 살려……? 아는 만화 중에 유일하게 그런 소재가 있긴 한데, 7개의 구슬을 모은 것도 아니고.
“제길, 개소리나 처하고 앉아있고. 빨리 깨어나라, 현실의 나.”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 지금 이 상황은 꿈이라는 것이 완벽한 판단.
그렇다면 이제 실천에 옮겨야할 행동은 하나다. 꿈을 깨기 위해 강한 충격을 주는 것.
“부서진 조각상 덕분에 마침 정신 나간 꿈에 신선한 쇼크를 줄 수 있는 모난 석재가 하나 있군.”
나는 곧바로 바윗돌 같은 석재 앞에 앉아서 고개를 뒤로 크게 젖혔다.
―이제 그만 깨자, 이유하!
콰직―.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으윽, 꿈인데도…… 아프……다……. 엄청……. 커윽……! 왜 이렇게…… 아프……. 빨리, 깨――”
때마침 어디선가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개미새끼 한 마리 잘 안 보이는 이 시각 이 동네에 사람이라니. 이 공터에서 뻘짓거리 한지 한 시간은 지난건가.
“――! 사, 사람이! ――쓰러져있――! 이 피는――?”
마치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채 듣는 소리처럼 먹먹하게 들린다. 이게 죽기 직전의 수중감……?
생전 느껴보지 못한 고통과 위화감에 문득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정말 죽는 거 아냐?
―아니야, 걱정 말자. 어차피 꿈일 테니까.
“――이죠? 여기 사람――! 빨리――! 그리고 경찰――.”
이봐요, 자꾸 그러면 왠지 진짜 같잖아. 불안하게 하지 말라구요. 저 안 죽는 다니까요? 이건 꿈이라니까요?
“―――!”
점점 목소리와 시야가 흐릿해진다. 며칠 밤을 샌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진다.
――――.
짧은 주기의 사이렌소리.
의식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엠뷸런스가 날카롭게 삐악거리는 소리는 그 끈을 놓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내 무언가 들것에 실리는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시야는 장님이 된 듯이 어두컴컴해졌지만, 사이렌 소리에 예민해진 청각 덕분에 주변의 소리는 들렸다.
“이 피바다는 대체 뭐야……. 서(署)에 추가 인력요청하고, 혹시 모르니 경찰특공대 지원도 요청해봐. 단순 살인이 아니라 테러일 수도 있어.”
“네, 소장님.”
잠깐만요, 그러실 필요 없――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지만 얼굴에 갑자기 씌워진 호흡마스크 때문에 이 말이 들리는 일은 없었다.
―다시 나른해진다.
* * *
창공을 가르는 거대한 날개.
한 번 날갯짓을 펄럭일 때마다 수십 킬로미터를 총알같이 날아가던 순백의 드래곤이 그 시야를 굴려 구름 밑을 보고는 속력을 낮춘다.
“분명 이 쯤이 그 인간이 말한 북쪽의 접경지역인 것 같은데……. ‘메르제비츠’의 둥지에서 그를 보는 건 천오백년도 더 전이라 잘 기억이 안 나는군.”
빽빽한 산맥의 낮은 하늘을 ‘8’자로 크게 배회하며 백두산을 찾는 드래곤의 시야에 문득 번쩍임이 들어온다.
“저건가. 달빛이 비치는 거대한 호수……. 그래, 드디어 기억이 난다.”
슈아악―.
드래곤은 날개를 몸통에 가까이 붙인 채 수직으로 빠르게 낙하하며 천지 쪽에 다다랐다.
천지의 수면에 가까워지자,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하얀 빛이 몸 전체를 감싸더니, 드래곤 형태의 크기가 점차 작아지면서 여신 같은 외모의 그 모습이 드러난다.
잔잔한 호수 위에 작은 파동이 생기며 그녀의 맨발이 수면 위에 닿았다.
“기억에 의하면 그의 둥지는 동굴 깊은 곳이었으니, 산 중턱으로 내려가야겠군.”
―그녀의 사뿐한 발걸음이 호수에서 화구의 봉우리로, 봉우리에서 둔덕으로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