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오늘 강의는 이걸로 끝내고, 다음 주는 최종정리만 하는 걸로 하죠. 그 다음 주가 기말고사니까요. 그럼, 다음 주에 봅시다.”
항상 리얼한 악마뿔 머리띠를 하고 다니는, 엄청난 미남이지만 취향이 좀 독특한 교수님이 수업 종료를 알렸다.
어쨌거나 교수님의 그 대사는 강의 책상과 내 뺨따구의 오랜 사투 끝에 얻은 값진 결과물이었다.
‘지구정복학개론’.
대체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수업인지 난 모른다. 1학기 내내 학교는 나의 여관이고 수업시간은 수면시간일 뿐이었으니.
“야, 아까 교수님이 해준 9세기에 있었던 사랑이야기 진짜 슬프지 않냐?”
“사랑하는 드래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남자의 이야기? 로맨틱해…….”
어이, 설마 그런 구라를 믿는 건 아니겠지? 순진한 여자애들 하고는…….
모르긴 몰라도 보나마나 어딘가 판타지 소설에서 베껴온 얘기다. 난 맨날 자니까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만, 안 들어도 뻔하지 뭐. 그리고 드래곤 같은 게 실제로 있었을 리 없잖아?
―수업계획서에 따르면, 강의 내용은 ‘지구를 정복했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대체 내가 왜 이 ‘지구정복학과’에 지원을 했는지 모르겠다.
제발 이제는 방구석폐인 생활에서 벗어나라는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대학에 진학한 거라 그런 건 별로 상관도 없지만.
그리고 어차피 이제는 휴학을 하기로 마음까지 먹었기 때문에 지구정복이든 우주정복이든 내가 알 바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자퇴서를 내고 싶지만, 방구석 생활에 대한 나름의 죄책감 때문에 부모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 차마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겠다.
툭―.
“똑바로 좀 보고 다니지?”
“아, 미안.”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지나가던 동기들 중 한 명하고 부딪쳤다.
익숙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녀석은 공격적으로 말했지만 굳이 엮일 필요도, 엮이고 싶지도 않다.
“야, 쟤 진짜 오타쿠 아니냐?”
“음, 확실히 안경도 쓰고, 키도 작고, 수업시간엔 자고, 평소에도 애니메이션하고 소설만 처보고 돌아다니던데. 뚱뚱하지 않다 빼고는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것 같아. 키킥.”
……다 들리는데 굳이 속삭이는 척 할 필요까지야.
방구석 폐인 생활을 하는 이유에 대해 꼽자면 굳이 인간관계를 깊이 만들고 싶지 않아서가 제일 크다. 서브컬쳐에 빠진 건 부수적인 사항이고.
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싫어하느냐고? 결정적인 이유는 말하고 싶어도 막상 입을 벌리면 무의식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일단은 사람을 못 믿겠달까. 아니면 질렸달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2D캐릭터와 사랑에 빠진다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3차원 여자가 좋고, 많지는 않지만 친구들도 존재한다.
내가 특히나 기피하는 몇몇 유형이 있는데, 방금 저 녀석들처럼 타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남을 까내리는 걸 변태적으로 즐기는 족속들, 그리고 범죄자.
뭐 여기까지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특이한 유형이 하나 있다면 ‘여자아이’랄까. 이른바 ‘로리’의 범주에 속하는.
‘이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물론이고 ‘인간 대 인간’의 관점에서도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나는 키 154cm 미만의 여성은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로서도 가급적 사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나는 보통 키 이상의 몸매 빵빵한 여자가 좋다. 예외로 그런 여자만큼은 언급한 것들과는 상관없이 무시로 환장한다.
…….
* * *
‘교학처’.
요새, 강의 있는 날이면 수업 끝나고 내가 맨날 들르는 곳. 당연하지만 휴학계를 내기 위해서다.
“안녕하세요. 저기, 휴학계 내려고 왔는데요…….”
최근 일주일 간 거의 매일같이 본 교학처 직원 누나. 학교 다니면서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최근에 알고 보니 상당히 미인이다.
갈색 웨이브 머리에 성숙한 외모. 몸매도 키도 내 이상형에 합격점!
“헤헤…….”
너무 자주 봐서 이젠 인사도 생략한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뒤통수 한 번 긁어주면 서로 통한다.
“이유하 학생, 오늘 또 왔네요? 오늘은 정말 제출하실 건가요? 호호.”
“아, 네! 맞아요. 이번엔 꼭 낼 겁니다. 내고말고요.”
직원 누나는 딱히 내게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저 천사 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상냥한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친절하게 대해준다.
요 2주간 계속 고민하는 날 두고도 그렇게 짜증 한 번 내지 않다니, 정말 천사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여기요! 이번엔 정말로 가져왔어요!”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힙색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갈색 서류봉투를 열심히 펴서 건네주었다.
“어머! 한번 확인해 볼까요?”
직원 누나가 서류 봉투를 열어보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얼굴에 홍조가 띤다.
“………….”
누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야릇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나에게 반해버린 걸까? 어째서?!
보통 이렇게 우유부단한 모습을 좋아하는 여자는 없지 않나? 혹시, 휴학을 향한 내 남다른 고뇌가 모성본능을 자극한 건가?!
누나는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얼굴이 빨개지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데스크를 박차고 나와 내 앞에 섰다.
“유하 학생……?”
“네, 네! 고백이라면 언제든지 환영―”
누나가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았다.
―으응? 얼마나 화끈한 고백을 하시려고…….
“야이, 귓구녕에 똥 처박은 자식아아――!”
네? 저, 저기요? 지금 뭐라고…….
누나의 머리에서 피어오르던 김은 증기기관차가 내뿜는 희뿌연 수증기처럼 거세졌다.
귀, 코, 입,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전부 연기가 나와 교학처 안을 자욱하게 메울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남자가 됐으면 말이야, 칼을 뽑았으면 오이라도 썰어야지, 무슨 맨날 궁상이나 떨면서 우유부단하게 시리! 아앙―?!”
저기, 그 발언은 좀 위험한 것 같―
“내가 어제도 그저께도 말하지 않았냐?! 학부모 동의서 가져오라고, 이 자식아! 휴학할 마음도 없으면서 자꾸 처올래?! 뭐 이런 또라이 같은 자식이 다 있어? 뭐? 고백? 언제든지 환영? 예라이, ――――!”
누나는 결국 쌍욕까지 터뜨리면서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듯이 날 교학처에서 쫓아냈고, 난 도망치듯 건물에서 뛰쳐나왔다.
“당장 꺼져―――!!!”
젠장. 아무리 그래도 쌍욕은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천사인 줄 알았는데, 그 가면 뒤에 숨겨진 건 악마보다 더했다.
“하아, 결국 오늘도 휴학을 못했구나. 이렇게 쫓겨났으니 이제는 휴학 서류는 받아주지도 않을 것 같아…….”
―진짜로 휴학은 할 생각이지만, 휴학을 핑계로 교학처 누나랑 만큼은 잘해보려 했는데 완전히 망했구나.
* * *
고단했던 하루.
지하철 덜컹거리는 소리와 안내방송이 자장가처럼 들린다.
끝 좌석이 아니면 머리를 기댈 곳도 없어 늘 목이 아프지만 그러면서도 꾸벅꾸벅 조는 걸 거부할 수 없는 게 지하철의 매력이 아닐까.
[이번 역은, ‘방상’, ‘방상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는 개뿔!
“으허! 내려야 돼! 내려야 돼!”
안내방송을 듣고 엉덩이를 송곳에 찔린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출입문을 향해 돌진하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아갔다.
“아씨, 뭐야 저 새끼?”
“으웩, 침 줄줄. 개짜증. 매너가 없어!”
지하철 문이 방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닫히고, 오늘도 욕으로 수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면서 간신히 지옥철에서 빠져나왔다.
대체 왜 방상역까지만 사람이 많은 거냐고. 여기서 사람 쫙 빠지고 난 다음 역은 널널하게 내리던데…….
“그렇다고 다음 역에서 내리자니 집까지 너무 멀고. 썩을.”
혹시나 해도 역시나 보잘것없는 하루의 연속. 이러한 현실이 나를 방구석으로 안내하는 데에 일조한다.
심지어 오늘은 2년간의 방구석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나름 가슴에 두근거림을 품은 교학처 직원 누나마저도 파랑새처럼 떠나가 버렸다. 크흑!
까앙―!
한적한 공터 가운데에 떨어져있는 애꿎은 빈 깡통에 괜히 화풀이를 한다.
중학교 한 때는 나름대로 친구들 사이에서 축구 깨나 한다고 불렸던 나다.
빈 깡통은 내 발길질에 로켓처럼 공터의 어둠속으로 날아가다 둔탁한 소리를 내고는 발진을 마감했다.
“――, 어떤 놈이냐?”
―헉, 누가 맞았나보다. 젠장, 오늘 일진 더럽게 꼬이네.
잔뜩 화난 목소리를 들어보니, 백룡파 양아치 건달 누님 사이즈다. 얼굴은 착한데 성격은 더럽게 못생긴.
내가 아무리 누님 타입을 좋아한다고 해도 양아치나 일진, 범죄자는 사절이다.
“네놈이냐?”
“……헉!”
찰랑거리며 윤기 나는 은빛 머리카락.
청순하고 흠잡을 데 없는 미모.
백옥같이 새하얗고 티 없이 깨끗한, 보드라워 보이는 피부.
비에 젖으면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은밀한 시폰 소재 덕분에 남성의 성감을 자극하는 실루엣이 은은하게 비치는, 수수하면서도 관능미를 부각시키는 흰색 원피스.
그러한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는 육감적인 곡선의 미학의 절정을 가진 가슴과 골반.
그 외모에 안 그래도 좀처럼 다물지 못하는 쩍 벌어진 입이지만, 그녀의 맨살에 걸린 은은한 빛깔의 꽃자수 발찌와 뿔처럼 생긴 독특한 한 쌍의 ‘머리핀’의 매력이 내 심장에 결정타를 날린다.
꽤나 아름다웠던 교학처 누나를, 속된말로 ‘오징어’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 같은 현상이 상상으로 이루어졌다.
“인간, 죽고 싶은 것이냐?”
그녀가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구닥다리 말투가 과연 그녀의 본래의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성숙하면서도 귀여움을 동시에 지닌, 남자의 마음을 훔치는 매력이 가득한 목소리.
“대답하지 않는 것이냐?”
어느새 내 앞으로 한 발자국까지 다가온 그녀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반개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와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내밀은 고개와 함께 찬란한 은발이 그녀의 풍족한 언덕 쪽으로 가라앉았고―
―햐, 향기가……!
나도 모르게 코를 발랑거리며 그녀에게서 풍기는 황홀한 후신경자극체를 식사하고 말았다.
“……꽤나 여색에 수몰한 인간이로구나. 나의 뿔을 보고도 죽음을 앞둔 공포보다 육체를 탐하려 하다니.”
―아차.
나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정신을 다잡은 다음,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예, 예? 아, 아뇨! 무슨 소리하시는 거예요? 하하, 저 변태 아니거든요?”
이 여자가, 아니, 이 모든 아름다움을 다 가진 듯한 여신이 내 발길질에 날아간 깡통에 맞아 화가 나 계시다는 것을 망각할 뻔했다.
잘못하면 성희롱으로 인생에 빨간 줄 긋고 취직인생을 종칠지도 모른다. 나중에 뭘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감옥에 가는 건 사절이다.
“200년 만에 세상에 나오니 어처구니없는 일도 다 있다. 정말로 내가 무섭지 않은 것이냐?”
무섭긴요, 맨날 곁에 두고 눈호강 하고 싶은 심정인데요?
가만, 근데, 아까부터 말투가 대체 왜이래? 인간, 인간 거리기나 하고 혹시―
“중2병이세요?”
앗! 머릿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병? 하, 이 몸이 병이라도 걸렸다는 것이냐? 내가? 이 ‘엘리시아 폰 예런하이거’가?”
그녀는 내 입에서 ‘병’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날렸다.
“크큭, 하하하――!”
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이름도 뭐, 뭐라고? 얄리...? 뭐였지. 하이거딩거였나?
“설마…….”
―혹시 신종 도쟁이인건가?!
튀자. 나는 도쟁이도 사절이다.
“안녕히 계세요――. 도에 관심 없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최대한 발을 빠르게 잔달음질 쳐서 벗어났다.
한 30초 쯤 전력질주 했으려나.
“하아―! 하아―! 진짜 오늘 마가 꼈나!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만, ――응?!”
“얼빠진 녀석이지만 꽤 흥미로운 인간이로구나. 조금만 갖고 놀아주겠느니라.”
히이이익!!? 뭐야, 언제 내 앞에…….
큰일이다. 오랜 은톨이 생활 때문에 여자한테 달리기마저 진 건가! 이런 굴욕이!!
“저기요, 죄송하지만 저 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
―크헉! 뭐야, 이 여자! 무슨…… 힘이……!
그녀의 손아귀가 내 입을 틀어막듯이 쥐고는 내 몸을 들어 올렸고, 나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고 주먹으로 쳐보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몸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얼굴을 틀어쥔 손에 태양처럼 찬란한 빛을 뿜어 내 온몸에 흡수시킨 그녀가 근처의 석재 조각상 쪽으로 나를 내던지며 비웃듯이 말했다.
“안심하거라. 죽는 것은 오로지 육체뿐일 테니.”